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24)
EP.624 만남(2)
만리장성(万里長城).
중원이 진나라한테 처음으로 통일되기도 전, 여러 국가가 북방의 이민족을 막고자 건설한 장벽을 진시황이 거대한 규모로 증축해 하나로 이은 건축물이다.
요동에서 저 멀리 서량 끄트머리까지.
말 그대로 한나라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쭉 이어진 엄청난 길이의 장벽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둘러쌀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기다랗다던데….
하여튼 스케일도 거대해.
그러나 이 시기의 만리장성은 어디까지나 흙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만들어낸 반죽 비스름한 무언가로 지은 토성에 불과했다.
현대 사람이 기억하는 석벽은 훗날 명나라 때에서야 등장하지.
대충 1,000년 뒤구나.
하지만 비록 석벽이 아니더라도 소규모 이민족 부대는 격퇴할 수 있고, 만약 이민족이 대규모로 등장하면 적어도 그들이 침입했다는 걸 알려서 군대가 대비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으니 만리장성은 본인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단지 오랜 부정부패에 시달리느라 건물을 수십 년 동안 관리하지 않은 게 문제일 뿐!
현재 만리장성은 곳곳이 무너진 상태로 북방에서 놀러 오는 이민족들을 슝슝 통과시켜주고 있었다.
저승에 있는 진시황이 피눈물을 흘릴 상황이군.
누군가는 만리장성이 반쯤 폐허가 됐으니 이걸 보수하면 되지 않겠냐 말하겠지만….
그게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건축하기 위해 엄청난 숫자의 백성을 가혹하게 부려 먹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150만 명도 넘는 백성이 북방으로 끌려갔고, 그들은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목 공사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어엿한 모양새를 갖춘 이유가 있다니까?
백성을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밤낮할 것 없이 굴리면서 인간을 극단적으로 쥐어짠 것이다.
빛과 어둠이 너무나 극명한 중원 최초의 통일 군주.
그게 바로 폭군 진시황이었다.
하여튼 공사 인부만 무려 수백만이 투입됐던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보수하기 위해선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았다.
근데 지금만 해도 처리할 것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과거 제도나 우두법 접종은 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대운하 건설과 강동 지방 개발이라는 대규모 토목 공사도 진행하는 상태.
개발도 적당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해야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보인다며 무작정 벌려놓기만 하다간 국고가 텅텅 비어서 무소유 정신을 실천할 수도 있었다.
…천연두 이놈 생각할수록 화나네.
이 빌어먹은 질병 때문에 재산이 얼마나 날아가는 거야.
“오셨습니까!”
본인의 재주를 발휘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전달받은 것이 분명한 인상의 지방 호족.
그는 내가 본인이 다스리는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달려와 넙죽 엎드리면서 환영해줬다.
“행동이 빠르군.”
“아무런 재주도 없는 부족한 몸이니 이런 것이라도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나.
이놈이 대충 어떤 놈인지 알 것 같네.
“헤헤….”
“…….”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엎드리는 건 그렇다 쳐도 그 비굴한 웃음은 어떻게 못하냐.
인상도 좋지 않은 놈이 그러니까 괜히 밉상이야.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사를 올린 지방 호족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선 어디 계시는지요?”
“흠.”
난 그 질문을 듣고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폐하의 신변과 관계된 내용은 발설할 수 없다.”
“그, 그렇습니까.”
자신의 질문이 경솔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지방 호족은 뒤늦게 놀란 기색을 보였다.
진시황도 걸핏하면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온갖 일을 겪었지 않았나.
진시황은 전국 순행을 돌 때 똑같은 마차를 여러 대 끌고 다니며 암살 위협에 대비했다고 하는데, 그 의도는 정확히 먹혀들어가 훗날 장량이 진시황 암살을 실패하는 이유가 된다.
한고조를 도운 신산귀모 장량 맞다.
얼마나 철두철미했으면 그 장량조차 진시황이 어딨는지 감을 못 잡고 찍기만 했겠냐.
그리고 하필 찍은 마차가 빈 마차라서 암살이 실패했다고 적혀있으니, 장량이 영입했던 창해 역사(滄海 力士)란 암살자도 참 어지간했다.
홀몸으로 진시황의 호위대를 뚫고 마차까지 부숴?
도대체 뭐 하는 괴물이었을까.
아마 120근이나 되는 철퇴를 슝 던져서 부순 것 같기도 한데 그것도 어지간하지.
진시황조차 목숨이 아찔해지는 일을 겪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 난 흔치 않게 사치를 부려 커다란 마차를 여러 대 만들었다.
내 명령으로 만들어진 마차가 몇 대인지도 기밀이고, 폐하를 비롯한 내 가족이 어느 마차에 있는지도 당연히 기밀 사항이지.
나는 눈앞에 있는 호족에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 전할 이야기가 있다면 내가 대신 전해주도록 하지.”
“…….”
“아니면 내게도 함부로 전달하지 못할 중요한 정보인가?”
내가 그리 묻자 지방 호족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낱 졸부가 경솔하게 내뱉은 물음일 뿐입니다!”
대충 예상은 했다만 벌써 이런 놈이 튀어나오네.
정말로 아는 것이 없는 게 문제인지,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욕망을 못 이긴 건지….
이번 기회에 황제 폐하의 호감을 사고 입신양명을 이루려는 호족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폐하의 마음에 드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을 텐데, 내가 이런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지.
───대장군의 위대한 업적은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만천하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
날 정말 온 힘을 다해 극찬하면 듣기 좋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시거든.
이게 바로 평범한 관료가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만 보면 무엇이 복잡하냐 물을 수 있겠지만….
폐하 앞에서 나를 칭찬할 때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함정이 숨겨져 있었다.
───…진심을 담아 내뱉는 말이 아니군.
───폐, 폐하?
───됐다, 흥이 식었으니 물러나도록.
대충 아첨(阿諂)이라고 해야 하나.
폐하께선 환심을 사기 위해 알랑거리다가 거짓말을 내뱉은 관리를 가차 없이 내쳐버렸다.
나를 칭찬할 때는 정말 마음을 듬뿍 담아서, 한 치의 거짓말도 없이 진실만을 고해야 한다는 것.
…거짓말을 간파하는 뛰어난 눈치를 왜 그런 곳에 사용하는 거지.
내가 다 부담스럽네.
세월이 흐를수록 곳곳에 내게 우호적인 관료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부터가 이런 짓을 일삼는데 내게 우호적인 인물이 안 늘어나고 배기냐.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사마의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원래 요(鐐)는 무거워야 하는 법이니까요.
───요(鐐)?
또 알 수 없는 단어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리 꼬꼬마 군사는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족쇄(足鎖) 말이에요. 족쇄.
───아하.
───그것도 모르시면 도대체 어쩌잔 거예요?
나는 잘못한 거 없다.
어렵게 말하는 너희가 나쁜 거야.
하여튼 사마의가 언급한 문장의 뜻은 간단했다.
───주변에서 붙잡는 사람이 많을수록 뒷선으로 물러날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죠?
───…….
뭐야.
예전에는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도 안 막을 생각이라며.
설마 나를 속인 거니?
───원래 책사의 역할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 아닌가요?
내가 살짝 당혹스러워하자 사마의는 마치 고소하다는 듯 웃음을 머금으며 그리 말할 뿐이었다.
───…히익.
───한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설마 너희도 알고 있었냐는 눈빛을 보내자 방통과 제갈량도 한통속이었다는 반응을 보이길래 어찌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그날 밤에는 괘씸하다는 뜻을 담아 잔뜩 혼내주긴 했으나 결국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까.
내가 슬그머니 물러나려는 순간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 사람들이 궁궐을 가득 채웠는데 뭘 어떻게 하겠나.
내 은퇴 계획은 도대체 어디로 갔지.
바보 군주는 다시 한번 꼬꼬마 책사들에게 속았습니다.
…원래 계획은 내가 물러남으로써 외척의 권한을 자연스럽게 줄이는 거였는데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나서서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겠네.
외척이 외척의 권한을 줄이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만약 반발하는 인물이 있더라도 내가 헛기침 좀 내뱉으면 조용해지겠지.
나는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살피는 호족에게 말했다.
“네 얼굴, 기억했으니 이제 물러나라.”
“…! 명에 따르겠습니다!”
내가 짐짓 긍정적인 기색을 드러내면서 말하자 그에 깜빡 속아 넘어간 모습.
출세를 위해서 권력자에게 얼굴도장을 찍는 게 목적인 놈이었으니 아마 모든 게 잘 풀렸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마초.”
“네! 마맹기, 여기 있습니다!”
나는 서량의 사정에 빠삭한 청은색 머리카락의 장수를 불러 물었다.
“저놈이 네가 말한 호족 맞아?”
“예! 그렇습니다!”
금강석(金剛石, 다이아몬드)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색깔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서량의 금마초라 불리는 여인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지방 호족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주(地主)라고 하던가요?”
“…….”
“아마 이 근처에서 가장 넓은 땅을 보유한 인물일 겁니다!”
마초는 자신이 어렸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칭기즈 칸이 찾아올 때까지 시간도 좀 있을 텐데 그동안 서량 정리나 좀 해볼까.
서량도 넓기는 더럽게 넓은 땅이니 언젠가 제대로 손봐야 하긴 했어.
흉노, 선비, 오환에게 묻혀서 그렇지 이곳도 강족과 저족이란 북방 유목 민족이 주로 활동하는 땅 아닌가.
황제 폐하도 계시겠다, 지방 호족의 기부 활동을 조금 더 쉽게 이끌어낼 수 있겠다 생각한 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