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68)
EP.668 예맥(濊貊)(8)
원소 본초(袁紹 本初).
뒤쪽으로 길게 땋아내린 황금색 머리카락과 주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신비한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는 빼어난 눈치와 타고난 퍼포먼스로 일개 얼자 출신에서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었다.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음에도 그리 서러운 취급을 받았는데, 하물며 얼자로 태어난 원소는 어떻겠는가.
사실 나는 이 세계에서 처음 원소의 어머니를 마주했을 때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있었다.
보통 얼자라 하면 귀족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나온 아이를 일컫는 말인데, 원소의 어머니는 척 봐도 고귀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금발 금안을 지니고 있었거든.
이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이 세계가 수상할 정도로 남녀가 평등하다는 걸 떠올리고 설마설마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귀족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가 아니라….
노비 아버지와 귀족 어머니라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졌지만 현실은 늘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법.
전생만 하더라도 세계 군사력 2위의 국가가 20위 언저리의 국가에게 쩔쩔매던 사건이 있던 만큼 난 고정 관념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확실히 말이 안 되긴 해.
소설이나 만화 이야기로 적어도 욕먹을 전개가 현실에서 일어나다니….
이런 사건도 있는 만큼 원소의 부모도 운명처럼 눈이 맞아 이어졌다고 하면 이상할 것도 없겠지.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나가며 알아서 수긍해갔으나 이 눈물겨운 노력도 곧 수포로 돌아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노비 출신인 원소의 어머니가 금발을 타고났을 뿐이라는 소식을 들었거든.
금발을 타고난 것과 뛰어난 외모를 지닌 것 때문에 가주의 눈이 든 것이라 했고.
…확실히 그게 더 단순하긴 하지만 그러면 내가 고정 관념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쨌든 이런 뒷사정을 젖혀두더라도, 현재 원소의 어머니는 원래 운명과 달리 꽤 호화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다.
본래 역사에선 원소를 맹주로 한 반동탁 연합이 결성된 이후 낙양에 남아있던 원씨 가문 구성원은 동탁한테 전부 살해당했거든.
여기에는 당연히 원소의 친모도 포함되어 있었지.
이에 원소는 주변 군웅들에게 동정표까지 얻으면서 명분과 권위를 더욱 얻을 수 있었으니 동탁의 보복은 딱히 극적인 효과를 불러오지 못했다.
사실 이 세계에서도 원술이 반정릉 연합을 결성하며 비슷한 사건을 일으키려고 했다.
자기도 나름 명문가 출신이라는 건지, 원술이 다른 건 몰라도 남을 이간질하거나 헐뜯는 등 음습한 쪽으론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
난세에서 제일 중요한 능력이 꽝이라서 그렇지.
뒷공작을 잘하면 뭐하냐, 전투에서 이기질 못하는데.
…이렇게 설명하니 더 비호감이네.
어쨌든 원술은 눈엣가시인 원소를 동요하게 만들고 겸사겸사 명분까지 챙기려는 의도였을 거다.
자기 친부와 친모는 이미 이승을 떠났기에 낙양에 남은 원씨 일가 정도는 내줄 수 있단 판단이었을 터.
하지만 내가 동탁처럼 충동적인 결정으로 미래를 그르칠 인물이 아니지.
그렇기에 난 과거 원씨 가문이 우리한테 물자를 보급해줬던 것을 이유로 들면서 딱히 해를 가하지 않고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냈다.
아마 내 이런 행동이 원소한테 호감을 사고, 그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금 이 상황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제아무리 원소가 권력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성격이라도 가문에게 핍박받던 어린 시절 자신을 감싸주던 유일한 아군이 바로 어머니였을 테니….
어쩌면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며 등을 떠밀어주었기에 본래 역사의 원소가 반동탁 연합 맹주에 올랐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정정하신가?”
“…예, 대장군께서 선물해주신 여러 약재 덕분입니다.”
원소는 내 물음에 평소와 똑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맛이 너무 쓰다 말씀하시면서도 성의를 무시할 수 없다며 어떻게든 섭취하셨지요.”
“…….”
꽤 솔직하게 알려주는구나.
설명만 들어보면 내 어머니하고 별반 차이 없으시네.
이야기를 꺼내기 전 원소의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높여 불러야 할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내 직책이 너무 높아서 말이야.
관직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 과하게 예를 차리면 오히려 예의에 어긋나고, 상대도 부담스러워하니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수직적인 관계가 이래서 어렵다니까.
내 머릿속에 있는 유교의 혼이 둘로 나뉜 기분이야.
‘이놈!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을 존중하며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어허! 그대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란 단어도 모르는가!’
…진짜 나누어졌나?
‘군주와 부모의 은혜는 같은 것이기에, 오히려 너무 공손하게 행동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임을 그대는 깨닫지 못했는가!’
‘으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반박할 수 없다.’
잠시 말다툼을 하던 미니어처 선비 두 명이 이윽고 극적인 타협을 보는 광경이 떠오른 나는 서둘러 잡생각을 털어냈다.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씌인 줄 알겠네.
“혹시나 싶어서 묻는 것이다만, 그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나?”
어차피 연이은 강행군으로 병사가 지친 상태였기에 당분간 휴식을 취해야 하는 상황.
나는 잠시 시간이나 때울 겸 원소가 최근 기주와 유주를 포함한 하북 일대를 어찌 다스렸는지 물어보았다.
“예상보다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음?”
그리고 들려온 것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
내가 별다른 사고 없이 적당히 잘 다스렸다는 대답을 예상한 것과 다르게 원소는 살짝 음울한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본래 예상대로라면 반년 이내에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낙양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만….”
“…….”
“허유가 계속 무시할 수 없는 소식을 가져오더군요.”
허유라면 그놈…. 아니, 그년이잖아.
원소와 친분이 있는 걸 믿고 이리저리 까불어대며 비리까지 저지르던 것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한 차례 경고한 적이 있던 인물.
───괜히 허튼짓을 했다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는 당시 비열한 인상을 지닌 여인이 절을 올리면서 벌벌 떨던 광경을 아직도 기억했다.
원래였다면 다른 탐관오리와 엮어 모가지를 뎅겅 날려버렸겠지만 잘 써먹으면 쓸모가 있겠다 싶어 잠깐 유예 기간을 줬지.
제 몸을 챙기기 급급한 기회주의자라면 살아남기 위해 자기 동료를 팔아먹고도 남을 테니까.
그리고 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허유는 내가 살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도 일당이 수상한 짓을 벌인다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관리와 뒷거래를 나눈 다음 길거리의 백성에게 행패를 부리던 상인, 나랏일에 쓰여야만 하는 세금을 일부 착복하고 장부를 조작하던 관리….”
“…….”
“이런 놈들을 잡아들이고, 또 잡아들여도 하북이 워낙 넓은 탓인지 어디선가 계속 나타나더군요.”
확실히 탐관오리가 모기 같은 놈들이긴 해.
대체 어디서 기어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 한두 마리씩 천장이나 벽면에 붙어있다니까?
그리고 잠시 방심하는 사이 왜애앵 날아와 피를 쪽쪽 빠는 거지.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지 않나.
심지어 배 곯지 말라고 녹봉까지 올려줬음에도 이러는 거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은 뭐 나쁜 짓 할 줄 몰라서 그렇게 살아가는 줄 아냐.
이제 과거 제도도 본격적으로 시행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제 가문의 뒷배경 하나로 관직에 오르는 놈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훗날 음서(蔭敍) 제도 같은 게 나타나면 상황이 이상해지겠지만.
왜, 그거 있잖아.
관직이 높은 인물의 후손들에게도 관직을 합법적으로 내려주는 제도.
듣기만 해도 문벌 귀족 같은 게 튀어나와서 나라를 말아먹을 것 같지 않나.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 말이야.
근데 이 이상한 제도가 나올 때면 나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갔을 테니 하늘나라에서 혀나 쯧쯧 차는 수준에서 끝날 거다.
“덕분에 원래 계획과 달리 대장군과 재회하는 때가….”
“…….”
“때가….”
“……?”
뭐야, 왜 갑자기 말을 끊어.
빠드득.
내게 계속 말을 잇던 원소는 불현듯 이야기를 끊더니 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를 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일단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
“원소?”
“…실례했습니다. 감정이 조금 격해졌군요.”
조금 맞아?
다행스럽게도 원소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냉정을 되찾았지만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모양새였다.
황제 폐하와 조조도 그러더니, 원소도 나와 오랫동안 떨어지니까 기분이 무척 안 좋아지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억제기가 맞는 것 같아.
근데 원소가 폭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방금 안량과 문추가 겁먹은 표정으로 원소와 슬금슬금 거리를 벌린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건 확실한데….
나는 하북의 대표적인 맹장 두 명을 기세만으로 압도한 금발의 여인을 바라보면서 얼떨떨한 기색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