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
EP.6 황건적의 난(2)
난데없이 당황스러운 말을 내뱉은 장량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제가 할 말은 여기서 끝입니다.”
장량은 내가 공격하지 않을 거란 걸 믿기라도 하듯 무방비한 상태로 등을 보였다.
“…가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떠나가는 장량을 붙잡자 장량은 고개를 돌려 한쪽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무언가 궁금하신 거라도?”
황건적이 우리를 적대하지 않을 거라는 말.
그 말을 들은 이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장량이 맞나?”
장각. 장보. 장량.
보고서에 의하면 이 셋은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다고 한다. 체형마저 똑같아 구별하기 어렵다고 들었지. 지금 장량의 생김새를 보아하니 보고서의 내용 그대로일 거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곤 쓰고 있는 가면 색깔뿐. 그렇기에 관군은 가면에 따라 누구인지 구별한다고 들었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반란군 수괴의 얼굴을 모르는 건 어떨까 싶다만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했나.
“네가 황건군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지만 지금 이 행동은 월권행위 같은데.”
황건적은 어디까지나 장각을 중심으로 뭉친 세력이다. 장보와 장량은 그에 호응해서 일어난 조력자들이지.
황건적이 내세우는 기치(旗幟)가 무엇인가?
한나라를 무너트리고 그 자리에 조화와 번영이 함께 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근데 나를 적대하지 않는다고? 장량 말대로 내가 좀 열심히 하긴 했지만 나도 결국 한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관리 중 하나인데?
내가 황건적에 투항한 것도 아니고 지금 장량이 한 행동은 황건적의 기치(旗幟)를 훼손하는 짓이다.
아무리 장각의 동생이라고 한들 허용되지 않을 일이지. 만약 이런 짓을 할거라면 본인이 직접 해야만 후폭풍이 가장 적을 것이다.
그래.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게 장량이 아니라면 어떨까?
위에서 설명했던 대로 셋을 구별하는 방법이라곤 가면밖에 없으니 가면만 바꿔도 손쉽게 위장이 가능할 터.
“…….”
내 의문에 장량은 살짝 웃는 것 같았다.
장량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대답하기 싫으면 됐는데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이쪽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말. 우리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불가침 조약이라 볼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어지러운 상황이라 먼저 공격하지 않는 거지 조정에서 명령이 내려오면 우리도 너희를 칠 수밖에 없다.”
여포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계속 내려오는 이민족들.
마찬가지로 계속 맞으면서도 꿋꿋이 산길 틀어막고 약탈하는 흑산적들.
무능한 조정이라지만 그래도 답이 없는 병주의 상황을 알고는 있는지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병주에 대해선 딱히 간섭이 없었다. 황건적에 눈을 돌릴 여력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황건적이 규모를 불리면서 점점 더 위세를 떨친다면 침묵하고 있던 조정에서도 분명 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그런데도 날 적대하지 않겠다는 건가?”
언젠가 분명 나한테 공격받는 날이 올 것이다.
장량은 가면 뒤에 숨겨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장량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면 제가 됐든 한나라가 됐든 마지막 싸움이 될 테니까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듯, 장량의 눈길은 어딘가에 못 박혀있었다.
마치 미래라도 보고 있는 듯한 어투에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군영으로 돌아간 장량은 15만 황건적을 이끌고 병주에서 빠져나갔다.
…장량이 아니라 장각이라 불러야 하나.
──────────
그 이후 황건적과 한나라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연주와 예주 등 중앙 지역 진압군을 맡은 좌중랑장 황보숭.
형주와 양주 등 남부 지역 진압군을 맡은 우중랑장 주준.
마지막으로 장각의 본대가 존재하는 기주와 유주 등 북부 지역 진압군을 맡은 북중랑장 노식.
이 모두가 황건군에게 한 번씩 크게 패배했다.
그 와중에 노식이 뇌물을 주지 않자 십상시는 노식을 좌천시키고 동탁을 북중랑장 자리에 앉히는 바보같은 짓을 벌였다.
결국 동탁이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에게 패배해 병사 대부분을 잃고 도망가자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이에 조정은 부랴부랴 북중랑장 자리에 중앙 지역 진압을 거의 끝마친 황보숭을 다시 앉히며 뒤늦게 뒷수습을 했다.
제 한 몸 불태워 썩어빠진 나라를 불사르고자 하는 자들.
충성을 맹세한 나라를 지키고자 모든 것을 바치는 자들.
단순한 도적 떼와 토벌군의 싸움이 아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곳곳에서 피를 흘려나가는 잔혹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관군에게로 승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 많던 황건군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압도적인 규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검을 잡은 지 1년도 안 된 백성들.
아무리 썩어가고 있는 나라라 한들 몇백 년 동안 이어진 한의 마지막 저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장각을 비롯한 모든 수뇌부들은 병사 대부분을 잃고 마지막 도시인 거록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관군이 모두 힘을 모아 마지막 일격을 준비할 때 병주로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병주자사 정원은 힘을 보태 반란군 수괴인 장각을 없애는 데 일조하라는 내용.
지금까지 우리를 배려해 침묵하고 있던 중앙에서 명령서가 내려왔다. 이 기회에 확실히 끝내겠다는 거지.
– 그때면 제가 됐든 한나라가 됐든 마지막 싸움이 될 테니까요.
장각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상할 정도로 내게 친절하던 알 수 없는 놈.
결국 네 말이 맞았구나.
──────────
이민족과 흑산적 때문에 그리 많은 병력을 차출할 수 없었던 나는 여포와 함께 군사 3천 정도만 이끌고 거록으로 향했다.
거록.
장각이 처음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곳.
결국 밀리고 밀린 황건적은 그곳에서 마지막 항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총지휘를 맡고 있던 황보숭은 내가 군을 이끌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백발이 성성한 황보숭 장군은 많이 피로해 보였음에도 눈동자에서 총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병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 지원군이라니! 그대의 도움을 잊지 않겠네!”
“저야말로 그리 좋게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젊은 친구가 말도 예쁘게 하는군. 그래. 옆에 있는 이 친구가…?”
황보숭이 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여포를 바라보았다. 핏빛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확실히 눈에 띄긴 하지.
“예. 여포입니다.”
“하하하! 그 이름 높은 천하무쌍이 찾아왔으니 이제 반란군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겠군!”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들었는지 황보숭은 껄껄 웃으며 기뻐했다.
여포가 내 뒤에 있던 서여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서여는 딱히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일단 막 도착했으니 상황 설명부터 필요하겠군. 따라오게.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주겠네!”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에 뭘 감사까지야!”
그렇게 말한 황보숭은 또 껄껄 웃었다. 많이 호탕하시네.
막사로 안내받은 나는 황보숭 장군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리 군은 현재 6만 정도고, 거록에서 저항을 펼치고 있는 황건적은 총 8만 정도일세.”
“8만이라…. 많이 줄었군요.”
“그렇지. 내가 살다 살다 8만을 적은 숫자라 말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처음 황건적이 일어날 때 규모가 워낙 아찔했죠.”
“난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살짝 소름이 돋는다네.”
전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100만도 노려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대다수가 무기만 대충 쥔 농민병이라고 한들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황보숭은 말을 이었다.
“거록에 남은 황건적은 8만밖에 안 남았지만 쉽게 볼 일도 아니야. 이 모두가 장각의 정예병이라 볼 수 있으니까.”
“훈련이 부족한 농민병 수준이 아니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래서 점령에 더 애를 먹고 있다네.”
농민병과 정예병의 차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 둘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무기를 더 잘 쓰고, 사기가 높아 잘 도망가지도 않으며, 진형도 쉽게 와해되지 않는다.
“장각이란 놈이 의학에 정통하다는 게 사실인지 별 해괴한 독을 무기에 발라 뿌리고 있더군.”
“독이라면….”
“그래. 어디서 그만한 양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화살 한 대만 스쳐도 골골거리면서 병사들이 제대로 싸우질 못하네.”
이게 농민병들로 거의 2년 동안 정예 관군을 상대로 싸워온 비법인가?
장각 혼자서 어떻게 그 많은 무기에 바를 독을 만드는 거지. 다른 사람이 배합을 알고 있다 해도 평범한 사람은 쉽게 따라하지 못할 텐데.
진짜 요술이라도 부리나?
“의원들을 불러 무슨 독인지 알려 해도 알 수가 없다고 하니…. 나 원 답답해서!”
황보숭은 가슴을 쿵쿵 쳐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이게 끝이네. 나머지는….”
굳게 닫혀있는 성문을 바라보며 황보숭은 담담히 읊조렸다.
“직접 싸워보면 알겠지.”
──────────
“…왔군요.”
거록에 널려있는 흔하디흔한 집.
그 황건적을 일으킨 장본인이 사는 집이라기엔 너무나도 단출한 곳에서 장각은 고개를 들었다.
천기.
장각은 어릴 적부터 하늘의 신비라고 불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천기를 읽는 것은 재미있었다.
갑자기 맑은 하늘에 나타나 사라져버리는 알 수 없는 형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열심히 생각해보고, 별의 위치를 관측하며 무엇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아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장각은 천기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아버렸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천명(天命).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의원님…. 아파요…. 살려주세요….’
한참 즐겁게 뛰어놀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병에 걸려 죽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쿨럭! 의원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무거운 세금을 내지 못했단 이유로 매질을 당한 남성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의원님이 제게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 못난 놈이 버티지 못했을 뿐이니까요.’
죽은 자녀의 시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던 한 가정의 어머니가 있었다.
천명(天命).
‘대현량사님. 부디, 이 빌어먹을 나라를 없애주십시오.’
그만둘 수 없었다.
‘모두가 걱정 없이 잠자리에 드는 세상만을 꿈꾸고 있습니다.’
도망칠 수 없었다.
결말이 파멸을 향해 달려 나가는 걸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천명(天命).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자신의 어깨 위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올라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늘이시여. 대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나도 무거운 생명의 무게에 눈물을 흘렸던 날이 있다.
자신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치료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평범한 의원이었다.
다른 사람이 슬퍼하면 자신도 슬퍼지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화를 하자고 한 이유가 뭐지?’
한 남성이 있었다.
하늘의 이끌림에 따라 당도한 병주에서 남성은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서로를 보며 마주 앉은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합니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남성의 목소리.
──그게 무슨 뜻이니?
그에 되묻는 여성.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얼어 죽는 사람이 없길 바랍니다.
──돈이 없어 의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빼앗기는 사람이 없길 바랍니다.
──모두가 내일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장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침에 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