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22)
EP.622 변화(8)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직접 지방을 순회하는 행동.
이건 고대 제국에서 생각보다 훨씬 일반적인 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갈기갈기 찢어져 있던 중원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도 이 넓디넓은 제국을 5번도 넘게 돌아다녔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사실상 나라만 계속 돌아다녔다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국을 순회했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천하에 알려 불온분자들의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함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이 시행한 제도가 잘 행해지고 있는지 감시하는 목적도 있었다.
한곳에 권력이 집중되지 못하는 봉건제의 단점을 타파하고자 실시한 군현제(郡縣制).
서양과 동양의 고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라 부를 수 있는 혁신적인 제도.
말년에 과도한 권력을 탐하며 맛이 가버렸을 뿐이지 진시황은 확실히 능력이 매우 뛰어난 군주였다.
하지만 나라를 개혁할 때는 필연적으로 혼란이 뒤따라오는 법.
웬 듣도 보도 못한 제도로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진시황의 모습은 그 당시 여러 유력자한테 좋게 비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천하를 통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지라 온갖 반란분자들이 중원에 산재한 상황.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건강이 안 좋아지던 진시황이 무리하게 전국 순회를 돌던 이유가 있지.
자신의 권위를 천하에 드러냄으로써 괜히 허튼 마음 품지 말라고 경고한 것.
그리고 진시황의 예상은 안 좋은 쪽으로 정확히 적중했다.
진시황이 순회 도중 이승을 떠나자 너도나도 진나라를 무너트리겠답시고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네?
한낱 농민이었던 진승과 오광이 들고일어나는 걸 시작으로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던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 등등 온갖 놈들이 진나라 관리를 죽이고 도시를 차지했다.
그 이후는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지.
초한지 이야기의 시작이잖아.
하여튼 진시황이 이랬던 것처럼 황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라의 상황을 살피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단순히 글만 읽는 것과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 느끼며 여러 가지 경험을 쌓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
황제의 존재감을 널리 떨치고, 지역 백성들에게 충성을 얻어내며, 유사시 일어나는 비상 상태를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지역끼리 문화적 교류를 나누면서 통합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 아닌가.
전생에서도 진시황 말고 당나라 당태종이나 청나라 강희제 등 전국을 이리저리 쏘다닌 황제는 많이 있지.
중국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뛰어난 명군들조차 이러했는데, 내가 황제 폐하의 전국 시찰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리 없었다.
“크, 크흠.”
내 제안이 어지간히도 당혹스러웠는지 폐하께선 드물게도 얼굴을 붉히며 말씀하셨다.
“짐과 함께 순시(巡視)를 하자고…?”
“예.”
웬만하면 여유로운 기색을 잃지 않는 황제 폐하가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엄청나게 당황했구나.
내가 지금까지 폐하께 이 제안을 건네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위험하잖아.
한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졌던 군웅할거 시대는 자세히 언급할 필요도 없다.
사방이 적인데 시찰은 뭔 놈의 시찰이야.
북방에서 칭기즈 칸이 쳐들어왔을 때도 그렇고, 공손도를 붙잡기 위해 저 멀리 요동 지역까지 떠나는 것도 위험 부담이 너무나 컸다.
강동 지방에 갑작스럽게 발발한 대규모 역병도 폐하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지.
애초에 백성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겠지만 만약이란 것도 있으니까.
총명하신 황제 폐하도 이러한 점은 진작 꿰뚫고 있었을 터.
내가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더라도 그저 쓴소리만 내뱉을 뿐, 본인은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직접 출정하시려 할 때 그 소식은 필연적으로 내 귀에 들어오겠지.
그러면 난 당연히 신변을 이유로 폐하를 막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웠던 천하 정세도 이제 끝.
마치 은하수에 놓인 수많은 별자리처럼 내 휘하에서 일하는 뛰어난 인재들 덕분에 천하는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천하도 슬슬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으니,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견식을 넓혀보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크흠.”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든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여행을 권유하자 황제 폐하께선 귀엽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짐이 그대의 제안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
“곧 채비를 갖출 테니 며칠만 기다리도록.”
때늦은 신혼여행이라 그런가?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시네.
평소 주변의 눈길을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들이대면서 날 자주 당혹스럽게 만드는 폐하였지만, 내가 드물게 먼저 들이댈 경우 매우 약한 모습을 보이셨다.
하여튼 낙양에 꼼짝없이 갇혀 ‘폐하의 작은 대장군’이 되는 걸 피한 나는 피식 웃었다.
“예, 그러면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폐하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서 낙양을 빠져나갈 수 있으니 좋고.
폐하도 걸핏하면 사라지는 사랑스러운 남편과 떨어지지 않아서 좋고.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지.
“…….”
물론 황제 폐하가 향하는 곳에 있는 지방 관리와 호족들은 바짝 긴장하는 게 옳을 터.
내가 이미 가황월과 상방검을 지녀서 그들을 언제든지 즉결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지만, 적어도 정말 악질적인 놈이 아닌 이상 고통 없이 보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 비슷한 무언가로 바라보는 분이잖아.
자신의 남편과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는데 웬 이상한 놈이 부정부패다 뭐다 하면서 훼방을 놓는다?
…음.
대충 떠올려도 무슨 상황이 일어날지 예상되네.
아마 도축장에 끌려가는 짐승이 괜찮은 편이라 생각될 정도로 처절한 비명을 내뱉으면서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저번에 자리를 비웠을 때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황족을 뒷배로 두고 파벌을 형성했던 불온분자들이 대표적.
오밤중에 들이닥친 조조가 순식간에 죽여버린 몇몇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예외 없이 험악한 꼴을 당했다.
특히 그들의 뒷배로 활동하던 방계 황족의 최후가 인상적이었는데….
자세히 언급하면 입맛만 떨어지니 그만두자.
“후후, 들었느냐? 네 아비가 드디어 어미를 챙기는구나.”
“우웅?”
어느덧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폐하의 첫 번째 딸, 유정(劉桯)은 제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엄마 안 챙겼어?”
“…….”
“그러면 안 돼! 때찌야 때찌!”
5살 먹은 딸에게 구박받는 아버지라니.
이게 바로 내 업보인가.
“맴매!”
“으어?”
폐하의 품에서 빠져나온 유정이 맴매라면서 내 볼을 쭉 늘려대는 상황.
내가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모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보였다.
“꺄르륵!”
아직 태어나고 1년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 유간(劉侃)도 말이야.
…그래.
가족이 좋다면야 그걸로 됐다.
──────────
황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필연적으로 그를 대신해 수도를 다스릴 인재가 필요한 법.
이에 폐하께선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인재가 낙양을 다스릴 수 있도록 권력을 하사해야 했다.
황제를 대신해 나라의 수도를 다스리는 직책이니 그 누구도 함부로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핏줄이 고귀해야 하며, 괜히 허튼 마음을 품고 이상한 일을 일으키지 않는 인물.
누군가는 그런 인물이 어디 있겠냐 물을 수 있겠지만 의외로 정말 있었다.
평소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잘 믿지 않는 폐하께서 애지중지 여기시는 황실의 금지옥엽.
“진류왕(陳留王).”
“부르셨습니까.”
황제와 비교했을 때 눈매가 조금 더 유순하고 머리카락을 어깨 부근에서 자른 단발의 미소녀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는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낙양을 다스리고 있도록.”
“…네?”
하지만 폐하께서 본론을 이야기하기 무섭게 눈을 휘둥그레 뜨는 모습.
이는 아무리 자매라고 한들 황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황제는 자신이 총애하는 여동생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택에서 귀여운 동물 친구들과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던 진류왕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 아닐까.
이거 책 제목으로 지어도 되겠네.
‘집에서 놀기만 하던 제가 갑작스럽게 제국의 수도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라고.
“폐, 폐하.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내가 잠시 잡생각을 하는 동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류왕은 다시 공손한 모습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렇게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총명한 진류왕 전하께선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애매하단 사실을 진작 꿰뚫고 있었으니 늘 행동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기에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지만, 그걸 돌려 말하면 총애를 잃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단 소리 아닌가.
“걱정하지 말거라. 자네를 보좌할 수 있는 인재들을 남겨놓을 테니까.”
“…….”
진류왕 전하는 그를 듣고 잠시 안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짐이 어째서 자리를 비우는 건지 궁금한 모양이군.”
“…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장군과 함께 지방을 둘러보기 위함이지.”
“……?”
황제 폐하의 설명을 들은 진류왕 전하께선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
저 어마어마한 시선은 뭐지.
마치 자신은 왜 안 데려가냐고 묻는 듯한 눈빛인데.
나는 진류왕 전하의 눈빛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