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707)
EP.707 삼한(三韓)(19)
도시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이며 최후까지 항전하던 백제국 병사를 쓰러트린 이후 나는 주변 상황을 전체적으로 정리했다.
대충 예상했지만 초고왕은 하남위례성에서 자취를 감췄지.
서문 방향으로 도망친 여러 개의 선박은 방통의 예상대로 주유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했다.
선박 대다수는 주유의 함대에 접근하기도 전에 집중 공격을 맞아 나포됐으며, 천운이 따라 어찌어찌 거리를 좁힌 선박도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한 채 그대로 침몰했다고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주유의 지휘에 수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신들린 듯한 블로킹 솜씨를 보였다고 하던데….
아마 백제국 선박들은 주유가 이끄는 함대에 몸통 박치기를 한 다음 가라앉은 게 아닐까.
이게 바로 충돌 사고지.
하여튼 가라앉은 선박을 수색해 보니 이게 웬걸.
정말 제갈량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왕의 의복과 장신구를 걸친 남성이 사망한 채 발견됐다고 한다.
시체가 발견됐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정말 이 인물이 백제국의 국왕이 확인하는 일뿐.
이에 주유는 시체의 신분 파악을 위해 항복한 백제국 장수들을 불러 모았으나….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았다.
───자신들이 알아보기엔 얼굴이 너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다고 합니다.
참 지독하기도 하지.
신분을 알 수 없도록 일부러 시신을 훼손시켜?
아마 자신이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바로 자결한 것 같은 상황.
그 이후 주변 수행원들이 시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얼굴을 짓뭉개버린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살아있을 때 일부러 얼굴을 훼손시켰다거나.
만약 그렇다면 진짜로 무서운데.
이 시대에서 충(忠)이란 가치를 위해 인간이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기억하던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주유에게 붙잡혀 죽은 인물은 진짜 초고왕일까, 아니면 시선 돌리기를 위한 가짜 왕일까?
아마 가짜 왕이겠지.
그 어떤 충신이 자신이 섬기던 왕의 시신을 마구잡이로 훼손할 수 있겠나.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사방팔방으로 찢어발기는 부관참시(剖棺斬屍)도 역적에 준하는 범죄자들에게만 시행되는데, 이런 시대에서 왕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충신들이 제 주군의 시체를 훼손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죽은 다음 시신을 훼손하라 말하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인물들이 한 트럭일걸.
자기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명령은 들을 수 없다며 끝까지 버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시신을 훼손하지 않으면 금방 신원이 특정돼서 문제였다.
시신의 신원이 특정되면 우리가 초고왕이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테니 백제국 입장에서도 별다른 수가 없었을 터.
사실상 이렇게 해도 문제고 저렇게 해도 문제인 상황이지.
그러면 뭐, 그나마 나은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지 않나.
결국 백제국은 시신을 훼손시켜서 아주 잠시나마 초고왕 추적에 혼선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이지만.
초고왕이 사용했던 것이 분명한 왕좌(王座)를 눈앞에 두고 나는 적당한 곳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야기했다.
“초고왕, 아직 살아있다. 도시 전부 샅샅이 수색해.”
“넵! 맡겨주세요!!”
난 부관으로 활동하는 손권이 활기차게 대답하며 자리를 벗어나는 걸 확인하고 엉덩이 밑에 깔린 가죽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호랑이 가죽이네.
가죽 크기를 보니까 살아생전 덩치가 어마어마했던 놈이구나.
누가 왕이 머물렀던 거처 아니랄까 봐 상당히 호화스러운 사치품들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아마 여기 있는 사치품 중 하나만 처리해도 상당한 재물이 손에 들어오지 않을까.
“…….”
“…흥.”
내가 굳이 왕좌가 아닌 다른 곳에 걸터앉는 걸 확인한 꼬꼬마 군사들은 살짝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는 뜻을 꺾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가 저번에 설명한 적이 있지 않나.
너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소한 행동 하나로도 온갖 정치적 의미가 담기기 시작한다.
그냥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오늘은 날씨가 흐리구나.’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주변 관료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이렇게 반응했다.
───날씨가 흐리다…?
───…헉! 한나라의 어두운 미래를 걱정하시는 건가?!
───대장군과 감히 비교할 인물이 없다는 몇몇 선비들의 평이 사실이었구나!
───…….
아주 단체로 착각을 하는지라 무슨 말을 못하겠어.
이외에도 내가 평소 입고 다니는 복식을 모두가 따라 입는 등 패션 선구자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지.
어디 이것도 따라 입는지 보겠다면서 일부러 저렴한 옷감을 사용하니까 그것도 따라 하더라고.
물론 이 소소한 장난은 곧장 황궁에서 직접 발걸음을 옮긴 황제 폐하께 금방 진압당했다.
───짐이 하사한 비단은 어디에 내버려두고 그런 의복을 입고 다니느냐?
───…폐하?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겠군. 또 나랏일에 보탠답시고 국고에 더했겠지?
길가에 흔히 자라나는 들풀을 이용해 저렴하게 지어낸 내 의복의 옷감을 보고 황제 폐하께선 잔잔히 웃어 보였다.
───내 이것만큼은 두고 볼 수 없겠구나. 그대가 국고에 더한 재물들을 낱낱이 조사해서 다시 되돌려 놓겠느니라.
───하오나 폐하….
───…….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 대장군이 황제한테 말대꾸하느냐는 표정은 상당히 인상 깊었지.
어찌 됐든 내가 솔선수범하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
훗날 기회가 된다면 요긴하게 써먹어야지.
그래서 내가 왕좌에 앉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왜겠어.
왕좌에 앉는 순간 대장군께서 왕 작위를 원한다며 온갖 호들갑을 떠는 미래가 훤히 보이는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앉을 리 없었다.
지금도 승상이나 상국 임명도 겨우겨우 피하는 중인데 뭐? 왕 작위?
날 부담감으로 짓누를 생각이라면 아주 뛰어난 계획이라고 칭찬해 주겠다.
물론 한고조 유방이 신하들과 백마의 피를 바르며 나눈 맹세 덕분에 유(劉)씨 성을 지니지 않는 내가 왕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한나라 건국 이후 수백 년 동안 어겨진 적 없는 맹세였으니.
근데 더욱 높은 자리를 향한 야망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만약 내가 승진을 원한다는 정보가 폐하의 귀에 들어가 봐라.
상국 임명은 기본에, 온갖 듣도 보도 못한 권한까지 새롭게 창초해 내시며 날 왕(王)보다 더한 무언가로 만들어 버릴 게 분명했다.
왕이 될 수 없다고?
그러면 단 한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왕보다 더한 권력을 지닌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내면 되겠네?
나라의 지존(至尊)인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이 뭐가 있겠나.
이미 비우(妃耦)라고 해서 국서에게 중혼 권한까지 내려주신 폐하가 다른 작위를 만들어내지 못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주군!”
“응?”
내가 하남위례성을 뒤집어엎는 중인 장수와 병사들의 보고를 기다릴 무렵, 저 멀리 성의 정문 방향에서 한 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살펴봐도 온갖 고초를 겪은 듯한 피로한 안색이 눈에 띄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전령의 복장이었다.
한나라의 수많은 부대 중에서도 단 한 부대에만 허락된 문양.
어깨에 두른 망토….
이 시기엔 두봉(斗篷)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여튼 망토 위에 황실을 상징하는 거대한 용 자수(刺繡)를 놓은 금군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낙양에서 황제 폐하를 호위해야 하는 금군이 이토록 급하게 나타나다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가?
지금 황명이랍시고 이 자리에서 여유롭게 이야기할 상황은 안 되는 것 같으니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건네줄 것이 있나?”
“예!”
언뜻 살펴봐도 수천 리를 쉬지 않고 움직인 초췌한 인상이었으나 금군은 한나라의 최정예 부대답게 용케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버텼다.
…적어도 일주일 휴가는 줘야겠는데.
이러다가 사람 한 명 잡겠다.
나는 금군에게 문서를 전달받고 근처에 있는 제갈량에게 눈빛을 보냈으나 그녀도 어리둥절한 기색을 드러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나라의 모든 정보를 꿰고 있는 제갈량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라….
적어도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금군이 이렇게 자신을 채찍질해 가며 내게 문서를 전달할 이유가 있나?
───돌아오거라.
있네.
나는 이 고급스러운 문서에 아주 짧은 문장만이 적힌 걸 확인하고 우뚝 멈춰버렸다.
───지금 당장.
이야, 감정을 얼마나 꾹꾹 눌러 담았으면 글씨가 이렇게 선명하지?
심지어 평소 서류를 결재할 때 사용하는 자그마한 도장이 아니라 전국옥새(傳國玉璽)를 꽝 찍어버리셨다.
“…….”
왠지 돌아가면 한 달은 못 빠져나올 기분인데.
나는 황제 폐하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깊이 고심하면서 낙양에서 일하는 관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아마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버텨다오.
이왕 온 거 확실하게 끝맺음은 하고 가야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