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703)
EP.703 삼한(三韓)(15)
하남위례성의 남문을 지키던 백제국 지휘관이 모습을 감춘 이후, 나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본격적인 공성전을 시작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멀리서 화살이나 돌을 날려대면서 천천히 병사를 갉아먹는 것에만 집중했거든.
그야 성벽을 오르는 순간 필사적으로 항전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는데 어떻게 감히 움직이겠어?
내가 숱한 전장을 거쳐오며 느낀 점이 있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은 아무리 숫자가 적어도 무시할 요소가 아니란 사실이었다.
특히 절박한 상황에 부닥칠수록 이상한 버프라도 받는 건지 전투력이 급상승하더라고.
물론 평범한 병사가 각성한다고 해서 홀로 수십 명을 썰어 재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길동무로 꼭 한두 명씩 끌고 가는 걸 봤을 때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
왜, 현대에서도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부닥쳤을 때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기사가 종종 나오잖아.
소중한 사람이 차에 깔리자 차를 번쩍 들어 올려 구해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며, 등산가가 수백 킬로그램의 바위를 던져버렸다는 사례도 존재하지.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되긴 하지만….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에게 거리낄 것이 뭐가 있겠나.
물론 저런 상황을 일으키고 싶다 해서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건 나도 안다.
만약 제 의지대로 조절하는 게 가능했으면 모든 사람이 주인공처럼 각성해 세상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었겠지.
하지만 사람이 창칼에 찔리는 게 극한 상황이 아니라면 무엇이 극한 상황일까.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한 명이라도 이상한 인물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 나는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했다.
심지어 이 세계는 온갖 괴력난신이 실존하잖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하여튼 내 신중한 행동이 빛을 발한 것일까.
수많은 요소가 겹쳐 정말 완벽하다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수세에 몰린 백제국은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기다리기만 하다가 곯아떨어질 뻔했네!
───도대체 어느새…?!
서로 견제 사격을 퍼부을 동안 내 근처에서 손가락만 빨던 장비는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일 먼저 성으로 달려 나가 벽을 올랐다.
───여기 연인(燕人) 장익덕(張益德)이 있다!
그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성벽을 순식간에 오른 장비는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적을 너덧 명씩 쓰러트렸는데, 이를 마주한 백제국 병사들은 기가 죽지 않은 표정으로 외쳤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라!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충정이다!
───좋아! 전부 덤벼──!!
나라를 향한 마지막 충정이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여기서 뼈를 묻을 작정이군.
───그 결의. 훌륭하다.
───…….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적어도 고통 없는 최후를 안겨주지.
장비를 뒤따라 올라온 관우는 백제국 병사의 충성심에 묘한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
참 저런 면모도 관우답다고 해야 할까.
삼국지에서 의리와 충성심이 뛰어난 장수를 꼽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다웠다.
홀로 만 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장수가 두 명이나 성벽에 올라갔는데 백제국이 뭘 어쩌겠는가.
하남위례성을 지키는 병사가 수만 명씩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국 병사들만 쓰러져 나갔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네.”
성벽 위의 상황을 살펴보던 여포는 활시위를 당기던 손을 털어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드물게 전장에 나서지 않는 여포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내 칭찬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들어 적병의 목을 수확하던 여인이 웬일일까.
내 의문을 눈치챈 여포는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우리 낭군님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
“…….”
“최근 정릉을 덮친 이상한 범들도 그렇고, 한눈파는 순간 고꾸라질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언제 죽을지 조마조마해서 근처를 벗어나지 않겠단 뜻이었다.
음….
확실히 호랑이 무리가 나를 덮친 것은 매우 인상 깊었지.
잠시 분위기 전환 좀 할 겸 군영 바깥으로 나왔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덮친 호랑이 무리.
호랑이가 수십 마리씩 있는 광경은 확실히 장관이었으나 그것들이 날 노리는 상황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근처에 호위병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무서운 놈들은 몸에 창칼이 꽂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더라고.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말이야.
이름을 날린 명장들은 혼자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둥 곰을 잡았다는 둥 인간 병기의 면모를 보이긴 해.
지금 내 주변을 호위하는 조운만 하더라도 호랑이 몇 마리는 거뜬히 잡아내겠지.
하지만 나는 지극히 평범한 남성이었으니 호랑이와 홀로 맞붙는 순간 사람(이었던 것)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서여가 초천검과 초진창을 휘두르며 호랑이의 접근을 불허하고, 그 사이 여포가 호랑이들에게 달려들어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찌저찌 습격은 잘 막아냈으나 날 호위하는 병사의 규모가 늘어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
이제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금군보다 대장군을 호위하는 병사가 훨씬 많아진 것 같은데….
누군가 이를 문제 삼으면 반론하기 어려워질 텐데 주변 사람들의 뜻은 완고했다.
───대장군께서도 황실의 일원이시니, 대장군을 호위하는 병사가 곧 금군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신산귀모라 일컬어지는 제갈량마저 논리가 살짝 이상한 궤변을 펼치며 내 호위병 규모를 적극적으로 확대했다.
하긴, 주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온 천하가 날 죽이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일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닐 터.
평소 초식을 하는 메뚜기가 날 잡아먹으려 했고, 난데없이 호랑이 무리가 나타나 날 잡아먹으려 했다.
이제 하늘에서 번개만 떨어지면 완벽하겠네.
남화노선의 언급에 따르면 하늘(天)이 날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이상한 신념을 품은 도사들이 날 죽이려 하는 거라지만….
이걸 그대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러다가 괴력난신 타파를 외치며 대대적인 종교 탄압이 이루어지면 어쩌려고.
물론 정치와 종교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야 하나 종교 전체를 적대시하며 탄압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솔직히 종교의 부정적인 면모가 워낙 극명해서 그렇지, 긍정적인 면모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본래 역사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증명했던 것처럼 교리부터가 이상한 막 나가는 종교가 아닌 이상 종교 탄압에 성공한 경우는 없었을 터.
지금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주변 모든 것이 미지로 둘러싸인 시대에는 더욱 힘들겠지.
안 그래도 대운하 건설이다 강동 개발이다 하면서 행정력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나는 괜히 이상한 상황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솔직히 종교 문제는 동양보다 서양이 더하잖아.
지금은 유대교나 기독교밖에 없겠지만, 훗날 이슬람교가 출현해 삼파전을 벌이며 아주 개판을 만들어 놓겠지.
내가 뭐 서양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도 아닌데 종교 문제는 그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다.
난 동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보는 것만 해도 바빠.
물론 동양의 삼교(三敎)라 일컬어지는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해선 슬쩍 고개를 내밀어야겠지만….
종교 철학은 나도 잘 몰라서 함부로 손대기 꺼려지는 것도 사실.
내가 손대는 건 기껏해야 효(孝) 문화와 관련된 것일 터.
그놈의 삼년상 때문에 몸을 망치는 경우가 여럿 존재했으니 이것과 관련해서만 살짝 손을 댈 계획이다.
원래 이 시기에도 삼년상이란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하는 제사 방식이긴 했다.
공자만 하더라도 자기 제자에게 쓴소리를 내뱉을지언정 삼년상을 강제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일단 삼년상을 하게 된 이상, 고기도 먹지 말고 몸이 안 좋아졌을 때 약도 먹지 말아야 하는 등 너무 엄격한 면모가 존재했지.
이 엄격한 규칙 때문에 삼년상을 치르다가 줄초상을 치르는 경우도 존재했으니 삼년상 자체를 없애진 못하더라도 규칙은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나라에선 내 권위가 무척 막강하다.
인재를 뽑는 과거 시험에 이과나 의과의 비율을 높이는 등 여러 과목을 끼워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이제 외치(外治)는 정말 끝난 것 같으니 내치(內治)에 힘을 쏟으며 미래를 대비할 때.
───콰앙!
나는 성문에 붙은 충차가 굉음을 내며 하남위례성을 강제로 뚫어버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조금 전 병사들에게 내린 명령처럼, 마한의 맹주였던 백제국은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할 것 같았다.
…이제 테무진에게 사로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만 오면 되는데 말이야.
최대한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건 내 직감인데, 슬슬 황제 폐하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할 시기니까.
지금 낙양의 분위기가 어떨지 나는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