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10
10. 바람 나그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말 내내 흐리긴 했지만 비 소식은 없었는데 월요일로 넘어오는 새벽부터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저수지 위로 물안개가 자욱했다. 밤사이 테이블 위로 올라가 있던 의자들을 내리던 동만이 하품을 삼키며 말했다.
“월요일 아침부터 웬 비가 이렇게 내린댜.”
“아빠, 커피.”
수연은 동만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비가 오면 저혈압으로 끙끙거리는 엄마였다. 평소라면 온 식구가 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났겠지만 지금은 식사를 차려 주어야 하는 장기 숙박객이 있어 다른 가족들이 나섰다.
“어째 엊저녁에 갑자기 갈비탕을 끓인다 했다.”
일기 예보보다 정확한 정자의 촉에 감탄하며 동만은 부지런히 상을 닦았다. 홀에 있는 네 개의 테이블을 닦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마루로 올라가 세 줄로 놓여 있는 아홉 개의 테이블도 닦았다. 수연은 갈비탕 솥이 올라간 화구에 가스불을 올리고, 밥솥의 버튼을 눌러 취사를 시작했다.
비가 오는 저수지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수연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따뜻한 커피를 홀짝였다. 그때 별채 황토방의 문이 열리더니 세호가 하품을 하며 나왔다. 더벅머리를 긁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슬리퍼를 신고서 겅중겅중 뛰어온다.
“아으. 쌀쌀하다. 누나도 나왔네? 비가 제법 와.”
으스스 몸을 떨며 두 팔을 어루만지는 세호에게 동만이 물어보았다.
“거서 잔겨?”
“어제 클랜전 있어서 재민이 형이랑 작전 짜느라구요. 어우 잘해. 사람 되게 물렁해 보이는데 게임할 땐 아주 그냥 얍삽 그 자체야.”
자기가 말해 놓고 뭐가 좋은지 낄낄 웃었다. 그리고는 동만이 내미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크으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 맞으며 일하려면 대근하겄네.”
밥솥이 칙칙 돌아갈 때 동만이 말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그릇에 담던 세호가 집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비 오면 쉰다는데?”
“쉬어?”
동만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주말도 없이 일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고 작업반장이 말했던 것이 엊그제였다.
“어. 재민이 형이 어젯밤에 그러던데?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래. 자기 전에 비 오라고 기도하던데? 봐, 평소 같으면 벌써 일어났을 아저씨들이 안 나오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일이 시작하는 시간은 8시 반 근처. 아침을 먹는 시간은 8시쯤이었다. 그 전에 나설 준비를 해야 했기에 보통 7시면 별채의 문이 열리곤 했었다.
“태산이 형만 일어났어요. 아까 나 일어났을 때 샤워하고 있더라고. 어, 나오네.”
세호의 말에 수연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별채 쪽을 바라보았다. 끝이 젖은 머리를 한 태산이 가든 쪽으로 성큼 건너오고 있었다.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태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찬장에서 뚝배기를 하나씩 꺼냈다. 냉장고를 열어 어제 미리 부쳐 놓았던 계란 지단과 송송 썬 파, 물에 불린 당면도 꺼냈다.
“장 팀장도 잘 잤어? 오늘 진짜 쉬는겨?”
“예. 오늘은 쉽니다. 박 대리는 서울 갔다가 내일 아침에 내려오고 김 사장님도 댁에 가셨다가 밤늦게나 올라온다고요. 반장님도 대전에 다녀오시겠다네요. 점심 저녁 식사는 준비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침만 먹겠습니다.”
“그려요. 그렇게 합시다.”
“형, 여기 커피요.”
“땡큐.”
홀에서 나누는 대화가 고스란히 주방에도 들렸다. 태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이제 끓으려 하는 갈비탕을 국자로 한 번 휘휘 저었다. 한 번 크게 끓으면 작은 뚝배기에 나누어 담고 고명을 올리면 된다.
“장 팀장은? 장 팀장은 서울 안 올라가고? 결혼할 처자 있다며? 안 가 봐도 되는겨?”
동만이 태산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갈비탕을 젓던 수연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형 여자친구 있었어요?”
세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와, 난 진짜 하나도 몰랐네. 혼자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물었다.
“아니, 근데 재민이 형이 그랬는데.”
“세호야!”
수연은 다급하게 주방에서 나가며 세호를 불렀다. 요 근래 이렇게 급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 누나. 왜?”
“너 반찬 다 담았어?”
“어. 진즉 다 했지. 잠깐만 누나.”
세호가 다시 태산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 했다. 수연은 다시 한 번 크게 세호를 불렀다.
“여기 갈비탕 끓는 거 같아. 간 좀 봐봐.”
“그래? 엄마가 간 안 했어?”
세호가 슬리퍼를 끌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수연과 태산의 눈이 마주쳤다. 태산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한테 여자친구가 있다고? 라고 묻는 표정이다.
“여자친구가 섭섭해할 거 아녀. 쉬는 날에 올라도 안 온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만이 커피를 호르륵 마시며 말했다. 수연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여자친구 있어. 있다고 해.
존재하지도 않는 여자친구를 만들어 낸 범인이 누군지 너무나 뻔했다. 수연의 마음속 외침들이 다 들렸지만 태산은 애매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긁으며 뜸을 들였다.
“많이 섭섭할까요?”
“그럼. 섭섭하고말고.”
“사실…….”
태산이 뜸을 들이자 수연이 한 번만, 제발, 이라고 말하는 듯 검지를 세워 들었다. 난감해하는 수연의 표정이 좋았다. 흠, 태산은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꾹 참았다.
“아빠, 비 진짜 많이 온다. 그치?”
수연이 동만의 주의를 돌리려 말했다. 동만이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그래도 이렇게 비가 와 줘야 농작물이 쑥쑥 크지.”
태산은 계속 수연을 보는 중이다. 수연의 초조한 표정도 좋다. 하긴. 뭔들 안 좋은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좋고, 자존심이 상해서 입술 깨무는 것도 좋고, 건조하게 됐거든? 하고 말하는 것도 좋았다. 그때 동만이 고개를 돌려 태산을 보며 말한다.
“사실, 뭐?”
“예?”
“아까 말 하다 말았잖어.”
“아, 사실 올라갈 예정이라고요.”
태산은 대답했다. 수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려. 수연이한테 들었어. 오래된 사이라며? 그럴수록 잘 해야 하는 겨. 말 안 해도 내 맴 다 알겠지, 그러지 말구.”
“예, 명심하겠습니다.”
태산은 선선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안도하는 수연과 수연의 뒤에서 뭔가 굉장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호가 보인다. 수연이 주방으로 들어간 뒤 태산은 세호를 향해 쉿, 하고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수연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핸드폰을 보며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58분. 약속 시간까지는 2분이 남았다.
비 오는 날 뭐 하는 짓이람. 평상 앞에 우산을 쓰고 서 있던 수연은 한 손으로 메시지 창을 띄워 보았다. 접선 암호 같은 짧은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12시. 느티나무] [ㅇㅇ]참으로 무성의해 보이는 자신의 대답이 수연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왜인지 태산에게는 무성의하게 보이고 싶었다. 마지못해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최대한 무성의하게.
그렇게 생각하다 수연은 피식 웃었다.
무성의라니. 아니다. 무심하고 싶었다. 스쳐 가는 손님. 한때 알았던 사람. 그래서 밥을 먹어도, 커피를 마셔도 마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그런 사람. 그런 사이.
마음 같은 것, 일렁이지 않는 사이.
멀리서 진돌이가 웡웡 짖었다. 산책 갈 때를 빼고는 누군가 아는 사람이 나가고 들어올 때만 짖는 진돌이다. 아마도 태산이 출발을 했나 보다.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태산은 자주 진돌이의 집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건빵 몇 개로 시작한 그 둘의 우정은 삶은 고기 몇 점으로 바뀌더니, 며칠 전에는 급기야 하얀 개껌으로 발전해 있었다. 시내에 다녀온 태산이 개껌을 흔들자, 지조도 없는 진돌은 배를 까고 태산의 앞에 발랑 드러누웠다.
태산과 진돌의 급조된 우정에 대해 생각하며 수연은 굽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태산의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산의 차가 멈춘 곳은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바람 나그네’였다. 양념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산채 비빔밥이 맛있어서 수연이 가끔 오는 곳이다.
“여기서 먹게?”
“왜? 싫어?”
싫다기보다 머쓱했다.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자신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이곳에 정착해서 바람 나그네를 연 주인 부부는 마을 사람들과 격 없이 섞이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수연에게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사이 정도는 되었다.
“아냐. 들어가자.”
수연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폈다. 어차피 이 근방의 밥집이라면 알음알음 다 아는 사이였다. 마을 초입에 있는 ‘호수 가든’에 갔더라면 그 즉시 집으로 전화가 갔을지도 모르는 일. 그나마 바람 나그네가 나았다.
“예약하셨죠?”
들어가자마자 주인아주머니가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예.”
태산이 대답했다. 수연은 아주머니가 왜 확신에 차서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추적추적 비 오는 월요일 점심, 손님은 한 팀도 없었다.
“저쪽에 앉으시면 돼요.”
창가 쪽 자리에 밑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자리에 앉자 태산이 메뉴판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능이 삼계탕이 유명하대.”
“나도 알아.”
우리 동네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수연의 표정에 태산이 웃었다.
“나는 산채 비빔밥.”
태산이 메뉴판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삼계탕 안 먹고?”
“됐어.”
“오리도 있어. 오리 백숙 시킬까?”
“오리나 닭이나.”
수연이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도토리묵 말린 것이 쫄깃쫄깃 씹히는 산채 비빔밥을 두고 겨울 내내 물리도록 먹었던 삼계탕을 또 먹고 싶진 않았다.
“잘 먹어야 튼튼해지는데.”
“지금도 튼튼해.”
“어디가?”
어디가 튼튼하냐니. 약을 먹어 몸이 좀 곯긴 했지만 아픈 곳 없으면 튼튼한 거지. 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태산을 보았다. 어디 한 군데 비실비실해 보이는 부분이 있나 훑어 내리는데 분하게도 실패다. 건강, 아니 강건이라는 단어가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장태산이 아닐까. 애초에 뼈대부터 달라 보였다.
태산이 메뉴판을 훑는다. 선이 짙고 굵은 얼굴은 웃지 않을 때면 날카롭고 뚜렷한 인상을 주었다.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태산은 분명 무신이었을 거다. 그것도 우렁차게 호령하며 제일 앞에서 달리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 태산이 주문을 했다.
“저희 능이 삼계탕 하나랑 산채 비빔밥 하나, 그리고…….”
수연은 깜짝 놀라 말했다.
“더 시키게?”
“반찬도 시켜야지.”
삼계탕은 일품 음식이야. 밑반찬도 많고. 수연이 설명을 하기도 전에 태산이 고민은 끝났다는 듯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해물 파전도 주세요.”
“그걸 어떻게 다 먹으려고?”
“먹다 보면 금방이야.”
“여기 파전 엄청 커. 한 조각 먹으면 못 먹어. 거의 튀김 수준이라구.”
수연은 손짓을 해 가며 설명을 했다. 둘이 와서 서브 메뉴로 시킬 그런 수준이 아니라고, 아주 크고 두툼해서 대여섯 명은 와서 나눠 먹어야 하는 수준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태산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왜 웃어?”
“예뻐서.”
수연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태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눈이 삐었구나.”
“많이 먹어. 아프지 말고. 바람 불면 날아가겠다.”
태산이 수저를 놓아 주며 말했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날아가지 않아.”
수연은 대답했다. 태산이 소리 없이 웃었다.
* * *
걱정이 무색하게도 태산은 커다란 파전을 남김없이 먹었다. 음식이 나온 이후 딱히 이렇다 할 의미 있는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물음도, 잘 지냈다는 대답도 없이 시시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이를테면.
“이제 완전히 봄이네.”
“그렇네.”
라든가.
“원래 여기가 벚꽃길로 유명하다며?”
“응. 많이들 와.”
“가든도 바빠지겠다.”
“그렇지 뭐.”
같은.
대화를 나눌 때면 수연은 흘러가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어디의 누구와 나누어도 상관없을 표면적인 대화들과 누구에게나 보여 줄 수 있는 얕은 마음들에 대해서도.
한 계절 피었다 지는 벚꽃처럼, 멀리서 뜨고 지는 달처럼, 차올랐다 때가 되면 흘러가는 것들을 생각했다.
“도토리묵 시켜 줄까?”
파전 한 쪽을 다 먹지 못하고 내려 둔 수연에게 태산이 물었다. 수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기 도토리묵 맛있긴 한데, 배불러.”
“다음엔 그거 시켜 줄게.”
태산이 묵묵히 젓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참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을 약속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시간을 일컫는 말. 거절의 완곡한 표현이 될 수도 있는 말. 수연은 내려놓은 젓가락을 바르게 정리하며 대답했다.
“그래, 다음에.”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찾아오면, 수연은 한 번씩 커다란 창을 통해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 주방에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주인 부부의 대화 소리. 언제나 맛있게 먹었던 산채 비빔밥.
불편할 것도 낯선 것도 없는데 까닭 없이 숨쉬기가 버거워진다. 그럴 때면 수연은 멀리에 시선을 두며 숨을 깊이 마셨다.
후식으로는 국화차가 나왔다. 태산이 투명한 찻주전자를 잡았다. 한 잔은 작은 찻잔에 따르고, 다른 한 잔은 물잔으로 쓰는 머그컵에 따랐다. 찻잔을 수연의 앞에 놓아주고는 머그잔을 든다. 수연은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들었다. 세 번쯤 나누어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태산이 계산을 하는 동안, 수연은 먼저 바람 나그네의 문을 열고 나왔다. 비가 그친 뒤라 그런지 깨끗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처럼 시야가 맑고 선명했다.
“후우.”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를 크게 마시고, 다시 뱉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 자신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꽃이 꽤 떨어졌네.”
언제 다가왔는지 태산이 뒤에서 말했다. 도로를 따라 피었던 벚꽃이 비에 떨어져 바닥이 온통 꽃잎이었다.
“그러게.”
수연이 대답하자 태산이 물었다.
“커피?”
가볍고도 의례적인 말처럼 들렸다. 정색하고 거절하는 것도 우습게 느껴질 만큼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그래서 수연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
“테이크 아웃하자. 가는 길에 차에서 마시지 뭐.”
밥을 먹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한없이 느슨한가 싶다가도 문득 견딜 수 없이 팽팽한, 한 번씩 깊게 숨을 쉬어야 하는 분위기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수연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 서울 가야 하잖아.”
태산이 에브리 먼데이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커피를 사 오는 동안, 수연은 차에 앉아 있었다. 양손에 커피를 든 태산이 등으로 문을 밀며 밖으로 나오고 있다.
태산과의 거리가 멀어서인지, 자신은 태산이 잘 보여도 태산은 자신을 보기 힘들다는 점 때문인지, 수연은 그제야 조금 편한 마음으로 태산을 유심히 볼 수 있었다.
오후의 늦은 햇살이 눈부신지 눈을 가늘게 뜬 태산이 걸어오고 있었다.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셔츠를 걸치고서.
언젠가 같은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헤진 청바지를 입고서 길을 건너는 태산을 기억한다. 잠깐만 기다려, 급히 말하고는 자신을 벤치에 앉혀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두리번거릴 때쯤, 커피 두 잔을 들고 건널목을 건너왔었던 스물한 살의 태산을, 수연은 기억했다.
극단을 찾아 헤맸던 대학로의 뒷골목과 마로니에 공원의 벤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짙은 나무 그늘과 맹렬했던 매미 울음소리. 얼음이 가득한 아이스커피와 여름 오후의 두꺼운 볕. 수연은 잠시 그 여름의 대학로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세월이라도 건너오는 것인지, 다가오는 걸음걸음마다 태산이 변한다. 분명 아이스커피를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10년 전의 태산이었는데, 노을 지는 창가에서의 태산이 되더니, 트럭에서 내려 옷을 툭툭 털던 태산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눈앞의 태산이 되었다.
걸음걸음마다 머리카락이 길었고, 어깨가 더욱 넓어졌다. 싱그러웠던 청년의 미소는 여유가 느껴지는 어른의 미소로 바뀌었다. 전과 같고, 전과 다른 모습의 태산이 수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뜨겁다. 조심해.”
커피를 건네주며 태산이 말했다.
“고마워.”
수연은 담담히 커피를 받았다.
차는 저수지의 공터에 섰다. 공터라기에는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주차장에 가까운 자리였다. 아스팔트 바닥에 직사각형의 하얀 칸이 네 개 그려져 있는 곳은 일종의 전망대와 비슷했다. 길을 가다 잠시 멈추어 저수지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게끔 도로 옆으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여기는 왜?”
“차에서 마시자며. 마시고 들어가자.”
의아해하는 수연의 눈빛에 태산이 대답했다. 여기까지 와서 차를 돌리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게 느껴진다. 수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꽃이 흐드러진 저수지의 풍경을 보았다. 태산이 창문을 모두 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왔다.
비가 개어 씻긴 듯 말간 푸른 하늘, 깊은 물, 하얀 꽃. 바람결에 춤을 추는 것 같은 물결까지. 아름다운 풍경이다. 수연은 잠시 그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태산도 말이 없었다.
“덕분에 여자친구도 생기고, 서울도 가야 하고.”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태산이 말했다.
“고맙다, 이수연.”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하는 수연의 대답에 태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웃다가 가만히 수연을 바라본다.
더 이상 웃지 않는 태산의 눈은 끝이 날렵한 유선형이다. 비행하는 매의 날개를 닮은 눈썹이 여전하다. 그 눈썹 아래, 태산의 뚜렷한 눈동자가 수연을 향해 있었다.
다시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태산의 시선이 너무 뚜렷해서 피할 수가 없었다. 곧 터질 것만 같이 크게 부푼 풍선 속에 있는 기분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차 안의 공기가, 그 공기의 밀도가 버거워진 수연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잠깐 걸을까?”
수연은 태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컵을 컵홀더에 내려놓았다. 달칵, 차 문을 열고 먼저 나왔다. 공터는 차를 세울 공간도 있지만, 차를 세워 놓고 수변의 산책로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도 있었다.
수연은 태산을 기다리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저수지를 두르는 메인 차도에 벚꽃이 피는 중이라면, 수변의 산책로는 개나리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깊은 산 속의 동굴을 통과하면 나오는 도원경 같기도 하고, 어느 먼 나라의 호숫가 같기도 했다.
“같이 가.”
어느새 다가온 태산이 옆에 서며 말했다.
“새삼 크다.”
저수지를 바라보며 태산이 말했다. 수연 가든의 아래쪽으로 보이는 저수지는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 보아도 끝과 끝을 한 번에 볼 수 없는 커다란 저수지다.
“이렇게 크니까 몇 백 톤씩 새도 티가 안 나네.”
“공사는 어떻게 돼 가고 있어?”
저수지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으며 지금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안전하고 얕은 이야기들. 깊이 파고들지 않고, 많이 나누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들.
“열심히 뚫고, 열심히 섞어서, 열심히 때려 붓고 있어.”
“그게 다야?”
뭔가 정밀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다. 수연이 묻자, 태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단순하지?”
“막히기는 해?”
“그럼.”
태산이 선선하게 대답했다. 수연은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물길이 잡히지 않으면 새는 틈을 막고 서 있기라도 하겠다고 했다던. 태산이라면 왠지 가능해 보인다.
“언제쯤?”
“운 좋으면 내일. 아니면 다음 주거나. 한 달?”
애매하게 길어지는 기간에 수연이 의심쩍다는 눈빛을 보내자 태산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나도 몰라.”
“그게 뭐야.”
“그라우팅 공사가 대부분 그래. 보이지 않는 땅 아래의 틈을 막는 거니까. 대강의 예측을 하고는, 그냥 들이 붓는 거지. 이래도 안 막힐래, 하고.”
장태산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산과 호수, 바다의 거대한 틈을 메꾸는 일. 실패를 하더라도 전부를 쏟아붓는 일. 그래서 기어코 막아내는 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벤치를 놓아 잠시 쉬었다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쉼터도 지나고, 완만한 아치형을 그리고 있는 다리도 건넜다. 바람이 분다. 단정히 묶어 놓은 수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몇 가닥씩 빠져나와 춤을 추듯 날렸다.
“그만 돌아갈까?”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에서 수연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문득 너무 멀리 온 기분이 든다. 뒤를 보는데 차를 세워 놓은 곳이 보이지 않았다. 이쯤에서 멈추고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 하고는.”
태산이 말했다. 수연이 찌릿, 노려보는데 태산이 다가온다. 거리가 좁혀져 수연은 반걸음 물러서는데 등 뒤로 난간이 닿았다.
“머리카락.”
태산이 수연의 입술에 물려 있던 한 가닥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수연은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비 개인 하늘에, 오후의 햇살에, 다가오는 태산에 눈이 시리다고 생각하면서.
“아까부터 신경이 쓰여서.”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연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손을 뻗는 태산의 머리카락도 날렸다. 태산이 머리카락을 가만히 집자 살갗과 살갗이 스치듯 닿는다. 미묘한 느낌에 수연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태산의 손이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입술 끝을 빠져나갔다. 태산의 손이 여전히 뺨 위에서 멈추어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태산의 눈동자가 짙었다.
“사실은, 구차한 핑계지.”
낮은 목소리로 말한 태산이 그대로 수연의 얼굴을 감싸며 입을 맞추었다.
포개어진 입술이 뜨거웠다. 수연의 뺨부터 목덜미까지 감싸 쥐고 있는 태산의 손도 뜨거웠다. 망설임 없이 다가왔던 입술이 느리게 떨어진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얼굴을 감싼 태산의 손은 그대로였다.
입술을 떼고, 언제라도 다시 입을 맞출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태산이 엄지손가락만 움직여 수연의 뺨을 느리게 쓸었다. 아름다웠던 저수지의 풍경은 태산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짧은 입맞춤과 느리게 뺨을 어루만지는, 아직은 예고편 같은 정도의 일. 그런데도 수연은 꼼짝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하는 기분이다. 생각도, 시간도, 풍경도, 모두. 오로지 서로의 시선만이 얽혀 있을 뿐이다.
태산의 손이 귀에 닿았다. 느리게 엄지와 검지로 수연의 귀를 비비듯 어루만졌다. 귓바퀴 뒤쪽의 도도록한 뼈를 따라 손가락으로 뜨거운 길을 그린다. 멀리서 본다면 마치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수연은 태산의 눈에 일렁거리는 욕망을 보았다. 여전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태산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태산은 떨고 있는 수연의 입술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이 연한 꽃잎처럼 부드럽다. 수연의 감촉이다.
깊은 밤 문득, 가슴이 저리도록 생각나서 한참을 우두커니 깨어 있게 했던. 오래도록 생생해서 한 번씩 고개를 흔들어 털어 내야 했던. 이수연의 감촉.
태산은 수연의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기울였다.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수연이 눈을 감는다. 태산은 수연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태산의 혀가 뜨거웠다. 수연은 사이사이 가파르게 숨을 쉬었다. 태산이 파도처럼 밀려와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숨을 쉬는 법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밀려오는 태산을 감당하지 못해 수연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지고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태산이 움츠러든 수연의 팔을 들어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수연의 발끝이 저절로 들린다. 땅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닿는 곳마다 데일 듯 뜨거운데, 버거워서 가슴이 뻐근해질 지경인데, 태산은 멈추지 않았다.
“태산아.”
수연은 가파른 목소리로 태산의 이름을 불렀다. 태산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어 왔다. 샅샅이 훑으며 전부를 삼켜 버릴 것 같은 키스가 이어진다. 수연은 아랫배가 조여드는 기분에 잠시 고개를 틀고 말했다.
“이제 그만.”
“응.”
대답을 하고는 태산이 다시 입을 맞추었다. 도망도 못 가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턱으로 목으로 이어지는 키스가 사뭇 아슬아슬해질 때, 수연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만. 응?”
가까스로 입술을 뗀 태산이 수연을 바라본다. 여전히 뜨거운 시선이었다. 그래도 수연은 알았다. 자신이 멈추라 했으므로 태산이 멈출 것임을. 언제 어느 순간에도 태산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
“응.”
태산이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연의 머리를 쓸어 주는 태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힘이 풀린 수연은 태산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기대 오는 수연을 당겨 안으며 태산이 눈을 감는다. 후우, 깊게 숨을 마시는 태산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태산이 너 서울 가야지.”
수연이 고개를 들며 한 말은 ‘서울 가야지.’였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옷을 툭툭 터는 수연의 얼굴이 빨갛다. 태산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너는?”
“나? 난 집에 가려구.”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수연이 말했다. 이제껏 걸어온 방향과 반대 방향이다.
“그쪽 아닌데?”
“알아. 그러니까 산책. 이렇게 가서 저렇게. 암튼.”
수연이 고개를 돌려 버린다. 시치미를 떼며 돌아선 것과는 달리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다.
“머리.”
“응?”
“머리. 헝클어졌다고.”
태산의 말에 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태산은 수연이 팔을 올려 머리끈을 빼고 다시 묶는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가자. 데려다줄게.”
“너는?”
“나? 난 서울 가야지. 여자친구도 만나고.”
누구 분부신데. 태산이 어깨를 으쓱이자 수연은 얄밉다는 듯 살짝 눈을 흘기다 먼저 걷기 시작했다. 태산도 수연의 뒤를 따랐다. 봄날의 햇볕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