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84)
EP.84 유주자사(7)
“놓쳐?! 놓쳤다고?!”
군량 창고에서 일어난 화재를 제압한 공손찬이 유우를 놓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그냥 기병도 아니고 그 백마의종을 붙여줬는데 그걸 놓쳤단 말이냐?!”
“주군! 면목 없습니다!”
엄강은 공손찬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바짝 숙이며 외쳤다.
공손찬은 휘하 장수가 변명하는 행동을 제일 경멸했다.
이래서 안 됐다는 둥 저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둥….
그러다가 공손찬에게 목이 잘려 나간 놈들만 해도 엄강의 기억으로 벌써 백을 넘어갔다.
엄강은 차라리 빠르게 잘못을 인정하고 벌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허리를 바짝 숙이면서 몸을 벌벌 떠는 엄강의 대처가 먹혀들었는지 공손찬은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물러나라.”
“예!”
공손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엄강은 곧장 몸을 일으키고는 후다닥 물러났다.
공손찬은 그런 엄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생각에 빠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유비.
생긴 것만 보면 전혀 싸울 줄 모르는 여인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그녀도 엄연히 전방에서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다.
말 위에서 쌍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에 공손찬 자신도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지.
아무리 백마의종이라고 한들 유비 같은 장수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거기에 유비가 동생이라면서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생각하면 무사히 도망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공손찬은 살짝 시선을 돌려 단칼에 죽어나자빠져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 천하무쌍을 붙잡아둘 수 있던 무예.
유우를 붙잡지 못한 것도 아쉽고, 병사들 일부를 허무하게 잃은 것도 아쉬웠지만 무엇보다 제일 아쉬웠던 건 그들이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군.”
공손찬이 아는 유비라면 분명 호화스러운 대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유비가 불온한 무리와 만남을 가지는 걸 알고도 굳이 넘어갔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유비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물이 아니었다.
은혜를 완전히 돌려주지는 못해도 이유가 없는 이상 배은망덕한 행보를 보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
공손찬은 유비 일행이 유우를 데리고 달아났다던 서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공손찬 자신은 처음 유비 일행이 중산 방향으로 향한다길래 기주로 도망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잠깐 생각해보니 이내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기주로 도망칠 거였다면 남문을 통해 빠져나가 업이나 남피 쪽으로 달아났을터.
“병주…. 병주라….”
현재 천하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니고 있는 대장군 휘하 영토.
자신이 지배하는 유주와 비슷하게 허구한 날 이민족에게 시달리는 지역.
어째서 유비가 굳이 거기로 달아났을까?
결국 그곳을 지배하는 세력은 유비 일행과 적대적인 곳이거늘.
남피를 지배하고 있는 원소나 업을 지배하고 있는 한복은 자신에게 망명하는 유비 일행과 유우를 거절할 인물이 아니었다.
마치 유비가 대장군의 명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
그때 생각을 이어나가던 공손찬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설마 진짜 대장군의 명을 받기라도 한 건가?
대체 어느 사이에?
호로관 전투 이후 유비가 할 일이 있다면서 자신의 휘하에서 벗어나고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다.
유주와 낙양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면 곧장 낙양으로 향한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기간.
공손찬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참. 어이가 없군.”
아무리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어지러운 시대라지만 편을 갈아타는 것이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유비 아우.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참 실망이야.”
공손찬은 끌끌 웃으면서 자신 앞에 놓여있는 시신 한 구를 바라보았다.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 범인.
유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충성스러운 장수.
불을 진화하러 나서는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최대한 시간을 끌던 장찬은 결국 공손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장찬은 공손찬에게 죽는 그 순간 유우가 도시를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면서 숨이 멎었다.
“쯧. 그 충성을 나에게 바쳤으면 좋았을 것을.”
공손찬은 혀를 차면서 차디찬 대지에 몸을 뉘인 장찬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만약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이들처럼 목숨 바쳐 자신을 구해줄 인원들이 있을까.
“주군! 병사를 이끌고 성문을 열어버린 자를 붙잡아왔습니다!”
공손찬이 눈을 감고 잠깐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저 멀리서 한 문관이 포박된 상태로 끌려오고 있었다.
문관은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눈빛 안에 담긴 그 의지만큼은 꺾이지 않은 상태였다.
눈을 뜬 공손찬은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문관을 바라보았다.
“손근.”
“…….”
“왜 굳이 죽을 짓을 했지?”
“하하하!”
공손찬의 질문에 손근은 난데없이 웃기 시작했다.
“주군을 살릴 기회가 있는데 어떤 신하가 그 기회를 마다하겠느냐!”
“정말 그놈을 살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같이 난폭한 놈은 백 년이 지나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손근이 공손찬을 욕하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왜 굳이 욕을 하냐 생각하면서 공손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괜히 잘못 걸리면 억울하게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었다.
이제 또 당분간 공손찬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 숙이면서 살아야겠구나.
이럴 거였다면 이렇게 붙잡아올 게 아니라 차라리 사고인 척 죽여버리고 시체만 가져오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리 생각한 공손찬의 병사들이 속으로 탄식을 내뱉고 있을 때 공손찬이 보인 반응은 예상외였다.
“음…….”
웬일로 노발대발하지 않고 얌전히 의문에 잠긴 모습.
병사들이 그런 공손찬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공손찬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시체하고 저놈의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매달아라.”
“예!”
공손찬은 병사가 재빨리 읍을 올리고 손근과 장찬의 시체를 질질 끌고 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공손찬──! 네 악행은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흠…….”
공손찬은 손근이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면서 생각에 빠져있었다.
공손찬이 문득 단어 하나를 중얼거렸다.
“인의(仁義).”
사람이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덕적인 의리.
그러고 보니 자신이 한때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유우 자신이 그리 중요하다 말하던 인의라는 것.
그 인의라는 것이 정말 유우를 구해줄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그 인의라는 것이 정말 유우를 구해줬을지도 모르겠군.”
애초에 그 유비 아우도 허구한 날 인의 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어쩌면 비슷한 인물끼리 서로 끌려 목숨을 구해준 거일 수도 있었다.
공손찬은 유비와 유우를 떠올리며 피식 비웃었다.
그래봤자 뭐하나.
결국 변변찮은 세력 하나 없는 이들 아닌가.
유우는 자신에게 패배해 세력을 잃었고, 유비는 정착할 곳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자기 한몸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 웅대한 꿈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비가 대장군의 세력에 정착하고 병력을 이끌며 훗날 자신에게 쳐들어오는 상상도 해봤으나 공손찬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유비가 보여준 행동으로 확실해졌다.
유비는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대장군. 너는 유비를 품지 못할 것이다.”
유비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인의라는 게 대장군에게 존재한다면 어떨까 싶지만 그럴 턱이 없지.
현재 이 천하에 있는 모든 군웅은 인의라는 단어와 거리가 있었으니, 유비는 결국 온 천하를 떠돌아다닐 인물이었다.
짐 덩어리에 불과한 나약한 백성들을 보살피면서 어찌 천하를 넘보겠는가?
유우도 유비도, 전부 멍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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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혀 몸이 쇠약해진 유우가 낙양으로 향한 강행군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유우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 유비 일행은 마을에 잠깐 머물다 가기로 결정했다.
유비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도와줄까 잠깐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을 주민들은 외지인에 불과한 유비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말을 팔아서 다른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그 이민족들을 마을에서 내쫓아 주셨다 들었습니다.”
“…….”
최근 병주 내에서 유비에 대한 소문이 퍼져있는 모양이었다.
마을 앞에서 유비 일행을 맞이하던 노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런 영웅 나리들을 제가 어찌 푸대접하겠습니까. 저희 집에 오셔서 원하는 만큼 푹 머물다 가시지요.”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노인의 허락을 받은 유비가 품을 뒤져서 돈 일부를 내밀었다.
“일단 머무르는 것에 대한 지급을….”
“아닙니다. 넣어두시지요.”
자그마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백성이라면 분명 눈이 화들짝 커질 만한 액수였는데, 노인은 이를 한사코 거절했다.
“제가 어찌 영웅 나리에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필요 없으니, 좀 더 의미 있는 곳에 쓰도록 해주십시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영웅 나리들이 저희에게 해주신 일이 있는데 은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다리를 떨면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눈동자에는 총명한 기운이 가득했다.
모든 선행이 전부 좋게 돌아오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선행을 선행으로 갚아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유비는 버틸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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