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12
12. 안개비 내리던 날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 안채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반찬이랑 국이랑 다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차리기만 하면 돼. 전골 재료는 냄비에 다 담아 놨고, 양념이랑 얹어 놨으니까 육수만 부어서. 당면이랑 파는 따로 통에 넣었으니까.”
색이 고운 등산복을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정자가 작은 가방 안으로 생수와 오이 자른 것을 넣으며 말했다. 엄마의 잔소리가 귀찮은 세호가 코밑을 쓱쓱 문지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아, 엄마, 다 안다고.”
“부침개 반죽 있으니까 부쳐 주고.”
“알아요. 어제도 말했잖어.”
“하필 손님 있을 때랑 날짜가 겹쳐선. 밥은 취사만 누르면.”
“아오. 안다구요. 밥 새로 해서 전골 올리고 반찬이랑 부침개 새로 구워서 내줄게. 튤립인지 장미인지 거기 빨리 가.”
세호가 정자의 등을 떠밀었다. 마을 청년회와 부녀회가 어른들을 모시고 매년 봄마다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이다. 돌아가며 여행을 주관하며 장소를 물색하는데, 올해가 수연 가든의 차례였다.
평소 같으면 하루 정도 가든 문을 닫아 두면 되겠지만, 올해는 장현 건설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식당 문은 닫아 일반 손님은 받지 않고, 장현 건설 사람들의 식사만 세호가 챙기기로 했다.
수연은 꽃무늬가 현란한 크로스백에 물티슈와 핸드폰, 지갑과 선글라스를 차곡차곡 넣었다. 마지막으로 립스틱과 팩트를 챙겨 넣으면서 엄마와 세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와 안 갈 수도 없고. 하필 또 올해가 우리 차례라. 얘 수연아, 엄마 핸드폰 어딨지? 어디다 뒀더라?”
정자가 옷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았다.
“여기. 내가 넣어 놨어. 그냥 메고 가면 돼.”
수연은 크로스백을 내밀며 정자에게 말했다. 정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빼놓은 것은 없는지 체크를 한다.
“떡 있고, 음료수 있고, 양갱도 넣었고. 여보, 머리고기 누른 거 받았나?”
마침 들어오는 동만에게 정자가 물었다. 동만이 떡이 든 상자를 들며 대답했다.
“회관으로 바로 가져온댔어. 세호 넌 그거 들고 따라와.”
끙 소리를 내며 세호가 음료수가 든 박스를 들었다.
“수연이는 뭐 하러 나온겨. 가서 더 자. 아부지 다녀올게. 드가서 자.”
떡 상자 때문에 손이 묶인 동만이 등으로 출입문을 밀며 수연에게 말했다. 그 뒤를 따르던 세호가 툴툴거린다.
“맨날 누나만 챙기지.”
“그럼, 먼저 챙겨야지. 세호 너두 항시 엄마랑 누나부텀 살펴야 하는겨.”
“우리 집에서 남자는 그냥 머슴이고요.”
“그렇지. 이제 뭘 좀 아는구먼.”
세호가 에혀, 혀를 차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젠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 표정이다.
“늦겠어, 수연 아빠, 빨리 와요.”
정자가 트럭의 앞자리에 올라타며 동만을 채근했다. 세호가 뒤에 박스를 올리고 탁탁 두드려 신호를 주자 부르릉 트럭의 시동이 걸렸다.
“다녀오세요.”
아직은 쌀쌀한 새벽 공기에 수연은 두 팔을 문지르며 부모님께 인사를 건넸다.
“춰. 어이 드가.”
동만이 연신 들어가라 손을 휘저었다. 아침 늦지 않게 챙겨 주고, 정자는 세호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마지막까지 뒤를 돌아보는 부모님을 싣고서 하얀 트럭이 마당을 빠져나간다.
“드디어 가셨구나아아아아. 어흐, 쌀쌀하다.”
삼선 슬리퍼에 반팔 차림인 세호가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까치집 머리에 잠이 덜 깬 눈, 촐랑거리는 몸짓. 스물여섯이니 다 큰 남자인데도 이렇게 보면 아직도 고등학생 같다. 머슴 취급을 받은 여섯 살 아래의 동생을 위해 수연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들어가서 한 시간만 더 자. 누나가 깨워 줄게.”
“그래도 돼?”
막내라 그런지 헤헤 웃는 얼굴이 천진난만했다. 장현 건설 사람들이 아침을 먹는 시간은 8시이니,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30분 전에 깨워 줄게.”
“땡큐. 누나, 나 좀만 더 잘게.”
세호가 방으로 조르르 들어갔다. 수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부모님이 없는 토요일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세호야.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치고서, 7시 40분에 수연은 세호를 깨웠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벌떡 몸을 일으킨 세호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대충 차렸어. 가서 드시라 해.”
“누나가? 나 깨우지.”
세호가 반팔 티셔츠 위로 남방 하나를 걸치며 말했다. 수연은 손에 들고 있던 야구 모자를 머리에 눌러쓰며 말했다.
“누난 잠깐 진돌이랑 나갔다 올게.”
“아침은?”
“먼저 먹었어.”
세호에게 대답을 하고 수연은 마당으로 나왔다. 수연의 손에 들린 하네스를 멀리에서도 알아본 진돌이 웡, 하고 한 번 짖으며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진돌이 누나랑 산책 갈까? 갑갑했지?”
진돌이의 집이 있는 울타리 안으로 다가가자 진돌이가 펄쩍펄쩍 뛰었다.
“누나 옷에 흙 묻히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지.”
진정시키며 머리와 등을 쓰다듬는데, 별채의 문에 열렸다.
차례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가능하면 태산이 나오기 전에 출발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 어쩌면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연은 침착하게 진돌에게 하네스를 채우고 줄을 걸었다.
“오랜만.”
뒤에서 태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줄을 손에 감고서 수연은 뒤를 돌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태산이 느릿하게 다가온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헤어진 이후, 그러니까 키스를 한 이후로 3일 만에 처음으로 마주 보는 순간이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수연이 마주치지 않으려 피해 다니기도 했지만, 태산도 굳이 다가오지 않았었다. 어쩌다 잠깐 마주칠 때면 수연은 먼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태산은 그런 수연을 덤덤히 보곤 했었다. 이렇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건, 3일 만이었다.
“산책 가려고?”
“응.”
뭐가 그렇게 좋은지 진돌이가 태산을 향해 껑충 뛰며 꼬리를 흔들었다.
“진돌, 잘 잤어?”
태산이 진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발에 묻은 흙이 태산의 티셔츠에 묻어 회색 티셔츠가 황토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침 다 됐대. 들어가서 먹어.”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만 끄덕이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난 그럼 가 볼게. 진돌아, 가자.”
수연은 진돌의 줄을 잡고 먼저 걸었다. 태산의 묵묵한 시선을 등으로 느끼면서 수연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비가 오려고 그러는지 숲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젖어서 더욱 선명한 푸른 잎들 사이로 습기가 안개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 이대로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날씨였다.
“비가 오려나?”
나 누구한테 말하니. 수연은 피식 웃었다. 진돌은 나무마다 킁킁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작게 보이는 수연 가든을 바라본다. 한참을 내려온 것 같은데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있잖아. 진돌아.”
풀에 코를 박고 있는 진돌에게 슬쩍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사실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수연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려 저만치 떨어진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숲도, 저수지도, 저 너머의 산도 물안개에 휩싸여 몽환적이다. 저 안개 같은 풍경 속에 태산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물결이 인다.
태산의 마음을 안다. 선명하고 뚜렷한 마음을.
“있잖아. 진돌아, 누나는…….”
모호하게 굴고 있는 자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안다.
“괜찮을 걸 알거든.”
마음 깊이 들이지 않은 채, 이대로 흘려보낸다 해도 괜찮을 것이다. 애매하게 웃다가 시시한 농담 몇 번 더 나누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고 또 어쩌다가 입맞춤을 하더라도.
안녕, 잘 가, 담담한 인사를 건넬 수 있을 정도로만. 시작이 없어 끝도 없는 그런 사이로만. 그저 한때 불었던 바람이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은 날들을 살아갈 정도로만.
어느 날에는 한 번씩 그때 다르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하면서, 깨고 나면 마음 아리는 꿈이라 여기면서, 그러다 어느 날에는 잊은 줄도 모르게 잊어서, 돌아보면 아득하기만 한 추억으로 남겨 놓아도.
자신도, 태산도 아마 괜찮을 것이다.
뜨고 지는 달처럼, 돌아오는 계절처럼 다른 날들이 또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꼭 태산이 아니어도, 꼭 지금이 아니어도, 생은 이어지고 그 안에는 다시 봄이, 여름이, 가을과 겨울이 있을 테니.
“비겁한 걸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달랐을까. 적당한 호감이라 크게 상처받지도 않을, 그리하여 마음 아플 일 없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겁 없이 먼저 밥을 먹자고, 커피를 마시자고, 산책을 가자고 했을까.
장태산이어서, 망설이고 있다.
휩쓸리면 안 될 거대한 파도 같아서, 빠지면 안 될 깊은 물 같아서, 도무지 가볍게 안 될 것 같아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일을 이렇게 오래오래 곱씹는다.
수연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록의 숲에 스며든 안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있는 갈래길. 이 길도 저 길도 아닌 지점에서 오래오래 망설이는 마음.
“그냥 신중한 거라고 하자.”
수연아.
기억을 넘어온 태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름처럼 더웠던 가을날, 창문의 크기만큼 노을빛이 방바닥을 비추던 시간에, 더는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이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면서 태산이 말했었다.
눈, 감아.
뺨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이던 태산도 보인다. 뜨거운 입술이 닿고 나서야 스륵 눈을 감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노을 지는 창가와 불어오던 바람까지도 이렇게나 생생했다.
저항할 수 없이 밀려오는 기억에 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와서 크게 숨을 마시고 뱉어 보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두 기억해 버리고 말았다.
* * *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강의가 제일 늦게 끝나는 날. 저녁도 못 먹고 부랴부랴 서둘러서 태은의 집으로 과외를 하러 가야 하는 날. 꼭 지금처럼 가는 안개비가 내렸었다.
정류장에서 태은의 집까지 이어진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려면 서둘러 가도 부족했는데, 그날은 유독 가기가 싫어서 수연은 전철을 두 대나 그냥 보냈다.
“가자. 가야지.”
수연은 가기 싫은 마음을 다잡고 전철을 탔다. 3호선으로 갈아타고 지하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안개비를 두 손으로 가리며 언덕을 꾸역꾸역 올라갔다.
한남동 언덕을 올라야만 나오는 태은의 집은, 그러니까 태산의 집은, 그날따라 유독 높고도 멀었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아, 수연은 가방을 열고 플라스틱 파일을 꺼냈다. 머리를 가리다가 고급 세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볼록 거울에 선 것처럼 비율이 일그러진 이수연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팔을 올려 비를 가리고 있었다. 유난히 볼품없고 초라해 보이는 건, 지난 주말 태산과 그 집에서 마주쳤기 때문일까.
장태산이 내가 알던 장태산이 아니라 그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장태은의 오빠라는 걸 알아서인가. 태산과 마주쳤던 지난 일요일의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태산과 정면으로 마주쳤던 것은 태은의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였다.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고, 먼저 내려가던 태은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했었다.
‘오빠, 왔어? 오늘은 일찍 왔네?’
허공에서 태산과 수연의 시선이 만났다. 태산의 눈이 커다래졌다.
‘수연아…….’
당황한 태산의 표정을 보았다. 놀라기만 했던 수연과 달리, 태산은 당황했다.
장태산이 왜 여기 있지. 수연의 멍한 머릿속에 빠르게 퍼즐이 맞추어졌다. 장태은, 장태산. 이름이 그렇게나 비슷했는데, 왜 바보같이 한 번도 연결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특목고를 다니는 작은오빠와 대학교를 가면서 따로 사는 큰오빠. 그 큰오빠가 태산이었다는 거지?
‘태은이 과외하러 왔어?’
잠깐 당황한 표정이었던 태산은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듯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은이 과외를 하러 왔느냐고. 자신이 태은의 과외 교사라는 것을 태산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다. 침착한 태산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오빠랑 쌤이랑 아는 사이야?’
‘학교 친구야.’
슬리퍼를 갈아 신으며 태은의 머리를 쓱 쓰다듬는 태산은, 수연이 아는 태산이 아니었다. 주말마다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하고, 후문 근처의 허름한 오피스텔에 사는, 매일 비슷한 옷차림으로 찾아오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태산이 왔니?’
수연에게 인사를 하러 나오던 태은의 어머니가 태산을 발견하고는 화사한 미소로 반겼다. 네, 어머니. 대답을 하는 태산이 낯설었다.
‘과외는 끝났지? 바래다줄게.’
태산의 말에 수연과 태산의 어머니 중 누가 더 당황했는지 모르겠는 순간이었다.
‘같은 수업 듣는 친구예요. 잠깐 데려다주고 올게요.’
태은의 어머니 얼굴에 당혹감이 비추었다. 수연은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하철역까지만 바래다줄게.’
‘아니야. 진짜 괜찮아.’
바래다주겠다는 태산을 거듭 고사하며 수연은 뒷걸음쳤었다.
그날 이후 주말 내내 태산에게서 여러 번 전화가 왔지만 전부 받지 않았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았던 태산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기분도, 마음도 정리가 되지 않았고, 그런 상태로 만나거나 통화를 하고 싶지 않아서 나중에 연락을 하겠다는 메시지만 보내 놓았었다.
“가자. 가야지. 수업은 수업이니까.”
수연은 플라스틱 파일을 높게 들어 머리를 가리고는 다시 걸었다. 이틀을 엉망으로 보냈지만, 그래도 과외는 해야 했다. 조치원 부모님이 무리해서 보내 주는 생활비로는 힘든 서울 생활에서 행운처럼 구한 과외자리기도 했지만, 한 번 맡은 이상 성심성의껏 책임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기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꾸역꾸역 걸었다.
태산은 태산이고, 수업은 수업이니까. 수연은 깊게 숨을 마시고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현관에 들어서며 인사를 하는데, 태은의, 그러니까 태산의 어머니가 물끄러미 수연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눈으로 훑고는 수연에게 말했다.
“선생님, 잠깐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평소와는 다른 묘한 적막이 흘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태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일하시는 아주머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영혜가 따라오라는 듯이 먼저 걸었다. 수연은 영혜를 따라 걸었다.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 걸려 있는 복도를 지나면, 천고가 높은 거실이 나왔다. 우아한 테두리가 둘러진 가죽 소파가 ‘ㄷ’자로 놓여 있고, 언제나 풍성한 생화가 놓여 있는 테이블이 있는 자리로 영혜가 안내를 했다.
영혜가 먼저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수연은 그 옆의 기다란 소파에 앉았다. 처음 태은의 과외를 소개받고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앉아 보고는 두 번째로 앉는 소파였다.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보았던 클래식한 테이블 위로 섬세한 꽃잎 같은 찻잔이 놓여 있었고, 같은 무늬의 작은 접시에 쿠키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금방 따라 놓았는지 맑은 오렌지빛의 홍차에서 따뜻한 김이 오르고 있었다.
“비가 좀 오나 봐요.”
영혜가 부슬부슬 젖은 수연의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네.”
수연은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대답을 했다. 맞은편 창으로 보이는 마당의 잔디도 축축하게 물을 머금고 있었다.
“따뜻할 때 드세요.”
영혜가 차를 권해서, 수연은 찻잔을 들었다. 가늘게 손이 떨려서 양손으로 감싸듯이 쥐고 천천히 한 모금을 마셨다. 한 모금을 넘기고 소서 위로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영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태산이랑 아는 사인 줄은 몰랐네요. 같은 학교인데 왜 생각도 못 했는지. 수업, 같이 듣는다고요?”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연은 마주 앉은 영혜의 손이 참 곱다는 생각을 했다. 가든 일로 마디마디가 굵어진 엄마의 손과는 다른 손이었다. 하얗고 고운 손에 정갈하게 발린 매니큐어도 예쁘고 심플한 모양의 반지도 참 예뻤다.
“다름이 아니라.”
영혜가 고운 손으로 잠깐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신 뒤에 말했다.
“태은이가 학원으로 가게 되었어요. 전부터 모시고 싶었던 선생님이 마침 시간이 된다 하셔서, 친한 친구들이랑 같이 그룹을 짰어요. 선생님이 열심히 해 주셨는데.”
태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부터 짐작했던 말이다. 영혜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고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이렇게 되어서, 미안해요. 그동안 열심히 해 주신 것도 있고, 저희 쪽 사정으로 이렇게 된 것도 있어서 과외비는 다음 달치까지 넣었어요.”
영혜가 준비해 두었던 하얀 봉투를 수연의 앞으로 밀었다. 짐작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하얀색의 봉투를 보는 순간,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상냥하게 말을 하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영혜가 한마디를 더했다.
“우리 태산이랑은 친구로 잘 지내 줘요.”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영혜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돌리니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놀라 입을 벌렸던 풍경이 눈에 보였다.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 걸려 있는 복도. 천장이 높은 커다란 거실. 그 거실 너머 10인용은 족히 되어 보이는 식탁이 놓인 가족실. 꺾어져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 주방.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했던, 수연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버린 집.
이 집에 숨을 죽이며 들어오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 공주님 방 같은 태은의 방에서 참 열심히도 수업을 했었다.
푸른 잔디가 깔린 넓고 아름다운 정원과 언제나 우아한 태은의 어머니, 손대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나오는 간식. 쌤 저 성적 오르면 엄마가 보너스 줄지도 몰라요. 그럼 우리 피자 사 먹어요. 철없는 태은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도 한편으로 기대를 했었다.
열심히 해야지, 그래서 잘리지 말아야지. 잘해서 성적도 올리고, 보너스도 받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 이수연이 보였다. 그 과외비가 탐나서 비를 맞아 가며 언덕을 올라온 바보 같은 이수연이.
나는 왜 바보같이, 먼저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왜 못 했을까. 왜 미련하게 꾸역꾸역 과외를 하겠다고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걸까.
수연은 홧홧해진 눈을 들어 영혜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문장을 위해 준비한 자리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거절할 수도 없는 명분 있는 적당한 금액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었다.
과외비 받으면 태산이랑 놀이동산 가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솟아오른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나려 했지만 수연은 참았다. 손이 덜덜 떨리려고 해서 찻잔을 힘주어 잡았다.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마른침을 삼키며 속으로 수십 번도 더 되뇌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떨지 마. 울지 마. 침착하게 말해야 해.
“저희.”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영혜가 눈을 쓱 들어 수연을 보았다. 수연은 영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서 말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여름부터 가을까지, 반짝반짝 빛나서 눈이 부셨던 태산과의 시간을 부정했다. 전부 당신의 오해라고. 걱정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라고. 나는 결백하고 당신은 틀렸다고.
“알아요. 그리고…… 믿을게요.”
그때 영혜의 표정이 어땠는지, 수연은 기억하지 못했다.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변하려 해서 있는 힘을 다해 참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침착하게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뜨거운 태풍이 휘몰아쳤다. 이수연, 미안해. 내가 다 설명할게. 제발 전화 좀 받아 줘라. 태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데.
수연은 속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그만 나 좀 사귀어 줘라, 웃으며 말하던 태산을 지우기로 한다. 우린 일주일째였을 뿐이야. 이제 막 시작이었고,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야. 어쩌면 다행인 거지. 더 깊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마음 같아선 더 드리고 싶었는데…….”
영혜가 테이블에 놓인 봉투를 한 번 더 수연의 앞으로 밀었다.
“아니에요. 이것도 감사하죠.”
태어나 처음으로 받는 모욕이 지독하게 뜨거워서 지금껏 이루어 냈던 모든 것들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마음을 굳게 다잡고 수연은 눈앞의 봉투를 들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수연은 영혜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신발을 신었다. 허둥대지 않으려 천천히 똑바로 신발을 신고서 무릎을 폈다. 흠 잡힐 만한 모습을 보여 주기는 싫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네. 안녕히 계세요.”
쿵.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수연은 여전히 참았다.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고 걸었다. 이 정도 일로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안개 같은 비를 맞으며, 넓고 푸른 정원을 건넜다.
대문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짙은 회색의 견고한 대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수연은 그 문을 열고, 다시 닫았다.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에 태산과의 모든 것이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연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을 들어 높게 솟은 대문을 바라보았다. 길게 이어진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정원수들이 아름다웠다. 그래도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게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수연은 언덕길을 내려왔다.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 * *
그렇게 울지 않기로 해 놓고 한 번씩 울컥 솟는 눈물을 삼키며 책을 보았었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중얼거리며 크게 숨을 쉬어야 했었다.
시험을 준비한다는 명목 아래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 수그리고 앉아서 견뎌 냈던 이별을 기억한다. 몸살처럼 앓았던 생의 첫 번째 이별이었다.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게 트라우마라는 거지.”
진돌이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수연을 돌아보았다. 수연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