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74)
EP.674 예맥(濊貊)(14)
상당히 갑작스럽고 얼떨떨한 상황이긴 했으나, 이민족의 부여 습격을 눈치껏 알뜰하게 이용해먹은 산상왕은 이윽고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푸슉!
“내가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지다니…!”
“후우….”
국내성을 포위하던 4개의 요새 지휘관 중 한 명을 쓰러트린 것.
확실히 북군(北軍)을 지휘하던 장군답게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나 산상왕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산상왕은 이에 대해 순수히 기뻐할 수 없었다.
비록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이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만약 자신과 개마무사뿐이었다면 요새를 지휘하는 장군을 마주치기도 전에 힘이 부쳐 국내성으로 달아났을 터.
실제로 부여군은 야습을 예상했다는 듯 진영 깊숙한 곳 군데군데 말뚝을 박아넣고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곳에 철질려(鐵蒺藜, 마름쇠)를 뿌려놓았다.
만약 자신이 안일하게 생각하고 조심성 없이 돌진했다면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까.
그건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50여 합에 이르는 치열한 접전 끝에 쓰러트린 요새 지휘관을 산상왕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무렵 근처가 살짝 소란스러워졌다.
“…으음?”
이에 의문을 느낀 산상왕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북방의 혹독한 추위를 막아내기 위한 두꺼운 의상과 털모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말 안장이나 본인의 몸 위에 매달아 놓은 곡궁과 화살통까지.
“이런, 우리가 늦은 건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을 약탈하며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세력과 사사건건 부딪쳐왔던 선비족 군대였다.
“…하하하! 아무래도 근처 장수를 전부 도발한 것이 좋은 생각은 아니었나 보군요!”
“…….”
“아무렴, 장수 몇 명의 모가지보단 그들을 지휘하는 대장의 머리통이 훨씬 값어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색함 같은 건 일절 느끼지 않는 목소리로 유쾌하게 중얼거린 선비족 장군.
하지만 그런 친근한 태도와 다르게 피로 근육질 몸 전체를 빨갛게 칠해놓은 모습은 평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맹수도 때려잡을 것 같은 덩치와 외모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
…아무리 너그럽게 평가해도 맨손으로 사람 수십 명은 때려눕힐 얼굴이었다.
“…크흠.”
산상왕은 공손한 말투까지 써가면서 고구려를 적대하지 않는 선비족 장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점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나?”
“기꺼이! 저희는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전우 아닙니까! 으하하!”
이 기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은 무엇이지.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외모를 지닌 장수가 거리를 훅훅 좁혀오니 뛰어난 용력을 자랑하는 산상왕조차 순간 흠칫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모습에 고연우의 생각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대들의 지원은 감사하다만, 어째서 우리를 도와준 건가?”
“으으음?”
산상왕 앞에 선 선비족 장수가 정말 의외의 질문을 들었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던 선비족 장수는 모든 상황 판단을 끝마친 듯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 모르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저희 몽골 제국과 한나라는 불과 며칠 전에 영원히 끊어지질 않을 동맹을 맺기로 맹세했습니다!”
한두 달 전에 있었던 일을 며칠 전 있었던 일로 표현한 건 살짝 문제가 있었지만 선비족 장수는 그렇게 사소한 걸 하나하나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대한 두 제국이 한 핏줄로 이어진 것!
자신은 그때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푸른 늑대 보르테 치노를 직접 확인하고 무척 감동했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늠름한 자태가 새록새록 떠오르거늘 문제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선비족은 푸른 늑대(보르테 치노)가 들었다면 제 부인인 흰 사슴(코아이 마랄) 뒤로 슬그머니 모습을 감출 법한 생각을 이어나갔다.
“…….”
고연우는 선비족의 설명을 듣고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선비족이 이야기했던 대로 고구려가 두 국가의 동맹 사실을 몰랐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한 국가의 왕으로서 다른 국가의 동향을 살피는 건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최근 부여의 견제가 극심해지고 귀족들이 연이어 문제를 일으키는 등 내부가 매우 혼란스러워 차마 그럴 여력이 나지 않았다.
“…즉, 친우의 친우를 도우러 왔다는 뜻이군.”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겠지요!”
선비족 장수가 유쾌하게 웃자 고연우도 그를 바라보면서 쓰게 웃어 보였다.
…분명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전쟁을 치르던 두 국가가 어찌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일까.
혹시 이것도 한나라의 대장군이 의도한 것인가?
“…….”
고연우는 지금까지 고구려의 왕으로 살아오며 참 많은 결정을 내렸지만 지금처럼 크게 안도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만약 대장군과 마주했던 그때 옳은 선택을 내리지 못했으면 자신은, 고구려는 어찌 됐을까.
잠시 상상만 해도 온갖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능력도 뛰어나고 준비성도 철저했던 요새 지휘관이 지금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하나뿐.
그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본인이 들으면 불합리하다며 억울해하겠지만 어쩌겠나.
설마 이민족까지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뛰어난 인물이 한나라에서 태어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산상왕은 잠시 차가운 땅바닥에 몸을 뉘인 요새 지휘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신이 없어 미처 묻지 못했군.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하하! 제 이름 말입니까!”
마치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덩치를 지닌 선비족 장수는 제 가슴을 힘차게 두드리며 외쳤다.
“모용외(慕容廆)! 모용외라고 불러주십시오!”
“…….”
“이런 말씀을 대놓고 드리기엔 조금 그렇지만, 대칸께 제 활약을 잘 이야기해주시길 바랍니다!”
본래 역사에선 오호십육국 때 활약하며 부여의 수도를 함락하고 부여 왕의 목숨까지 거둬간 인물.
심지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고구려의 수도를 위협하며 봉상왕의 목숨조차 위협했던 뛰어난 장군.
고구려의 명장, 고노자(高奴子)가 없었다면 고구려도 부여처럼 멸망의 길로 이끌었을 선비족의 영웅이 몽골 제국 휘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도 열심히 국내성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누군가가 듣는다면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며 화들짝 놀랐을 인물은 활기차게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군(軍)에 들었을 때부터 만호장(萬戶長)이 되는 것이 목표였으니 말입니다!”
“…만호장?”
대충 만 명의 병사를 이끄는 직책인가?
산상왕이 직책 이름만 듣고 역할을 어느 정도 예상하자 모용외가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천호장(千戶長)이니, 앞으로 한 걸음만 남은 셈이지요!”
“…….”
“어쩌면 대칸께 멋들어진 칭호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외에도 인생의 목표는 크게 잡아야 한다는 둥, 자신의 미래 계획은 어떻다는 둥 모용외가 끊임없이 말을 잇자 고연우는 다른 건 몰라도 눈앞의 인물이 수다스럽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주변에 두면 지루하진 않겠다만….
다른 의미로 피곤해질 성격이군.
이대로 가다간 부여군의 창칼이 아닌 이민족의 입담에 쓰러지게 생겼으니 고연우는 서둘러 모용외를 조용히 시킬 수 있는 만호장(萬戶長)을 찾았다.
그리고 산상왕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을 것일까.
“…지금 귀한 분을 붙잡고 뭐 하는 것이냐?”
“헙.”
상당히 몸집이 커다란 모용외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덩치를 지닌 험악한 인상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한술 더 뜨는 외모가 있었군.
육아할 때 고생 좀 많이 할 관상이야.
고연우는 커다란 남성을 마주하자마자 어린아이는 눈만 마주쳐도 울음을 터트릴 외모라며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아마 본인이 들으면 꽤 상처받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대칸께서 오고 계시니 서둘러 네 자리로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단 두 마디로 모용외를 돌려보낸 남성은 본인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길을 비켜주었고,
“…….”
한 여인이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붉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걸어왔다.
여인은 걸어오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는 과연 어디서 나는 것일까.
───히힝.
말발굽 소리는 아직 생후 반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금색 털을 지닌 망아지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은 모르겠으나 그 망아지를 엄청나게 아끼는 모양새.
“네가, 고연우?”
“…그렇다.”
고연우는 불길한 분위기를 흩뿌리는 핏빛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 눈앞의 여인이 이민족을 이끄는 우두머리일 터.
말투가 상당히 특이하긴 했지만 이를 대놓고 언급할 정도로 산상왕은 눈치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으음….”
고연우의 대답을 들은 여인은 고개를 까딱이며 잠시 고민하더니,
“데려와.”
“예.”
근처에서 대기하던 덩치 큰 장수에게 무언가를 명령했다.
쿵!
이에 고연우는 의문을 드러냈으나 곧 호랑이도 때려눕힐 것 같은 남성이 짐짝처럼 내려놓은 인물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죽을 것이다!
그야 이놈처럼 재수 없는 낯짝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금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한테 항복하라고 외치던 인물이었다.
“근처 언덕에서 엿보고 있는 거, 때려눕히고 가져왔어.”
“…….”
“잘 얘기해줘야 해.”
누구한테 뭘 어떻게 이야기해주라는 뜻일까.
심지어 이것과 비슷한 부탁을 조금 전 모용외한테 들은 것 같은데….
‘유목 민족은 모두 성격이 특이한 건가.’
고연우는 잠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