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2)
EP.62 호로관(12)
연합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기병들을 이끌고 한 번에 몰아치는 걸 걱정했는지 아주 찔끔찔끔 물러나기는 했다.
솔직히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우르르 물러났으면 도망치는 엉덩이에 기병들을 박아주려 했으니 좋은 판단이었다.
정말 끝까지 저러는 걸 보면 여포에게 한 번 찔린 게 어지간히 트라우마였나 보다.
연합군 군영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슬금슬금 멀어져갔다.
당연히 호로관을 향한 공성은 멈췄고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니 점점 병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렇다고 지휘관인 내가 이겼다고도 안 했는데 멋대로 좋아하는 건 좀 아니었으니 병사들은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계략 같은 게 아니라 연합군이 정말 물러나는 게 맞을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나는 근처에 있던 가후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후는 그런 내 의문에 담담히 대답했다.
“저런 행동을 해서 저들이 이득 볼 수 있는 점이 없습니다. 계략이라고 해도 응하지 않으면 될 뿐이지요.”
“막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다든가 그러면 어떻게 해?”
“……저들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방금 말하기 직전에 있던 그 기묘한 침묵은 뭐지.
왠지 대답을 들으면 상처받을 것 같았기에 물어보지는 않았다.
적어도 걱정 많으신 우리 주군 귀엽다는 생각은 아니지 않겠는가.
“귀여워….”
왜 진짜로 있는 거지.
나는 난데없이 훅 들어오는 장료의 목소리를 최대한 모르는 척했다.
여포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넌 또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 저도 모르게 그만.”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니 여포와 장료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 설마 평소에도 그런 생각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아니라고는 안 할게요.”
“장료야??”
여포의 질문에 장료는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몇 년 만에 처음 본 의외의 면모.
장료는 뭐든지 귀엽다면서 감싸주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청순가련한 외모에 돌봐주는 걸 좋아하는 여자?
세상에. 그런 여성이 정말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더욱더 놀라운 건 그런 장료의 면모를 내가 몇 년 동안 눈치채지 못했다는 거고.
“정릉 님. 늘 말씀드리는 거지만….”
여포가 처음 보는 장료의 모습에 연신 물음표를 띄우고 있을 때 서여가 살짝 내 귀에 속삭였다.
“저를 제외하면 전부 정릉 님을 노리는 짐승입니다.”
너도 짐승 같은데.
평소와 똑같은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서여의 몸짓에서 묘하게 달뜬 기색이 보인다.
근데 서여는 원래 나하고 거리가 좀 가까워지면 이래서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 근처에 있던 서황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 아수라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
연합군의 해체.
분명 원술이라면 이에 길길이 날뛰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지 않을까 싶은 결정이었다.
그런데 원술은 주변 사람이 예상한 것과 달리 생각보다 엄청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예 안 냈다는 건 아니다.
한동안 거처에서 고함을 지르며 우당탕 쿠당탕거리기는 했으나 그런 원술의 난동은 예상보다 빨리 가라앉았다.
늘 곁에서 원술을 지켜봐 왔던 몇몇 지성 있는 인물들은 저 옹졸한 놈이 웬일이냐며 놀라워했다.
화를 조금 덜 냈다고 놀라워할 정도인 걸 보면 원술이라는 인물이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대책 없이 화만 내고 있어서야 달라지는 건 없겠지.”
아직 완전히 화가 가라앉은 건 아닌지 머리를 붙잡으며 두통을 호소했으나 원술은 의외로 차분하게 말했다.
“괜히 혼자 남아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주군….”
“이미 결정은 났고 다른 놈들도 서서히 물러나고 있으니 본거지로 돌아가야겠다.”
침착하게 결론을 내린 원술은 꿀물을 마시는 걸 멈추고 손을 바깥으로 휘휘 저었다.
“뭐하나? 어서 짐을 꾸리고 물러날 준비를 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서로 앞다투어 천막을 빠져나가는 여러 장수들을 바라본 원술이 고개를 돌렸다.
원술은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달달한 꿀물을 마시며 깊이 생각에 빠졌다.
연합군의 해체 자체는 이미 원술도 예상했으니 생각보다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큰 피해를 보았다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연합군과 싸우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했던 정릉군.
근데 오히려 역으로 피해가 적었던 연합군은 피해가 커질까 두려워 몸을 사렸으니 어찌 승리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 적극적인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
이 둘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으니 아무리 온 천하가 모였다고 한들 정릉군을 쓰러트리기란 요원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무능한 놈들이었다. 병력 차이가 몇 배인데 결국 호로관 하나를 못 넘었다니.
피해가 적은 연합군 중에서 큰 피해를 본 제후들도 몇몇 있었으나 다른 군웅들이 그걸 신경 쓸 턱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중에 잡아먹을 수 있다면서 군침을 흘리고 있을 테니 신경 쓰고 있는 게 맞나.
처음 여포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큰 피해를 입은 하내태수 왕광, 북해상 공융.
이들은 분명 주변에서 때를 노리고 있는 군웅들에게 잡아먹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다. 결국 난세란 그런 것이니까.
겉으로는 전부 한실의 수호를 표방하고 있지만 결국 어지러운 전란을 틈타 자신의 세력을 세운 야심 찬 군웅들.
무릇 큰 뜻을 세웠으면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알아서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원술 자신은 아주 훌륭하게 세력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보면 되겠지.
연합군의 해체보다 원술의 신경을 더욱 자극한 건 따로 있었다.
“원소.”
이 고약한 년.
군세를 적게 보내는 건 물론 다른 연합군이 공세에 집중할 때 한 발 빠져 사태를 관망하기만 하던 비협조적인 태도까지.
욕도 아까울 이 천한 년은 처음 연합군에 합류할 때부터 신경을 거스르더니 결국 끝까지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연합군의 소극적인 태도에 자신이 병량 지원을 끊어버리자 오히려 원소 측에서 병량을 베풀며 연합군의 환심을 샀다고 들었다.
연합군 내에서 원술의 입지를 줄이고 겸사겸사 자신의 이름값을 드높이는 정치적인 행보.
딱 얼자라는 천한 출신과 걸맞은 저급한 술수에 원술은 이를 빠득 갈았다.
원소와 똑같이 연합군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온 년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았으나 지금 머리속이 원소로 꽉 찬 원술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 시종일관 자신과 대립하던 원소는 마지막 회의에 보냈던 자신의 대리인까지 포섭하며 원술의 인내심을 폭발하게 했다.
그때 원술은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조금 차분해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의리라는 건지 왕련이란 놈은 마지막 회의를 정리한 보고서를 원술에게 보내줬다.
하지만 이미 원소의 밑으로 들어간 놈을 믿을 수 없다 판단한 원술은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믿지 않았다.
천하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인 정릉은 연합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으니 당분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내정에만 집중하리라.
아무리 정릉 세력의 땅이 넓다고 해봤자 서량과 병주는 실속 없는 땅이다.
허구한 날 이민족이 침입하는 곳인데 거기에 경제적 기대치도 그리 높지 않은 곳.
군사적 가치는 상당하다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군비로 빠져나가는 비용이 매우 높을 것이다.
군대처럼 돈을 잡아먹는 집단은 또 없으니까.
그래. 돌아가자. 돌아가서 힘을 길러야겠다.
강동의 호랑이가 내 손아귀에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 강동 촌놈은 싸우는 건 잘해도 정치적 식견이 짧아 연달아 사고를 치며 결국 내게 의지한 놈이다.
이런 장수를 잘 거둬들여 길을 알려주는 것이 참된 군주로서 해야 할 도리.
강동의 호랑이를 앞세워 먹이를 던져주며 자신을 가로막는 놈들을 전부 깨부수면 된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이 넓은 대륙이 전부 내 손 안에 들어올 것이고, 그렇다 보면 언젠가는….
“크흠! 흠!”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은 몸을 숙이고 힘을 기르며 야망을 감춰야만 하는 때.
원술은 보자기로 소중하게 감싸두었던 물건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천명은 나에게 있다.”
보자기를 풀어헤치자 나온 것은 옥으로 만들어진 용의 형상의 물건.
오색 빛깔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제의 상징.
십상시의 난 때 분실했다고 알려진 그것이 지금 원술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것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원술은 웃음을 흘렸다.
황궁에서 환관을 처리하던 중 몰래 옥새를 훔쳐온 원술이 생각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화려하게 날아올라 온 천하에 이름을 떨칠 날이 머지않았다.”
원술 공로란 이 찬란한 이름을 후대에 널리 퍼지게 하리라.
천자(天子)의 권위를 증명하는 옥새를 손에 든 채로 원술이 음침하게 웃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끝은 안 좋아도 꿈을 이루고 간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