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89)
EP.589 통일(統一)(5)
내가 낙양으로 돌아온 직후 며칠 동안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 나 잡아봐라!”
“조심해! 그러다가 넘어진다!”
철퍼덕!
“으에에엥──!!”
“아이고.”
황궁 안에서 뛰어놀다가 자리에 넘어진 유정을 어르고 달래준다거나.
“아직 나이가 어린 방계 황족 말이더냐?”
“예. 이민족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왕족과 혼인 동맹을 맺기로 했습니다.”
“흐으음….”
고구려의 산상왕, 고연우와 나눴던 약속을 언급하며 황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지.
애초에 최근 며칠 동안은 폐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황궁 바깥으로 나가질 않았으니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후보라면 많이 있구나.”
“정말이십니까?”
폐하의 대답에 나는 살짝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적당한 인원을 찾는 게 무척 어려울 줄 알았거든.
나이가 어린 방계 황족을 찾는 것도 살짝 어렵지만, 무엇보다 다른 나라와 혼인 동맹을 맺어도 허튼 마음을 품지 않을 인물을 찾는 게 매우 중요했다.
“짐이 잠깐 잊고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것이 있구나.”
내 반응을 본 폐하께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최근 있었던 사건으로 처리한 인원 중엔 황족들도 있었느니라.”
“…….”
“아무렴, 그들 입장에서도 정치적 명분이 필요할 테니 황족과 결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그건 그렇다.
이 나라는 결국 유(劉)씨가 세운 한나라니까 세력의 뒷배에 황족이 있고 없고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을 터.
비록 그 황족이 권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방계 황족이라 한들 말이야.
이렇게 보니 정말 대규모로 문제를 일으키긴 했구나.
내가 십 년을 넘는 세월 동안 사분오열 흩어진 한나라를 정리하며 휘하에 받아들인 수많은 기득권들.
그들은 본래 높은 자리에 앉아 온갖 이익을 취했는데, 내가 자꾸 백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간섭하니 날 끌어내리겠답시고 움직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과거 대놓고 티를 내다가 진작 숙청당한 몇몇 특이한 경우와 다르게 아주 은밀히 때를 기다린 것이 분명할 이들.
“덕분에 눈에 거슬리던 놈들을 전부 처리할 수 있었으니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낙양의 관료 3분의 1이 관직을 박탈당했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로 문제가 일어났단 뜻이었다.
원래 사회를 개혁할 때 국가가 몸살을 앓는 것이 당연하긴 하다만….
무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정부패에 시달리던 한나라가 얼마나 썩어있는지 알 수 있을 지경.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분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좋아해야 하나.
“이번 사건으로 황궁에 완전히 고립된 방계 황족 명단을 보여주마.”
폐하께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젓자 그녀를 보필하던 황실 관료가 스리슬쩍 자취를 감췄다.
후보자가 많다면 고연우가 부탁했던 대로 정략결혼 당사자가 원하는 인물을 골라잡을 수 있을 터.
훗날 혼례식이 치러져야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는 요동 방면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때 폐하께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후후, 만약 둘째가 아들로 태어난다면 그와 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
그런 방법도 있긴 하네.
고구려의 공주와 이어줄 적통(嫡統)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 둘째로 아들이 태어난다면 괜히 방계를 찾는답시고 이리저리 뒤집어엎을 필요가 없었다.
일단 고구려의 공주가 내 아들을 마음에 들어 해야겠지만 말이야.
이미 난 고연우와 약속을 맺었으니 이를 어길 마음이 없었다.
나라 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 아니겠나.
물론 한나라의 적통과 맺어지는 건 방계와 맺어지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외교적 이익을 안겨주겠지만….
정작 그 적통이란 놈이 자기 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어떻게 되겠나.
고연우가 용서하더라도 내가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난 너를 이렇게 키운 적이 없다며 크게 혼내지 않을까.
적통과 이어지든 방계와 이어지든 결국 혈연관계를 맺는 것은 똑같았으니 난 굳이 이에 간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빠! 안아줘!”
“어라, 언제 깼어?”
“빨리!”
나는 낮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내게 엉겨 붙는 유정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꺄아!”
난 안아 올리기 무섭게 꺄르륵 웃으며 아무런 근심 없이 반짝이는 유정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간 살펴보니 날이 지날수록 어휘가 늘어가고 있던데, 이는 분명 유능한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증명하는 것일 터.
문득 궁금증이 든 나는 유정에게 물었다.
“우리 딸은 커서 뭐가 하고 싶니?”
“우움….”
유치원을 다녔던 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 해봤을 꿈 말하기.
그때는 모두 어린아이답게 대통령이라든가 경찰, 소방관처럼 막연히 멋있어 보이는 걸 말했었지.
과연 우리 딸은 무엇을 멋있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빠처럼 세계 정복하기!”
“…….”
유정의 말을 들은 나는 자리에 우뚝 굳어버렸다.
그건 좀 위험한 꿈 같은데.
혹시 막 만리장성을 넘는다거나 배를 타고 저기 서쪽으로 건너가는 건 아니지?
어린아이답다면 어린아이답지만 나라를 말아먹기 딱 좋은 포부에 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꿈은 없니?”
“다른 꿈?”
내 질문을 받은 유정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표정을 활짝 폈다.
“아! 있어!”
“오, 그게 뭔데?”
역시 꿈은 하나만 품으면 안 되지.
세계 정복처럼 무시무시한 꿈보다는 조금 더 꿈과 희망이 넘치는 동화 같은 꿈을….
“엄마처럼 아빠 부인 되기!”
“…….”
이것도 상당히 곤란한 꿈이구나.
이게 그 뭐냐.
엘렉트라 콤플렉스인가 하는 그건가?
그래도 이건 아이가 어릴 때만 나타나는 일시적인 증상이라니까 괜찮을 터.
원래 여러 창작물에서도 딸의 쌀쌀맞은 태도에 흑흑 슬퍼하는 아버지가 많지 않나.
‘어릴 때는 아빠와 결혼하겠다 말했으면서….’라 언급하는 걸 잊으면 안 되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딸이 데려올 놈팡이 앞에서 꼭 이런 추태를 보여주는 게 내 꿈이다.
한나라의 대장군이고 뭐고 그냥 딸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오늘도 딸의 흑역사라 기록한 도서관에 책 한 권을 꽂아 넣은 나는 씩 웃으면서 유정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것참 기대되네. 잊으면 안 된다?”
“응!”
폐하께서는 그저 이 광경을 조용히 웃으시며 지켜볼 뿐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광경을 위해서 내가 여태껏 수많은 고생을 해 온 것 아니겠나.
이제는 정말 아무런 전쟁이 터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
“저기요,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인가요?”
“…?”
삼공(三公).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
민정, 군사, 토목 등 국가의 모든 대사를 책임지며, 구경(九卿)이란 아홉 고관들보다도 막대한 권력을 부릴 수 있는 한나라의 최고위 관직.
현재 한나라의 실세라 부를 수 있는 대장군의 입김으로 나란히 자리를 차지한 군사(軍師)는 퉁명 맞은 목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아뇨. 그냥 답답해서 말이죠.”
제갈량의 질문을 받은 사마의는 온갖 복잡한 내용이 적힌 죽간에 뭐라 휘갈기고는 탁 소리를 내며 붓을 내려놓았다.
보랏빛 머리의 군사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대장군 좋아하잖아요.”
“흡…?!”
“콜록!! 켈록!!”
그 갑작스러운 말에 제갈량은 물론이고 근처에서 눈치를 살피던 방통까지 기침을 내뱉었다.
“…….”
방통이 여전히 기침을 내뱉는 사이 제갈량은 곧장 냉정을 되찾고 사마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흥,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가요?”
어지간한 장정조차 겁을 먹을 냉정한 눈빛이었지만 사마의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딱 한 걸음만 나아가면 되는데 그게 두려워서 나아가지 못하는 겁쟁이의 눈빛은 전혀 안 무서운데요?”
“…….”
여느 때처럼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도발하며 속을 긁어대는 말에 제갈량은 침묵만 지켰다.
사실 제갈량은 사마의가 어째서 틈만 나면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군사란 상대의 심리를 꿰뚫고 불확실한 미래를 밝혀내며 주군을 인도하는 자리.
그 어떠한 책사보다도 뛰어난 지성을 가진 소녀에게 근처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그녀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갑갑했을 터.
애초에 본인이 직접 답답하다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도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장군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장군도 알고 있다.
자신이 대장군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늘 근처를 맴도는 것에서만 끝나기에 대장군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딱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그분께서 먼저 다가오실 텐데 자신은 어째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걸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에 역설적으로 감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혹여나 있을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못하는 건가.
제갈량이 담담히 눈을 감으며 도발을 흘려넘기자 결국 인내심의 한계에 달한 사마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으, 도저히 안 되겠네!”
“…….”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허구한 날 으르렁거리는 악우(惡友)라도 결국 따지고 보면 가까운 사이인 법.
사마의는 본인이 답답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