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63)
EP.663 예맥(濊貊)(3)
나는 꼬꼬마 군사들과 의논을 나누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정했으나 곧장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야 손뼉도 서로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아닌가.
고구려와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였다간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었으니 나는 그저 여유롭게 기다릴 뿐이었다.
사실 고구려가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할 확률은 100%에 가까우니까.
본래 역사의 부여는 무려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버젓이 적혀있을 만큼 전성기 땐 무척 강력한 나라였다.
근데 그게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3세기 후반 오호십육국 시절 선비족을 이끌던 모용외한테 탈탈 털리면서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게 문제일 뿐.
그 이후 맛집으로 소문이라도 난 건지 부여는 모용 시리즈가 이끄는 선비족들한테 줄창 얻어맞으면서 백성 수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곤혹을 제대로 치른다.
그래도 한때 강대국이었다는 건 사실인지 부여는 큰 피해를 보면서도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나갔으나….
어이쿠, 하필 저기 아래쪽에서 광개토 대왕이 나타나 버렸네?
그렇게 부여는 자신으로부터 독립한 후레자식(?)에게 꿀꺽 흡수당해버렸다.
그 당시에는 대왕(大王)이 아닌 태왕(太王)으로 불렀다 하지만 아무래도 현대인에게 가장 익숙한 칭호는 대왕일 테니까.
마치 세종대왕처럼 위대한 왕에게는 대충 대왕 칭호를 붙이나 보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
…사실 나도 그랬고 말이야.
어쨌든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부여가 그리 약한 국가는 아니라는 것.
오히려 전성기를 누리면서 고구려보다 국력이 2배는 앞서있으니 충분히 경계할 만한 나라였다.
고구려로서도 부여를 홀로 상대하기엔 부담스러울 테니 반드시 지원 요청을 하지 않을까.
심지어 이번에는 부여가 정말 고구려를 멸망시킬 기세로 쳐들어가고 있을 터.
부여로서도 고구려가 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간 상황이 정말 안 좋게 흘러갈 테니 매우 필사적으로 고구려를 쥐어패고 있을 것이다.
원래 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좋은 입지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가 부여였거든.
그게 공손도와의 혼인 동맹 때문에 틀어졌을 뿐이지, 그 이전까지는 부여와 한나라 둘 다 하하 호호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부여는 한나라와 교류하면서 때때로 나라 운영에 필요한 여러 물자를 지원받으니 좋다.
또 한나라는 부여가 읍루(挹婁)…. 그러니까 후대에는 말갈족과 여진족으로 불리는 유목 민족을 억제해주니 좋다.
즉 부여도 좋고 한나라도 좋은 상호 보완적 관계였는데 부여가 한나라의 역린을 건드리는 바람에 지금 이 지경이 된 것.
친구 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인데 그것보다 훨씬 냉철한 계산이 오가야 하는 동맹 관계에선 어떻겠나.
방통이 알려준 바로는 현 부여왕이 위구태왕(尉仇台王)이라던가.
그 사람이 처신을 제대로 잘못하긴 했다.
…혹시 공손도의 딸이 동맹 관계도 제쳐놓을 정도로 그렇게나 아름다웠나?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공손도의 딸이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 임금이 혹하여 나라가 기울어져도 모를 정도의 미인)이겠네.
이러한 뒷사정이 어찌 됐든 지금 내가 할 일은 고구려에게 전령을 보내면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대장군!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희 조국을 도와주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광경을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는 고구려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몸 곳곳에 묻어있는 흙먼지와 말라붙은 핏물.
마치 큰 전투를 치르고 겨우 살아남은 듯 해지고 닳은 갑옷까지.
난 대충 살펴봐도 이곳으로 오기 위해 수많은 역경을 헤쳐온 듯한 전령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로군.”
“…….”
“그대가 무엇을 요청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한 대답을 내일 들려주겠다.”
어차피 도와줄 생각이긴 했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바로 알려줬다간 감사하다면서 곧장 뛰쳐나갈 기세였기에 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보아하니 눈앞의 전령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몸의 한계도 잊고 너무 필사적으로 움직인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더 무리했다간….
뭐, 이 인물의 결말이 어찌 될진 뻔하지 않나.
나로서도 비극적인 결말은 원하지 않으니 하루 정도는 휴식 시간을 주는 것이 옳을 터.
그것이 비록 강제적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일단 쉬고 있도록.”
“하, 하오나….”
내가 담담하게 이야기하자 고구려의 전령은 다급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윽고 내 의도를 눈치챈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흠.”
꽉 막힌 인상과 다르게 의외로 눈치는 좋구나.
“…….”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고구려 전령 뒤에 슬그머니 숨어있는 자그마한 인영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황에서 고구려 전령 곁에 붙어있는 조그만 인물이라….
…이 사람, 단순한 전령인 줄 알았더니 고구려 버전 조운이었나 보네.
나로선 살짝 놀라울 따름이었다.
───────────
그날 있었던 일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급습─! 급습이다──!!’
어둠을 환히 밝히며 모든 걸 불태우던 거대한 불길.
흐릿한 형상으로 사방을 뿌옇게 만들던 매캐한 연기.
‘이 배신자들아!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등을 믿고 맡기던 동료를 저버리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과정일 뿐이거늘 무엇이 배신이란 말이더냐?’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지내던 이들이 서로 험한 말을 내뱉으며 무기를 휘둘렀다.
‘목표를 찾아라. 반드시 처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깥이 혼란스러운 사이, 흙투성이의 발로 자신의 아늑한 집에 침입한 이들이 있었다.
‘설마…! 이놈들, 여기는 통과하지 못한다──!!’
‘무, 무기! 무기를 들 줄 아는 사람들은 전부 모여!’
평소 자신을 곁에서 보살펴주던 사람들이 그들을 막고자 했다.
늘 말동무를 해주면서 아버님 몰래 간식을 챙겨주던 시녀 언니, 아무리 장난을 쳐도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 호위 아저씨, 자택 앞마당을 쓸면서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종 할아버지까지….
‘막아라!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야…! 커헉─!’
‘질기게 달라붙는군.’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전부 처리했나?’
‘예.’
언제나 자신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의 외침이 점차 잦아들고,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서늘한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읍…. 우으읍….’
그때 자신은 이불을 끌어안은 채 눈을 꼭 감고 가구 안에 숨어있었다.
늘 자신을 보살펴주던 언니가 이곳에서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단순히 숨바꼭질을 하는 것뿐이라고, 아버지가 자신을 부를 때까지 모르는 사람한테 걸리지 않으면 된다고….
‘…이곳에 없는 건가?’
‘이상하군. 달아날 수 있는 곳은 전부 봉쇄했는데….’
바로 코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에 자신은 몸을 벌벌 떨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절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야 소리를 내면 바깥에 있는 술래들한테 들킬 테니까.
언제나 자신을 보살펴줬던 언니의 말을 지키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뜻이지.’
‘……!’
‘전부 샅샅이 뒤져라. 분명 근처에 있다.’
하지만 몰래 숨어있을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여기 있었나.’
‘히끅!’
머지않아 술래들이 가구란 가구는 전부 뒤집어엎으며 숨어있던 자신을 찾아냈기에.
‘정말 어지간히도 꼭꼭 숨어있었군.’
‘아, 아아….’
‘시간이 너무 허비됐다. 죽어라.’
자신을 찾아낸 남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고….
콰지직!
‘……!’
‘감히 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이런, 상황이 꼬였…!’
갑작스럽게 등장한 아버지한테 목이 달아났다.
보호구 하나 걸치지 않은 가벼운 차림으로 창 한 자루를 휘두르며 나쁜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무시무시한 모습.
늘 자신이 토라진 표정을 지으면 어쩔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아버지라 믿어지지 않을 모습이었다.
‘아, 아쁘아…. 으애앵….’
‘그래. 아비는 여기 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을 단신으로 쓰러트린 아버지는 자신을 꼭 껴안은 채 열심히 달래주었다.
‘…미안하다, 내가 늦었구나.’
방 바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아버지께선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인 수행원들을 확인하곤 면목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군.’
그때 아버지 근처로 근엄한 인상을 지닌 장수 한 명이 다가왔다.
‘내통자들은 처리했나?’
‘명하신 대로 일부는 포획하고, 나머지는 베어 죽였습니다.’
아버지처럼 한바탕 날뛴 것이 분명한 그 인물은 급박한 상황임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를 확인한 아버지께선 곧장 말을 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부여군이 어느샌가 국내성 근처까지 진군했다더군.’
‘…….’
‘참으로 우습지 않나. 수도는 물론이고, 다른 성에서도 내통자가 이토록 많았다니 말이야.’
역시 귀족은 믿을 만한 것들이 아니라며 한 차례 욕을 내뱉은 아버지께선 근처에 있는 장수에게 이야기했다.
‘네게 부탁 한 가지만 하마.’
‘하명하시옵소서.’
‘내 아이를, 한나라로 데려다 줄 수 있겠나?’
자신이 눈을 크게 뜨며 어리둥절한 기색을 드러내자 아버지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미안하구나. 이 아비가 부족한 탓이다.’
‘으응….’
그러고 보니 시녀 언니가 언젠가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그때가 되면 자신도 공주님을 따라가겠다며 믿음직한 표정을 지었었는데….
‘괜찮아요.’
‘…….’
‘제가 가면, 전부 해결되는 거죠?’
‘…그래.’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자신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역시 내 딸이구나. 아주 믿음직해.’
‘후흥.’
봐라, 아버지께서도 무척 기뻐하시지 않나.
이미 자신은 성숙한 어른이었다!
‘정예병 몇 명을 붙여주겠으나 부여가 보낼 추격군과 비교하면 한 줌에 불과한 숫자겠지.’
‘…….’
아버지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장수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리 자네라고 한들 덧없이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임무일 터.’
‘…….’
‘그래도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아버지의 물음에 장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제 명(命)이 다하더라도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그때 그 눈빛에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분위기가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