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13
13. 봄비
“어째 비가 더 올 것 같어.”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점심을 먹으러 수연 가든 안으로 들어오던 김 반장이 머리를 쓱 털며 말했다. 오전 내내 안개 같은 비가 내리더니 점심때가 되자 투둑투둑 떨어지는 부슬비로 변했다.
“어유, 비 더 오면 나는 일 못혀. 어깻죽지가 뻑적지근한 게, 어디 가서 푹 지져야지.”
김 반장과 한 조를 이루어 일하는 성씨 아저씨가 팔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쉬어야 하지 않겠냐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쵸? 이대로면 일하기 힘들겠죠? 거봐요, 팀장님. 제가 너무 축축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마침 딱 토요일이고, 그쵸? 김 반장님하고 성씨 아저씨도 피곤하실 텐데.”
재민이 코를 쓱 훔치며 말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읽던 태산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렇게 정모가 가고 싶어?”
“아니, 정모 때문이 아니라요. 그까짓 게임 정모 하핫 그게 뭐라고. 이번 주 진짜 빡셌던 거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반장님하고 성씨 아저씨도 피곤하시다니까.”
재민이 끓고 있는 전골을 뒤적거리다 결심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가고 싶습니다. 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지금 저희 클랜이 중차대한 전쟁을 앞두고 있거든요. 지금 대회를 하는 중인데 무려 상금이 억. 1억이라구요. 저희가 지금 8연승을 하고 있는데.”
태산이 고개를 쓱 들자 재민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설명을 이었다.
“정예 멤버만 긴급하게 모이는, 저희 클랜의 미래가 걸린 정모예요. 멀지도 않아요. 저희 꽃돼지 클랜 대표가 마침 딱 청주 산다고 말씀드렸죠? 마침 오늘 오후에 만나기로 했고요, 한 시간도 안 걸리니까 내일 아침엔 충분히 복귀할 수 있거든요.”
“그려, 오늘 하루 쉬어. 대근해 죽겄어.”
태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말이라 서울로 복귀하고 남은 인원은 셋. 부슬부슬 내리는 비 정도야 맞아 가며 일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럼 이번 주는 쉬시죠.”
태산의 말에 재민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참말이여? 내일도 쉬어?”
“예. 댁에 다녀오시고 싶으시다면서요.”
“아, 나야 그냥 해 본 소리지.”
“푹 쉬시고 월요일 아침에 뵙죠.”
성씨 아저씨와 김 반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먹 불끈 쥐고 작게 아싸, 환호성을 지르는 재민을 보며 태산은 빙그레 웃었다.
“누나. 한 번만. 응?”
검지를 세우며 처량 맞은 표정으로 세호가 말했다.
“진짜 내가 진짜 가고 싶어서 그래. 내가 꽃돼지 클랜 뉴비잖아. 우리 클랜이 진짜 들어가기 힘든 덴데, 내가 진짜 간신히 들어갔는데, 우리가 지금 진짜 중요한 전쟁인데, 청주에 대표 형님이 사는데, 진짜 넘사로 잘하는데, 근데 이번에 기회 되면 같이 보자고, 재민이 형님이 같이 가자고, 진짜 내가 먼저 그런 게 아니라. 근데 누나 진짜 내가 가고 싶은데.”
수연은 한심한 눈으로 세호를 올려다보았다. 안채 주방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데 세호가 슬리퍼를 벗어 던지며 뛰어오더니 한다는 소리가 게임 정모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른 분들 식사는 어쩌고?”
“어, 그게 아저씨들은 다 내려갔다가 오신댔고, 태산이 형은 자기 신경 쓰지 말라고.”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세호가 수연의 한숨 소리를 듣고 급하게 다시 말했다.
“어, 그래서 내가 다 챙겨 놨어. 돼지고기 두루치기인데 불판에 얹어서 그대로 불에 올리면 되거든? 근데 형이 정말 괜찮댔어. 자기 나가서 간단하게 먹으면 된대. 누나 진짜, 오늘 딱 하루만.”
에휴. 수연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다녀와.”
“진짜? 진짜지?”
그놈의 진짜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나 진짜 갔다 온다?”
“어.”
“엄마 아빠한테는…….”
“저녁 먹고 치워 놓고 갔다고 할게.”
“누나 짱. 진짜 짱. 이수연 진짜 존경합니다.”
수연은 아직도 한참 어린 것만 같은 남동생을 가볍게 흘겨보았다.
“잘해라.”
“어우, 당연하지. 들어올 때 누나 좋아하는 찹쌀떡 사 올게. 약속.”
세호가 새끼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씻어야 한다며 욕실로 뛰어 들어간다. 창밖으로는 가늘게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요한 오후였다.
세호와 재민이 한 차를 타고 나갔고, 아저씨들도 모두 내려갔다. 방 안에서 낮잠이라도 자는 건지 태산은 기척이 없었고, 내리는 부슬비에 진돌이도 집에 들어앉아 하품만 하고 있었다.
틀어 놓고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TV 채널을 돌리는데, 수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반. 점심을 대충 먹었더니 속이 출출하기도 하고 입이 심심하기도 했다.
“나가 볼까.”
수연은 중얼거리며 TV를 껐다. 차를 끌고 에브리 먼데이에 내려가서 커피와 머핀을 먹을까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 먹고 싶은 건 커피도 머핀도 아니다.
비가 솔솔 오는 토요일 오후에는, 따끈따끈 갓 부쳐 가장자리가 바삭한 김치전인데. 오징어 송송 썰어 넣은 엄마표 김치전.
뭉게뭉게 떠오르는 김치전을 상상하다 수연은 몸을 일으켰다. 귀찮아서 버텨 보려 했지만 출출함이 귀찮음을 이겼다. 마침 엄마가 해 놓고 간 오징어 김치전 반죽이 있다는 것도 기꺼이 몸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였다.
“귀찮지만.”
수연은 중얼거리며 운동화를 꺾어 신었다. 가든의 부엌 큰 냉장고에 반죽이 있어 건너가야 했다. 현관문을 밀고 나와 대충 비를 가릴 목적으로 손을 올려 몇 걸음을 걷는데 별채 문이 열렸다. 얇은 외투를 팔에 걸친 태산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디 가게?”
태산의 손에 들린 차 키를 보며 수연이 물었다. 태산이 신발을 신으며 대답했다.
“출출해서. 마트나 다녀올까 하고.”
출출하다는 단어에 수연은 멈칫했다. 태산이 마트에 다녀온 사이 혼자 김치전을 홀랑 부쳐 먹을 것이냐, 마침 김치전 부치려던 참인데 너도 먹겠느냐고 물어볼 것이냐 갈등이 인다. 갈등하며 괜한 세호 탓을 했다. 세호가 있었으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이세호, 찹쌀떡 안 사 오기만 해 봐라.’
짧은 갈등 끝에 수연은 태산에게 말했다.
“김치전 부치려고 하는데, 먹을래?”
가능하다면 ‘아니. 나는 괜찮아.’라고 대답해 주렴. 수연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는지 읽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태산이 빙긋 웃으며 대답을 했다.
“김치전 좋지.”
수연은 가든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김치전 반죽을 꺼냈다. 가스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얹는데 주방 문으로 다가온 태산이 말했다.
“밖에서 부쳐 먹자.”
고개를 내밀어 홀을 보니 태산은 어느새 마루 위로 올라가 창문을 활짝 열고 창가에 붙은 테이블 밑으로 방석을 놓았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가게 안에서 제일 밝은 자리였다. 좌식 테이블마다 화구가 놓여 있어 프라이팬만 올리면 되기는 했다.
“거기서 먹자고?”
수연의 말에 태산이 마루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반죽이랑 프라이팬, 식용유면 되나?”
대충 부엌에서 몇 장 부쳐 나 조금 너 많이 나누어 주려 했는데, 이러다간 주방까지 들어올 기세다.
“대충 먹지?”
수연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태산은 씩 웃기만 했다. 커다란 사각 쟁반 위에 수저와 접시를 챙기며 수연에게 저쪽에서 해 먹자고 고갯짓을 한다.
“번거롭게.”
수연은 투덜거리면서 프라이팬과 반죽을 챙겼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태산이 앉은 자리로 향했다. 태산이 화구에 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올렸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는 달구어지기를 기다린다.
“좋다.”
태산이 팔을 뒤로 짚은 느슨한 자세로 풍경을 보며 말했다. 수연도 잠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연두색 숲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저수지 위로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안개 같은 구름이 산허리를 휘감았다. 노랗고 하얀 꽃들이 사이사이로 피어 있어 봄날의 꿈 같은 풍경이었다.
수연이 프라이팬 위로 손을 올려 열기를 가늠하자, 태산이 반죽을 휘저어 고루 섞고는 팬 위로 한 국자를 떠 넣었다. 치이익, 빗소리와 닮은 기름 소리가 난다. 태산은 국자와 수저를 이용해 반죽을 얇게 폈다.
“내가 할게.”
수연이 말리는 시늉을 하자 태산이 대답했다.
“됐어.”
“그래, 그럼.”
네가 하렴. 순순히 포기하는 수연을 보며 태산이 웃었다. 수연은 지글지글 가장자리가 끓듯이 익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수연아.”
태산은 수연을 불렀다. 빨갛게 익어 가는 김치전을 보고 있던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습기에 부스스 일어난 잔머리. 하나로 모아서 묶은 머리. 말간 얼굴. 차분한 눈동자. 네가 얼마나 예쁜지, 너는 알까. 태산은 지금의 수연을 눈에 담았다.
“왜?”
불러 놓고 말이 없자 수연이 되물었다. 사실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냥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그 예쁜 눈을 들어 나를 보아 달라는 충동.
“혹시 김형주라고 알아?”
궁색할 일은 없다고 해 놓고. 태산은 피식 웃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형주가 본다면 ‘자식, 큰소리 뻥뻥 치더니.’라며 웃을 테지.
“김형주?”
수연이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었다. 기억을 더듬는 눈동자가 먼 곳을 본다.
“우리 만났던 여름 방학 전에, 그러니까 봄에 너랑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
“어……. 알 것 같기도 하고. 공대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형주가 네가 참 예쁘다고 봄 내내 나한테 말을 했었거든.”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태산은 흐리게 웃었다. 전혀 몰랐던 이야기겠지.
“숫기가 없어서 말 한 번 못 건네고는, 나한테만 주절주절. 그러다 태은이 과외 선생님을 구하는 걸 알고는 나한테 한 번만 부탁한다고. 너를 집에 소개시켜 달라고.”
수연의 눈이 더 커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태산은 김치전을 뒤집었다.
“내가 아는 건 네 이름뿐이었는데.”
태은의 과외는 과 조교 언니가 소개시켜 준 자리였다. 가을 학기 휴학을 하겠다고 말을 했을 때, 마침 교수님께 문의가 왔는데 한번 해 보지 않겠냐고 했었다.
“그 과외는 조교 언니가 알려 준 거였는데.”
“너 부담스러워할까 봐 건너 건너 알려 달라 그랬대. 생색도 못 낼 짓을.”
수연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10년 전 태산이 자신을 마주치고도 당황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먼 산 위로 안경을 쓴, 얼굴이 하얗던 남학생이 흐리게 어른거렸다. 건너 건너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 준 누군가의 선의와 호감이 고맙게 느껴진다. 수연은 중얼거렸다.
“착하네.”
“착하지.”
태산이 수긍했다. 바삭하게 잘 익은 김치전을 접시에 올려놓고 먹기 좋게 찢어 수연의 접시 위에 올려 주며 말했다.
“먹어 봐.”
수연은 김이 오르는 김치전을 집었다. 후 불어 입에 넣으니 바삭한 가장자리가 씹힌다. 한 장을 금세 나누어 먹고 두 번째 반죽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두 번째 전이 익기를 기다리는데 태산이 불쑥 말했다.
“막걸리 있나?”
“있을걸. 냉장고에.”
태산이 냉장고를 뒤져 공주 알밤 막걸리를 꺼내 왔다. 밥공기에 한 그릇 가득 따르더니 수연에게 묻는다.
“너도?”
“조금만.”
수연에게는 반 공기를 따라 건네주고 두 번째 전을 뒤집었다. 지글지글 전이 고소하게 익어갔다. 한 장이 익을 때마다 태산은 가장자리 부분을 잘라 수연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봄비 내리는 한가로운 풍경, 지글지글 전이 익고, 달큰하고 뽀얀 막걸리가 한 잔, 두 잔. 태산이 얇게 썰린 오징어를 골라 수연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그때마다 수연은 마음이 말캉말캉 녹는 기분이 들었다.
“너도 먹어.”
수연이 말하자 태산이 답했다.
“좋아했잖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스물한 살의 태산은 파전의 오징어를 열심히도 골라 주었었다. 치킨도 보쌈도 별로라더니 흔해 빠진 오징어를 이렇게 잘 먹냐면서.
어느 날은 꽃을, 어느 날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어느 날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컵케이크를, 어느 날은 색이 고운 손수건을. 태산은 그렇게 만날 때마다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예쁜 것을 보면 네 생각이 난다면서.
오래된, 반짝이는, 어여쁜 순간들이 안개비처럼 내린다.
“그때 말이야.”
수연은 멀리 저수지를 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후회를 했던 일이 있었다.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라고 했던 거. 그거…….”
“알아.”
태산이 덤덤하게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던 거, 알고 있다고.
“다른 건 다 잊었는데, 잊을 수 있었는데.”
수연은 흐리게 웃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물들이던 즈음, 보충 수업을 하러 주말에 들렀던 태은의 집에서 태산을 마주쳤던 일도, 깜짝 놀라 바라보는데 태산이 당황하던 것도, 왠지 모를 서운함과 거리감에 바쁘다는 말로 태산을 피했던 것도, 친절해서 더 아프게 박혔던 태산 어머니의 미소도.
모두 잊었었는데.
“그때 내 목소리가 자꾸 생각이 났어.”
우리를 부정했던 것. 다정했던 네 마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 그러면서 알량한 자존심을 챙겨 보려 했던 것. 그게 왜 그렇게 마음에 남던지.
“미안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산은 연하게 웃고 있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갈비뼈 어느 즈음이 뻐근하게 벌어지는 것 같다.
돌아서는 그 순간까지도, 미치게 좋아했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좋아했었다. 수연에게는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고, 먼지 한 톨 묻히고 싶지 않았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수연에게서 3일 만에 걸려 온 전화였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어나간 자리에서 수연이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네가 태은의 오빠인 줄 몰라서 놀랐었다고 했다. 내 마음대로 너와 내가 비슷한 처지일 거라 생각을 했었다고 했다. 너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머님을 따로 뵙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 뒤의 말들은 얼음처럼 굳어진 태산에게 작살처럼 내리꽂혔다. 태은의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친구로 잘 지내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수고비로 아르바이트비의 두 배를 받았다고. 수연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뜨거운 불화살이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흐려지는데, 수연이 태산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깊이 삼켜 버린 눈이었다. 차분해서 더 슬퍼 보이는 눈으로 수연이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있잖아, 태산아. 내가 너를 계속 만나면 자꾸만 생각이 날 것 같아. 시골에서 나 좋은 대학 갔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부모님한테 미안할 것 같아.
그 순간 태산은 깨달았다. 무엇으로도 수연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수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머님이 노파심에 걱정하실까 싶어 아무 사이 아니라 말을 했다고. 우리는 원래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 앞으로도 아무 사이 아니자고.
“우리 그날이 일주일째였는데.”
마주 앉은 수연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태산은 화구의 불을 끄고 수연을 마주 보았다. 수연이 흐리게 웃었다.
마지막 순간이 아프도록 생생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별밖에 없다는, 철 지난 유행가의 가사처럼 태산이 남은 힘을 그러모아서 이별을 했던 날.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 꽉 감고 헤어질 수 없다고 우겨 보고도 싶었다. 지켜 주겠다는 철없는 약속을 하고 싶었다. 내가 더 잘하겠다고,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조금만 더, 한 달만 더, 일주일만 더, 하루만 더 나와 함께 있어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그 약속이야말로 헛된 약속이라는 것.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철부지 학생일 뿐이라는 것. 뜨겁게 끓는 마음 말고는 수연에게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것이 없고, 그 마음이 오히려 수연을 아프게 할 뿐이라는 것도.
태산은 눈앞의 수연을 오래 바라보았다.
연하고도 무심한 수연이 좋았다. 무심한 듯 새침하게 툭 던지는 농담이 좋았다. 차분한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좋았다. 부드러운 미소와 우아한 자존심이 좋았다. 이수연이 미치도록 좋았다.
미치도록 좋아서, 너무 소중해서, 그에게 수연은 곱고 고와서, 언제나 좋은 것만, 언제나 예쁜 것만, 언제나 웃음만 주고 싶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어서.
태산의 눈이 붉어졌다. 눈가가 뜨끈해지며 시야가 흐려졌다. 앞으로 수연을 보지 않고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고, 해 주고 싶었던 일들과, 해 주지 못한 일들만 자꾸 생각이 났지만.
태산은 깊게 숨을 쉬고서 힘겹게 말을 했었다.
어머니 일을 대신 사과한다고.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그러니…….
아무 사이 아니었던 우리, 아무 사이 아니자고.
“수연아.”
태산은 수연을 불렀다. 수연이 가만히 태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알아.”
붙잡지 않았던 네 마음, 다 알아. 한마디, 한마디 끊어 가며 안녕을 빌던 목소리가, 밤길 위험하다고 마지막까지 데려다주었던 발걸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위해서였다는 것. 알고 있었어.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건네던 너는 애써 웃고 있었지. 네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이.
그 후의 날들은 평범했다. 수연은 한 학기 동안 휴학계를 내고 고시 공부를 시작했고 태산은 군대를 갔다. 태산이 제대를 했을 때 수연은 졸업을 했고, 바로 발령을 받아 정신없이 바빴다. 그리고 서로를 잊었다.
그래서 수연은 알았다. 봄은 오고, 간다는 것을. 올해가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없다는 것과 잊혀질까 싶었던 일들도 잊혀지고, 잊고 싶지 않았던 일들도 자꾸만 잊게 된다는 것도.
“지난 일입니다. 다 잊었구요.”
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멜랑콜리한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다 지난 일이다. 김치전이나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프라이팬 위에서 식어 가는 김치전을 젓가락으로 찢었다.
“과연, 그럴까.”
태산이 말했다. 선선한 미소를 지으면서.
반죽이 반으로 줄었다. 배가 부른 수연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태산도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물을 따라 한 모금을 마시고는 태산이 물끄러미 수연을 보았다.
“왜?”
대답 대신 태산이 테이블을 건너왔다. 수연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가까이 다가온 태산 때문에 수연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밖에서는 투둑투둑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만 같다.
“서로 눈을 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수연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태산을 바라보았다.
“먼저 피하는 사람이 지는 걸로. 아니, 마음이 남은 걸로.”
“뭐야 그게.”
“나는 이길 자신 있는데.”
태산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너는 자신 없나 봐? 빙글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안 하겠다고 하면 질까 봐 그러는 거냐고 놀릴 테지.
“내가 이기면?”
수연이 물었다. 태산이 창밖을 보며 곰곰이 생각을 한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날 가져.”
태산의 눈이 웃고 있다. 수연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싫은데?”
헛. 태산이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참나. 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 사람이 상 치우기.”
수연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설거지도 하고 커피도 타 주기.”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수연이 전투적인 표정으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자, 태산이 쓱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눈싸움 아닌데.”
“알아.”
수연은 대답하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계속 계속 태산을 노려보았다. 왠지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웃지 말라고. 꼭 이겨 줄 테니까. 그래서 설거지를 꼭 시켜 줄 테니까.
“왜 웃어?”
수연이 노려보며 말하자 태산이 대답했다.
“귀여워서.”
“하나도 안 귀엽거든?”
“그럼 예뻐서.”
“설거지할 준비나 하시지.”
“나는 평생 이러고 있을 수도 있지.”
태산이 거리를 좁혀 오며 말했다. 수연은 조금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벽이 닿는다. 이러는 건 반칙이지. 그렇게 다가오면 나도 비겁해질 수밖에.
“어, 저기?”
수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태산이 순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허탈한 듯 말했다.
“이런.”
그리고는 담담히 패배를 인정했다.
“졌네.”
너무 순순하게 말해서 의심스럽지만, 수연은 승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상은 네가 치우는 거다.”
태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쟁반 위에 기름이 묻은 접시며 수저를 챙겨 들고는 마루를 내려간다. 수연은 무릎을 끌어안고 승자의 미소를 짓다가 깨달았다.
진 사람이 상도 치우고 설거지도 하기로.
커피도 타 주기로.
마음도 남은 것으로.
바보 같은 장태산이다.
설거지를 마친 태산이 홀로 나왔다. 수연은 카운터 앞에 놓인 커피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위잉, 자동으로 밀크 커피가 내려왔다. 다 나온 커피를 들어 태산에게 건넸다.
“땡큐.”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커다란 창문으로 스미는 빛을 제외하고는 마루의 조명도 홀의 조명도 켜지 않은 상태라 어둑어둑했다.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쯤에서 일어나야지 싶어 수연이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는데, 태산이 종이컵을 마룻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치전도 먹었고, 막걸리도 마셨고, 설거지도 했는데.”
수연이 쳐다보자 참으로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키스는 언제하지?”
수연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에 태산이 다시 한 번 묻는다.
“언제 할까?”
수연은 태산을 바라보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수연은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음에.”
“다음 언제?”
“다음, 다음에.”
수연의 대답에 태산이 빙그레 웃었다. 어둑한 공간을 가르듯 손을 뻗어 수연의 뺨에 가만히 가져다 댄다.
“지금은 안 되나.”
그렇게 말해 놓고 한마디를 더했다.
“설거지도 했는데.”
웃으면 안 되는데 수연은 피식 웃었다. 태산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가만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예고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몸이 기우는 것을 느끼며, 수연은 눈을 감았다.
장태산이 바보 같다는 것 취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