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706)
EP.706 삼한(三韓)(18)
하남위례성의 병사들은 성벽이 뚫린 이후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적군과 비교했을 때 머릿수가 무척 부족했던 백제국 병사들은 줄줄이 무너져 내렸다.
“이리 허무하게 막히다니…!”
“뭐, 죽은 척하면 모를 줄 알았어?”
심지어 죽은 척까지 하면서 날 죽이려는 조상님들도 있더라고.
내 근처에 초인적인 육감을 지닌 서여와 여포가 존재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큭!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마음은 없다! 죽…!”
서걱!
물론 자신의 기습이 실패한 것에 굴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지만….
말을 제대로 끝마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지.
“빈틈투성이잖아.”
적토마 위에 기승한 여포는 아무렇지 않게 백제국 병사의 목을 베어버린 다음 콧방귀를 뀌었다.
방천화극에 묻은 피를 한 차례 털어낸 여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곳.”
하남위례성에 발을 내디딘 나는 크고 넓은 길을 따라 움직이면서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가 가장 넓은 길이니, 이쪽을 쭉 따라 걸으면 성이 나오지 않겠어?”
“그러면 왕도 거기 있겠네!”
“글쎄.”
여포가 눈치챘다는 표정으로 활기차게 이야기하자 난 피식 웃었다.
확실히 저번 부여성 전투 때는 부여를 다스리던 왕이 성에 남아있었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성에서 얌전히 자결한 것이었지만.
“응? 글쎄라니?”
“사람이 지닌 성격은 전부 다르잖아.”
최근 위구태왕이 그랬던 것처럼 성에 남아 자결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끝까지 충신과 함께 항전하며 적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후일을 도모한다면 어떨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서 언젠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때를 노린다면?
그럴 경우 이들이 보일 행동은 한 가지뿐일 터.
“주군, 조금 전 서문 방향으로 선박 몇 개가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래?”
나는 한강으로 둘러싸인 서문에서 선박 몇 개가 빠져나갔다는 보고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책과 주유가 이끄는 수군이 하남위례성을 기습한 방향은 북쪽이다.
보병이 성문을 박살 내버린 방향은 남쪽이고.
즉 우리 군대가 존재하는 곳은 북문과 남문이라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서문이 열려 선박 몇 개가 빠져나갔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입니다.”
근처에서 전령의 보고를 같이 들은 제갈량이 백우선으로 입가를 가린 채 이야기했다.
“백제국의 왕이 물길로 도망쳤거나….”
“…단순한 시선 돌리기일 수도 있죠.”
사마의는 제갈량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끼어들면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
설명할 기회를 놓친 제갈량은 웃는 표정 그대로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과연 저 시선에는 어떠한 뜻이 담겨있을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가 죽을 눈빛이었으나 보랏빛 머리카락의 군사는 뭐 불만 있냐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흥.”
오히려 팔짱을 낀 채 당당한 기색으로 그녀를 마주 볼 뿐.
“아, 아마 시선 돌리기일 가능성이 높아요.”
“…….”
“바다로 나아가서 해안을 빙 돌아 육지에 상륙할 수도 있지만….”
용과 호랑이가 평소처럼 기 싸움을 벌이자 소심한 인상의 소녀가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이야기를 보충했다.
“그, 그것도 도시 주변을 포위한 수군(水軍)을 떨쳐냈을 때 이야기니까요.”
확실히 선박 몇 척이 주유가 이끄는 대함대의 포위를 돌파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몇 년에 걸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수군이었으며, 도망치는 적군을 추격하기 위한 쾌속선도 몇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하물며 그 주유가 직접 지휘하는 함대 아닌가.
분명 빈틈도 별로 존재하지 않을 텐데, 자그마한 선박 몇 척이 열심히 들이받아 봤자 그대로 침몰할 뿐이었다.
“그러면 호위 몇 명만 남기고 부둣가에서 흩어졌다는 뜻이야?”
“…이, 이것도 경우의 수가 두 가지 있어요.”
이번에도 두 가지야?
완벽하게 몰아붙였는데도 두 가지라니, 참 많기도 하다.
주변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해 준 방통은 다른 꼬꼬마 군사들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폈다.
“첫 번째는 주군의 말씀처럼 부둣가에서 흩어진 다음 감시를 피해 달아나는 게 있네요….”
“…….”
“이, 이건 저희가 전투에 집중하는 틈을 노리는 거죠.”
방통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누군가는 성벽을 오르고, 누군가는 성문을 부순다.
그다음 도시로 진입해서 시가전까지 벌이는 와중에 주변 경계마저 완벽하다고?
그게 가능하면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야.
아니, 솔직히 로봇도 힘들겠다.
그러면 결국 놓칠 수밖에 없는 건가?
지금까지 백제왕 한 명 잡겠다고 무슨 고생을 했는데….
“…얼굴만 봐도 뭘 생각하는지 알겠네요.”
이에 내가 살짝 비관스러운 생각을 할 무렵, 제갈량과 눈싸움을 벌이던 사마의가 고개를 이쪽으로 홱 돌리면서 말했다.
“지금 상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표정 좀 피시죠?”
“응?”
“저희 후방에 포위망을 유지하는 예비대가 있잖아요.”
“아.”
설명을 들은 내가 깨달았다는 기색을 보이자 사마의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도망친 놈들이 운 좋게 하남위례성을 벗어나더라도 머지않아 주변을 경계하는 예비대에게 붙잡힐 거예요.”
그렇군.
역시 똑똑한 사람은 전부 계획이 있구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통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보, 보셨나요? 주군께서 표정이 살짝 안 좋아지니까 아주 재빠르게 반응했어요….”
“…그런가?”
내가 살짝 의아한 태도로 대답하자 방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 역시 안 그런 척하지만 주군을 열심히 챙겨주는….”
“…….”
“히익!”
내 이럴 줄 알았다.
방통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 안 들킬 줄 알았는지, 내게 사마의에 대해서 무어라 열심히 설명하다가 본인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받고 곧장 찌그러졌다.
분명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닐 텐데 꿋꿋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매우 인상 깊구나.
“두 번째 방법도 간단합니다.”
그렇게 사마의의 목표물이 제갈량에서 방통으로 옮겨지자 백발의 군사, 제갈량은 방통이 설명하던 내용을 이어서 말했다.
“왕이 사용하던 의복과 장신구들을 부하 장수에게 넘겨주고, 죽은 것으로 위장하는 것이지요.”
“…….”
그러니까 ‘조무’ 작전을 실행한다는 뜻이구나.
사수관 전투에서 원술의 이상한 견제로 손견이 군량 부족에 시달리다가 화웅한테 패배했을 때, 손견 휘하 장수였던 조무란 자가 본인이 붉은 두건을 쓰고 손견인 척해서 겨우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지.
이 세계의 조무는 화웅이 아닌 유표한테 죽었다던가.
그 결과 매복에 당하고 사경을 헤매던 손견이 겨우 살아남았다고 하던데….
…카드 게임으로 치면 손견이 파괴될 때 조무가 대신 파괴된다는 효과가 존재하겠군.
참으로 잔혹한 일이었다.
제갈량의 설명을 들은 나는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죽음을 위장한다고 치면 왕은 어디서 뭘 하는데?”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제 계산대로라면 그들이 보일 행동은 한 가지뿐입니다.”
제갈량은 평소와 똑같이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변장(變裝).”
“…….”
“주군께서 죄 없는 백성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을 이용해, 초고왕은 평범한 백성으로 위장하여 도시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입니다.”
오….
그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듯이, 백제국을 다스리는 왕은 내가 전혀 생각치 못했던 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확실히 나는 조만간 한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니까.
괜히 온갖 위험 부담을 지면서 열심히 탈출하는 것보다, 내가 물러나기를 기다리다가 분위기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다시 거병하면 되는 일이었다.
고구려는 한나라와 몽골 제국이 건네준 땅을 다스리고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느라 한창 정신이 없을 테니….
물론 적군의 손에 넘어간 도시에서 머무른다는 발상은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닌 이상 채택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근데 아예 불가능한 건 또 아니란 말이지.
리스크가 큰 만큼, 리턴도 큰 계획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괜히 이상한 곳으로 도망쳐서 우리한테 붙잡히는 것보단 얌전히 남아있기를 선택했다.
만약 천운이 따라서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했더라도 그 이후가 문제지.
이때는 아직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집어삼킨 때가 아니잖아.
그 말은 즉 마한에 산재해있는 연합 국가의 왕들조차 백제국한테 적대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괜히 이들을 받아들였다가 또 한나라가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전쟁의 원인을 뿌리 뽑고자 하겠지.
“…….”
말 그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만큼, 초고왕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제갈량 말마따나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내가 보일 대응책도 간단하지.
나는 테무진이 돌아오기 전까지 하남위례성을 뒤집어엎을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