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682)
EP.682 예맥(濊貊)(22)
부여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우리는 준비를 철저히 하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국력 차이가 워낙 압도적이라 아무런 생각 없이 돌격만 지시해도 이기긴 할 거다.
병사 숫자에서 워낙 차이 나고, 만인지적의 장수까지 여러 명 포진해있으니까.
하지만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한다잖아.
나라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만약 부여군이 정말 필사의 각오로 항전하면 의외로 피해가 커질 수 있었다.
본래 역사에서도 ‘와, 겨우 이 정도 숫자로 몇 달 넘게 버티네.’ 싶은 공성전이 있지 않나.
괜히 사람들이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에 성벽을 쌓고 버티는 게 아니란 말이지.
“성을 완전히 포위하진 마세요.”
“응?”
주변 지형을 둘러보며 때를 기다리던 나는 사마의의 의견에 고개를 돌렸다.
성을 완전히 포위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휴우…. 생각해보세요.”
보랏빛 머리카락의 군사는 내 의문스러운 태도를 확인하고 이것도 알려줘야 하느냐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저번에 사원(士元, 방통의 자)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부여는 왕의 권력이 약한 연맹 국가잖아요.”
“…그래서?”
“도망칠 곳이 없으면 기회만 살피던 귀족들조차 죽기 살기로 싸울 테니, 오히려 포위를 살짝 느슨하게 하자는 거죠.”
아하.
그러니까 적이 배수진(背水陣)을 치지 못하게 하잔 뜻이군.
한고조 유방이 서초패왕 항적에게 처음으로 승리를 거둘 때도 지금 사마의가 말했던 전법을 사용했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며 병사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일부러 그들이 도망칠 수 있게 활로를 열어줌으로써 초나라 병사 대부분이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에서 이탈했지.
결국 항적 곁에 남은 병사는 불과 수백 명 남짓.
그 와중에 항적은 수백 명으로 수십만 대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는 괴물 같은 무력을 선보였지만….
초나라 병사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 마음이 꺾여버렸거든.
그렇게 서초패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는 부하의 의견을 듣지 않고 한군에게 돌진, 홀로 수백 명의 기병을 학살한 다음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진짜 항적이 무서운 놈이긴 했네.
어떻게 말도 안 탄 상태에서 홀로 정예 기병을 수백 명씩 썰어버릴 수 있는 거지?
항적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부분을 노리는 게 아니었다면 답이 없었겠구나.
“…….”
지금 내 곁에 있는 서여조차 나한테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문제가 있지.
이것도 어떻게 보면 본래 역사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하는 걸까?
비록 방향성은 다르지만, 이것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
뭐…. 본래 역사의 항적도 자신을 키워준 숙부의 명령은 조용히 잘 들어줬으니까.
그 당시 항적은 훗날 숙명의 라이벌인 유방하고도 사이좋게 지냈다고 하지.
단지 항적의 숙부, 항량이 잠시 방심했다가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에게 전사했을 때부터 틀어졌을 뿐.
인간 병기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이 없으니 항적이 미친 듯이 폭주한 거지.
…이 세계에서는 항량이 항적의 역할을 대신했으니 방심 따위 하지 않고 장한을 박살 냈겠지만.
아마 장한도 인간을 초월한 놈이 있다며 많이 당혹스러워했을 거야.
살짝 궁금하긴 해.
이 세계에서 서초패왕의 자리를 차지한 항량과 지금 내 곁에 있는 서여가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이미 무덤에 있는 사람을 되살릴 순 없는 노릇이니 끝내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포위망은 살짝 느슨하게 형성하자고.”
“잘 생각하셨어요.”
나는 오늘도 근처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서여를 바라보다가 사마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물론 귀족과 병사의 숫자를 줄이려다가 왕까지 놓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긴 했다.
정말 필사의 각오로 돌진해서 운이 좋게 포위망을 탈출할 수도 있었으니까.
“…….”
근데 그러면 쫓아가서 붙잡으면 되는 일이지.
이미 이 주변은 마초가 휩쓸며 정찰하는 상황이고, 장료의 정예 기마대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언제든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여기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도 있잖아.
몽골 기병이 이 악물고 쫓아가면 자기가 뭐 얼마나 달아날 수 있는데?
본래 역사에서 몽골 제국을 도발했다가 대패한 호라즘 왕국의 술탄 무함마드 2세.
그는 통치자로서 딱히 부족한 능력이 없는 군주였는데,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몽골 제국과 두근두근 추격전을 몇 달 동안이나 벌이다가 외딴 섬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잘못된 판단 한 번으로 나라가 순식간에 몰락하다니….
지금 부여성에 갇힌 위구태왕과 상황이 비슷하네.
딱 한 번, 칭기즈 칸을 얕본 것이 문제가 되어 영혼까지 탈탈 털린 호라즘 왕국.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며 공손도의 정략 결혼 요청을 받아들이고 서로 동맹까지 맺은 부여.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그냥 자연재해가 따로 없구나.
어쩌면 이 세계의 부여는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뉘기도 전에 그냥 폭삭 멸망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국내성 전투 때도 부여군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쫓아가 전부 죽이거나 포로로 붙잡았다던데….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악착같이 달라붙는 점은 참 지독해.
그러니까 전쟁을 잘하는 거겠지.
“…음?”
슬슬 포위망 형성이 완성되고 공성 병기의 조립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인물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족?”
사람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참으로 알록달록한 세상에서 참으로 눈에 띄는 흑발 흑안.
한나라 황족 사이에서만 발견된다는 흔치 않은 색깔이 이민족 군영 내부에서 발견되자 나는 관심을 드러냈다.
“테무진.”
“…응.”
“저 장수는 누구지?”
“……?”
내가 슬쩍 턱짓하면서 묻자 칭기즈 칸은 고개를 돌려 흑발 흑안의 이민족을 바라보았다.
“으응…. 누구였지?”
“…….”
너도 설마 장수가 너무 많아서 이름을 전부 못 외우고 다니는 거니?
여기서 동질감이 느껴질 줄이야.
“…아.”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칭기즈 칸은 내 예상을 깨고 내가 가리킨 장수의 이름을 떠올렸다.
“유연(劉淵). 유연이야.”
“…….”
“생김새와 이름이 상당히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어.”
…유연(劉淵)?
설마 내가 아는 그 유연이 맞나?
중원에 이민족 국가를 세우면서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을 알린 흉노의 창업 군주.
저 한나라 황족 특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을 보면 맞는 것 같은데.
한고조를 물리친 흉노 선우 묵돌과 한나라가 조공품과 함께 보낸 황족 공주 사이에서 쭉 이어져 내려오는 족보.
그에 대한 영향인지 이민족치고 수상할 정도로 한(漢)나라를 좋아하는 흉노족 출신 영웅이 바로 유연(劉淵)이었다.
나중에 후손이 흉노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국호를 조(趙)로 바꾼 것일 뿐, 유연이 나라를 막 세웠을 당시의 국호가 한(漢)이었던 걸 떠올리면 정말 진심으로 좋아한 거지.
한나라는 도대체 몇 번이나 되살아나는 걸까.
왕망에게 제위를 찬탈당하며 전한(前漢)이 멸망한 이후 광무제가 이번에는 다르다면서 후한을 건국하고, 조비에게 황위를 선양하며 후한(後漢)이 멸망하자 유비가 이번에는 진짜 다르다면서 촉한을 건국하고, 등산왕의 활약으로 촉한(蜀漢)이 어이없이 멸망하자 유연이 이번에는 정말 진짜로 다르다면서 조한(趙漢)을 건국하고….
이것 외에도 성한(成漢)이나 북한(北漢) 등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이름이 한(漢)이었으니 참으로 골때렸다.
사골도 이렇게 우리면 뼛가루조차 안 나오겠네.
나라의 정통성이란 게 참 대단하긴 해.
본래 역사의 유연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떠올린 나는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겼다.
과연 이 세계의 유연도 수상할 정도로 한나라를 좋아할까?
훗날 등장해야 하는 인물이 지금 나타난 건 이제 놀랍지도 않으니 넘어가자.
…사실 살짝 놀라긴 했는데, 처음 느껴졌던 그 충격만큼은 아니야.
사람은 역시 적응의 생물이라니까.
내가 유연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걸 눈치챈 걸까.
테무진은 평소와 똑같이 속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불러올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
어라. 눈 마주쳤네.
곧 전투도 코앞이었으니 개인적인 궁금증 해결은 뒤로 미뤄둘 생각이었는데, 내가 테무진의 질문에 대답하려는 순간 유연과 내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반짝반짝.
뭔데.
왜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거야.
마치 동경하던 아이돌을 실물로 처음 마주한 소녀 팬 같은 반응이로구나.
나 저 눈빛 어렸을 때 애니메이션에서 본 기억이 있어.
───초롱초롱.
나는 흡사 별빛이라도 쏘아 보낼 기세로 적극적인 눈빛을 보내는 유연의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 수상하디 수상한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그 유연이 확실한 거 같아.
몽골 제국이 이민족 출신 영웅들을 죄다 흡수한 상황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오호십육국은 안 일어나겠네.
역시 테무진을 아군으로 만드는 건 잘한 선택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