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86)
EP.586 통일(統一)(2)
토라져도 제대로 토라진 황제 폐하를 어찌 달랠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 방법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지금 내가 떠올린 방법을 정말 해도 되느냐는 것.
…모르겠다.
삐진 황제 폐하께 하루 종일 바가지를 긁힐 바에야 뭐라도 해보는 편이 낫지.
“…폐하.”
“으음?”
내가 마음을 다잡고 허리를 쭉 펴며 척척 걸어오자 황제 폐하께서는 의문을 드러냈다.
한나라의 지존 앞에서 대놓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직립 보행을 하며 다가가다니….
다른 신하가 이랬다면 순식간에 금군이 들이닥쳐 그를 끌어낸 다음 저잣거리에 매달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지.
애초에 폐하께서도 걸핏하면 예의를 차리지 말라면서 은근히 압박하시는 상황인데 내가 두려울 게 있겠나.
황제에게 터벅터벅 걸어가며 이윽고 완전히 거리를 좁힌 나는 곧장 손을 뻗어 옥좌에 계시는 폐하를 꼭 껴안았다.
“…….”
“신(臣) 정릉,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한 마음뿐이옵니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폐하께서는 그대로 우뚝 굳은 채 아무런 대답도 못하시는 상황.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곧장 다정하게 폐하의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이에 대한 사죄로 제가 며칠 동안 폐하와 함께할 터이니,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시옵소서.”
“…그게 참말이더냐?”
내 말을 듣자 폐하께서 곧장 반응을 보이셨다.
이게 진짜 통하네.
만약 동물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무척 살랑거리지 않았을까.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노여움을 이리 쉽게 풀어도 되는 건지 살짝 걱정될 지경.
하지만 지금은 이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폐하의 잔소리를 피해야만 했다.
“예.”
“…좋다.”
내가 마지막으로 수긍하자 황제 폐하께서 고개를 한 차례 주억거렸다.
“그대는 자신이 했던 말을 주워 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이에 내가 급한 불은 껐다며 안심할 무렵 폐하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정정하지.”
“…?”
“그대는 지금부터 짐을 부를 때 자(字)를 상냥히 언급하도록.”
예?
나는 순간적으로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어떻게든 삼키면서 냉정을 지켰다.
이 자리에서 자(字)를 대놓고 언급하라니?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눈을 번뜩이는 이 상황에서?
이미 지금 내가 저지른 행동만으로도 후대의 평가가 두려울 지경인데 여기서 황제를 격식 없이 대했다간 정말 무슨 말을 들을지 두려워졌다.
내가 황제 폐하의 자(字)를 부르고 말을 편히 했던 것도 사적인 자리에서만 그랬던 것.
지금처럼 공적인 자리에선 난 폐하께 결코 말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리 황제 폐하와 혼인을 맺었다지만 지켜야 할 선은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니까.
내가 자리에서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는 사이 폐하께서 재촉하셨다.
“자, 어서.”
“…폐하.”
“아니면 명(名, 이름)으로 부르고 싶더냐?”
그를 들은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字)조차도 명(名)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생겨난 개념인데, 하물며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유교 문화권에서 피휘(避諱)랍시고 황제의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는 걸 생각하면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마 내가 여기서 폐하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순간 유교 원리주의자들한테 온갖 말을 다 들을걸.
아니, 유교 원리주의자뿐만 아니라 한나라의 충신들조차 의심 섞인 눈길을 보내지 않을까.
신하가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건 군주제 국가에서 상상도 못할 일.
조만간 대장군이 나라를 뒤엎고 황위를 찬탈할지 모른다며 이리저리 수군거리긴 할 거야.
그들은 버티다 부러질지언정 절대 굽히지 않는 이들이었으니 난 어떻게든 처신을 잘해야만 했다.
만약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어디 한번 끝을 보자면서 멸망전을 벌이든가, 아니면 그들이 뭐라 하든 모르쇠로 일관하며 무시하든가.
지금 내 권위가 워낙 막강하니 끝까지 가면 내가 이기긴 할 거다.
하지만 날아가는 목숨도 목숨이고 그들이 사라지면서 생길 어마어마한 행정 공백을 떠올리면 섣불리 행동할 수 없지.
그렇다면 남은 건 그들이 뭐라 하든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데….
이것도 내 주변 사람들이 워낙 극성이라 불가능했다.
누군가가 나를 욕한다고?
지금 당장 내 주변에도 눈이 돌아갈 사람이 한 명 있지 않나.
황제 폐하께서도 내가 걱정하는 점을 모르는 건 아닐 터.
아마 내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건네시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복잡한 것이니, 내가 꿋꿋이 버티며 자(字)를 언급하지 않는 순간 폐하께서 다시 토라지실 가능성이 있었다.
───짐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냐?
───…….
───역시 대장군 그대는 임신한 부인과 어린 딸을 계속 내버려 두는 냉혹한 인물이구나….
───…….
바가지…. 바가지가 긁힌다.
반박할 수 없는 팩트로만 내리꽂히는 어마어마한 폭력이 들이닥친다…!
결국 필사적으로 두뇌를 굴리던 내가 선택한 행동이 무엇이냐.
“…백련(伯戀).”
황제의 귓가에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자(字)를 속삭이는 것이었다.
“흐음….”
그런 내 절박한 심정이 전해진 것일까.
폐하께서는 이 상황을 전부 예상하셨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좋다. 오늘은 여기서 넘어가도록 하지.”
“…….”
“앞으로는 부인과 자녀를 내버려 두고 멀리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야.”
예상은 했지만 이제 장거리 원정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정말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친정(親征, 직접 정벌함)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낙양의 작은 대장군이 된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폐하를 너무 방치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내 사랑스러운 딸, 유정도 어느샌가 앙증맞게 걸어 다니고 말문이 트일 시기였지만 내가 이와 함께한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랏일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지만 내가 독박 육아를 씌운 것도 사실.
일을 열심히 하느라 가정을 소홀히 한 아버지라….
현대에도 너무나 익숙한 일 아닌가.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도 늘어났고, 이제 내가 직접 원정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전국 13주(州)를 모두 평정하고 위험 분자들을 색출한 다음 동서남북에 존재하는 모든 이민족까지 전부 아군으로 끌어들였는데 여기서 무슨 문제가 생기겠냐.
“…….”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그때 잠시 잊고 있었던 호기심이 불현듯 다시 떠올렸다.
“폐하.”
“무슨 일이더냐.”
난 황제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원정을 떠난 사이 황궁에 못 보던 얼굴이 늘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황궁 내부에서 처음 보는 관료가 권력을 차지한 상황.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물갈이라 볼 수 있는 대규모 권력 재편에 나는 의문을 드러냈다.
“아…. 그것 말인가.”
내 질문을 받은 폐하께서는 어려운 것 하나 없다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짐이 임신한 상태에서 유정까지 돌보려니 시간이 나지 않아서 말이다.”
“…….”
“그렇다 보니 국정을 돌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 틈을 타서 이상한 일을 벌이려던 연놈이 있더군.”
황제 폐하께서 잠시 쉬는 틈을 타 이상한 일을 벌이려 했다고?
…진짜 지독하네.
이러니까 왕들이 일벌레가 되는 거지.
꼭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허튼 마음을 품는 놈들이 있다니까.
대장군도 멀리 원정을 떠났고 황제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 해볼 만하다 여긴 걸까.
“군부에 자리 잡은 몇몇 장수들과 결탁해 사사로이 정치 파벌을 형성하려던 관료들.”
“…….”
“그들의 명단을 파악해서 전부 목을 베어버렸느니라.”
어디를 가든 똘똘 뭉쳐서 제 이익을 위해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있지.
내가 없을 때는 황제 폐하가 그들을 지켜봤을 테니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그 황제 폐하조차 육아로 인해 자리를 종종 비우니까 슬그머니 움직인 모양이다.
“솔직히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고 몇몇은 군부와 결탁까지 해 골머리를 앓았다만….”
폐하는 잠시 말을 끊더니 나를 바라보면서 담담히 웃어 보이셨다.
“표기장군이 직접 움직여서 군부를 한 차례 청소했다.”
“…표기장군 말입니까?”
“그래.”
표기장군이라면 조조 말하는 거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폐하께서 자세히 설명하셨다.
“불과 하룻밤 만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갔더군.”
“…….”
“대부분 뭐가 일어난 줄도 모른 채 목이 잘려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데, 그 광경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그대도 직접 지켜봐야 했느니라.”
수십 명?
진짜 얼마나 죽인 거야.
아니 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장수 대부분은 인맥과 혈연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경우긴 하다.
그러니까 명망 높은 호족 출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 사이에서도 드물게 능력이 뛰어난 장수도 있었지.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는 게 당연한 법.
이에 장수들이 불만을 품고 벼르다가 관료와 결탁한 거라면 이상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설마 이 기회에 나와 사이가 안 좋았던 놈까지 청소한 건 아니지?
내가 대장군이란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권을 빼앗기고 은연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던 놈도 몇몇 있었던 상황.
폐하와 조조, 이 두 명이라면 이번 기회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런 잠재적 위험 분자까지 처리했을 것 같아.
“후후.”
나는 도대체 무슨 광경을 떠올리시는 건지 쿡쿡 웃으시는 황제 폐하의 모습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