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19
19. 비 왔으면
밤은 느리고 길었다.
누가 시간을 잡아서 길게 늘이고 있는 건 아닌지, 수연은 궁금해졌지만 마주 앉은 태산이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어서 이내 무엇을 궁금해했는지 잊어버렸다.
마주 앉아서, 몸을 섞고 있다.
정확하게는 태산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땀이 밴 어깨에 머리를 대고 몸을 맞댄 상태였다. 태산이 고개를 살짝 숙여 가슴을 물었다. 오랫동안 빨려서 부어오른 정점이 다시금 뜨거워진다.
“흐응.”
입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도 힘이 빠져서 한숨처럼 나왔다. 찌릿한 감각들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반사적으로 아랫배가 움찔거리고 다리가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수연은 눈을 감았다. 둥실둥실 파도에 떠다니는 사람처럼 쾌감에 몸을 맡겨 버렸다. 표정이 어떤지, 어떤 소리가 나고 있는지, 어디까지 보여 줘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부를 내려놓은 채로 태산의 몸에 기대어 있다.
태산이 수연의 손을 들었다.
“가늘어서 부러질 것 같아.”
“있지…….”
사람 뼈가 그렇게 쉽게 부러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수연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다는 듯이 태산이 비스듬하게 웃었다. 수연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귀에 꽂아 주며 태산이 말했다.
“사람이 죽는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귀를 대고 있어서 그런지 태산의 목소리가 몸을 통해 울려 퍼진다. 깊은 동굴 속 메아리처럼 잔향이 오래 남는 목소리가 살갗으로 스몄다.
“지금이었으면 좋겠어.”
태산의 말에 수연이 피식 웃었다. 웃다가도 힘이 드는지 고개를 다시 태산의 목덜미에 묻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태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코를 박고 있고 싶은 수연의 체취 때문인지, 으스러질까 걱정이 되면서도 놓을 수 없는 연한 몸 때문이지, 아주 오래전에 들어와 깊숙이 박혀 버린 수연의 눈동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완전하다는 것.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완전한 순간은 생을 통틀어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
“나는…….”
수연이 느리게 말했다.
“우리가.”
수연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 라는 단어에 태산은 목울대까지 뻐근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지금…….”
수연이 목덜미에 묻었던 머리를 들었다. 잠깐 흐리게 웃고는, 태산의 눈을 보며 말했다.
“헤어졌으면 좋겠어.”
찰나의 순간을 박제한 채로, 영원히 미완으로 남기를.
너는 나를 갖고, 나는 너를 가진 이대로 남겨지기를. 사랑의 고되고 힘든 부분은 건너뛰기를. 남루한 삶의 흔적들로 얼룩이 지지 않기를.
수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태산이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어루만지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울면 더 예쁘지?”
태산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서로를 안게 되는 순간 이런 마음이 들까 봐 스무 살 어린 나이에도 막연히 무서웠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해 볼걸.
“그때 그냥 할걸 그랬어. 그랬으면 너를 다시 봐도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그 말에 태산이 헛웃음을 웃었다.
“수연아.”
“응.”
“그때 우리가 끝까지 갔으면 난 너 못 놨어. 호적 파서 나올 테니까 헤어지지 말자고 질질 짜면서 매달렸을걸.”
울면서 붙잡는 태산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왜 이런 순간에 농담이 하고 싶은 건지. 수연은 스스로가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한 번만 더 하자고?”
태산은 소리가 나게 웃었다. 수연의 농담이 좋고, 수연의 웃는 눈이 좋아서 허리를 다잡았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멈추었던 행위를 다시 시작했다. 수연도 나름 애를 썼지만 시원치 않은지, 태산이 수연의 허리를 잡고서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하으읏.”
주저앉혀질 때마다 깊게 꿰뚫려지는 느낌에 수연은 태산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아무래도 움직임에 한계가 있어, 태산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수연을 침대에 눕혔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눈물이 흘렀던 뺨을 쓸어 주고는 태산은 허리를 세웠다. 자신의 분신을 수연의 몸 안으로 밀어 넣으며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닿은 부분이 번들거린다. 뜨겁게 달궈진 태산의 몸이 수연을 들쑤셨다. 달뜬 얼굴의 수연은 쌕쌕 숨을 몰아쉬며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태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간 용암 속에 빠지면 이럴까. 재도 남기지 않고 전부를 집어삼키는 용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온몸이 시뻘건 쇳물이 들끓는 용광로가 된 기분이다.
이것이 쾌감인지, 갈증인지 불분명했다. 그저 수연의 전부를 갖고 싶었다. 이수연에게 장태산을 새기고 싶었다. 끓는 쇳물에 눈이 뜨거워지고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태산은 멈추지 않았다.
이수연에게 장태산을, 장태산에게 이수연을 새길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못하게 휘몰아쳐서 담담한 목소리를, 차분한 눈빛을, 무심한 표정들을 산산이 깨트리고, 수연의 영혼에 장태산을 새겨 넣을 것이다.
수연이 붉은 울음을 흐느껴 울 때까지, 태산은 수연을 놓지 않았다.
* * *
수연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방문 너머 보이는 식탁에 태산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태산이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보다 수연을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흐리게 눈을 뜨고 있는 수연을 보고는 빙그레 웃는다.
방이 환하게 밝아질 정도로 오래 잤다는 것과 태산과 함께 있다는 것. 그 외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푸른 새벽에 태산을 다시 한 번 받아들였던 기억은 난다. 고개를 꺾으며 동이 터 오는 창을 보았던 것까지가 기억의 마지막이다.
“물 마실래?”
수연은 대답할 기운도 없어 눈만 감았다 떴다. 태산이 물컵을 가져와 수연의 상체를 살짝 일으키고는 입에 대 주었다. 시원한 물이 식도에서 내장으로 차가운 길을 그리며 내려갔다.
수연은 다시 침대로 몸을 묻었다. 물에 가라앉는 납처럼 몸이 무거웠다. 엎드린 수연의 등에 차가운 입술이 닿는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척추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짐승.”
수연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등에 입술을 대고서 태산이 쿡 웃었다. 수연은 자신이 저질 체력인지, 태산이 강철 체력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도 못 뜰 정도로 지친 자신과 대조적으로 태산은 힘이 넘쳤다.
“눈 좀 뜨시죠. 아침 먹게.”
수연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태산이 수연의 몸을 일으켰다. 벗은 어깨로 시트가 흘러내렸다. 붉은 흔적이 남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태산이 물끄러미 보며 갈등을 하다가 정말 큰 결심을 하는 표정으로 다시 시트를 어깨에 둘러 주었다.
바람이 들지 않게 꼭꼭 여며 준 뒤에 주방으로 가서 트레이를 들고 왔다. 어디에서 구한 건지 모르겠는 따뜻한 죽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
“밖에서 사 왔어?”
“아주머니한테 부탁했지.”
“라면도 괜찮은데.”
“내가 아침에 다 먹었거든.”
부지런도 하시지. 수연은 피식 웃었다.
“따뜻할 때 먹어.”
“귀찮아.”
수연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대로 고꾸라져서 조금 더 자고 싶다. 바닥나 버린 에너지를 다시 채울 기력도 없었다.
“그럼 먹여 줄게. 아.”
태산이 죽을 뜨더니 숟가락를 들고 말했다. 수연은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보려다가 숟가락을 들기도 귀찮아서 아, 하고 입만 벌렸다. 따끈하게 속을 데워 주는 죽을 느리게 입안에서 굴리는데 태산이 다시 말했다.
“한 번 더, 아.”
“아.”
입을 벌려 죽을 받아먹으며 수연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조차 뜨고 있기가 무거워서 감아 버렸다. 눈을 감았는데도 태산이 웃는 것이 느껴진다. 감긴 눈을 엄지손가락으로 훑듯이 만지면서 태산이 말했다.
“어미 새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당신은 인간입니다.”
수연의 냉정한 말에 태산이 윽, 하고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이수연으로 돌아온 건가.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아.”
“저는 팔이 있고요.”
수연은 시트 밖으로 팔을 꺼냈다. 멀쩡한 팔을 두고 아, 라니. 소꿉놀이도 이만하면 됐다. 수연은 귀찮지만 숟가락을 들었다. 잘게 다진 버섯과 소고기가 들어간 죽을 천천히 떠먹었다.
“물김치도 먹어.”
“넌 더 안 먹어도 돼?”
“아까 빵도 하나 뜯어서 먹었어. 그래도 배가 안 부르긴 해. 열량 소모를 해서 그런가.”
나는 진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데, 누구는 고작 열량 소모라니. 어젯밤보다 더 건강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수연은 숟가락을 물고서 태산을 바라보았다. 태산이 싱긋 웃더니 수연에게 말했다.
“먹고 나가자.”
“어딜?”
“동학사.”
“동학사?”
수연의 물음에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춘마곡은 머니까, 동학사라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조치원 살면서 그것도 모르냐며 태산이 말했다.
“춘마곡 추갑사 몰라?”
“몰라.”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 그런 말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이런. 부지런히 다녀야겠네.”
태산의 말에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난 침대가 좋은걸.”
태산이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는 오, 하고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진작 말을 하지.”
“그런 거 아니고.”
음흉한 미소를 짓는 태산이 얄미워, 수연은 태산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많이 힘들었어?”
태산이 수연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 물었다.
“조금.”
이번엔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간지러워.”
“예뻐.”
“뭐야 그게. 간지럽다고.”
“예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수연은 밉지 않게 태산을 흘겨보았다. 태산이 트레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수연이 두르고 있는 시트를 벗겨 냈다. 쌀랑한 공기가 어깨에 닿는다 생각한 순간 태산의 따뜻한 입술이 먼저 닿았다.
“동학사는?”
태산이 수연을 몸을 눕히며 대답했다.
“이따가.”
태산이 다가왔다. 수연은 눈을 감았다.
결국 동학사는 가지 못했다. 퇴실 시간이 다 되도록 방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리스로 가야겠지?”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산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어젯밤 수연의 차를 세워 둔 곳을 목적지로 잡았다. 그리스에 하룻밤 주차를 부탁하며 사 놓고 뒷자리에 던져 놓았던 머핀 박스가 보였다. 태산은 팔을 뻗어 박스를 잡아 수연에게 건넸다.
“선물. 점심은 올라가는 길에 먹자.”
“고마워.”
수연은 머핀 박스를 열었다. 죽을 먹고는 먹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봉긋하게 솟은 머핀을 먹기 좋은 크기로 나눠 태산에게 먼저 내밀고, 자신의 입에도 넣었다. 달콤하고 포근한 머핀이 입에서 사르륵 녹았다.
“날씨 좋다.”
차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이 따뜻해서 태산은 창문을 조금 내렸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 잎이 돋고 있었다. 도로의 가장자리마다 고운 꽃잎이 쌓였다가, 차가 지나가며 바람을 일으키면 꽃잎이 춤을 추듯 흩날렸다.
“산이 연두색이다.”
수연의 말대로 신록의 계절이었다. 초록의 가지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부드러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서울에는 잘 다녀왔어?”
수연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은이는 잘 있어?”
오래전 짧게 가르쳤던 학생이라서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리가 무척 길었고, 명랑하고 웃음이 많았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빵집 차려 놓고 고생이 많아.”
“빵집을 차려? 그 중학생 태은이가?”
“중학생은 무슨. 스물여섯 살이야.”
“와. 벌써 그렇게 컸어?”
수연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태산이 부드럽게 웃으며 차선을 바꾸려고 방향 지시등을 켰다. 그 소리에 수연은 지난밤,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달칵 달칵 소리를 떠올렸다.
“어디 다녀오던 길이었어?”
“아버지 산소.”
그러고 보니 슈트를 입은 태산은 처음 봤다. 늘 캐주얼한 차림이거나 현장의 작업복 차림이었는데, 어젯밤 바람을 몰고서 나타난 태산은 슈트 차림이었다.
“아버지한테 한탄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전화가 와서 좀 놀랐지.”
“무슨 한탄?”
수연이 묻자 태산이 잠시 수연을 보았다. 그리고 매끄럽게 웃으며 대답을 한다.
“이수연이 느리다고. 아버지 아들 기다리다가 속 터지겠다고.”
화창한 날씨의 일요일 점심. 반대편 차선은 봄나들이를 나온 차들로 가득했다. 수연은 꼬리를 무는 차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효과 있을 줄 알았으면, 로또 번호 가르쳐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농담처럼 태산이 말했다. 수연도 잠시 웃었다.
“군대 있을 때 돌아가셨거든. 소식 들었을 땐 이미 돌아가셨을 때여서 마지막 인사도 못 드렸어. 휴가 나갔을 때 복귀하겠다고 인사드린 게 마지막이야.”
그래서 가끔 혼자 들렀다.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 때나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싶을 때. 태산은 아버지를 찾아갔었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말해 주셨을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을 하면서 10년을 지나 왔다.
“입대할 때만 해도 어른이 되면, 한 번은 너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나이가 되면,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면 수연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못다 한 그 마음, 다시 이어서 만나자는 말을 하고 싶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이별의 아픔 따위는 흔적도 없이 덮어 버렸다. 혼자 남아 자꾸만 무너지려는 어머니를 틈틈이 일으켜 세우는 것도 태산의 몫이었다.
그날들 속에서 태산은 빠르게 가닥을 잡아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방황조차 부모의 그늘에서 누릴 수 있었던 사치였다는 것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깨달았다.
제대를 하고는 토목으로 전공을 바꾸고 빡빡하게 수업을 들었다. 졸업 후에는 고민 없이 장현 기술사 사무소에 입사를 했다. 3년차가 되던 해,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을 통으로 쏟아부어 작은아버지와 함께 장현 건설을 만들었다.
한 번씩 수연이 생각날 때면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면서,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잊고서 그렇게 살았다.
경치 구경을 하면서 느릿느릿 운전했는데도 어느새 세종시가 보였다. 머핀으로 허기가 달래지지 않은 태산은 주변을 훑어보며 말했다.
“점심은.”
“쌀국수.”
수연이 답했다. 정윤과 한 번씩 갔던 메콩 타이의 쌀국수가 갑자기 간절해졌다. 속이 풀리는 따끈한 국물을 먹고 싶었다. 태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쌀국수.”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해장이 필요해.”
태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취했구나?”
“조용히 해 줄래?”
면박을 줄 때조차 수연의 차분한 목소리가 좋아서, 한심하게 보는 눈매도 예뻐서 태산은 자꾸만 웃었다.
따끈한 쌀국수와 나시고랭를 점심으로 먹고, 다시 출발했다. 세종에서 조치원으로 올라오는 1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그리스에 들렀다. 주차장 한쪽에 얌전히 서 있는 수연의 차를 확인하고 커피 두 잔을 시켜 뒷마당의 한갓진 자리에 앉았다.
“어떡하지?”
커피를 절반쯤 마셨을 때, 맞은편에 앉은 태산이 말했다.
“왜?”
무슨 일인가 싶어 수연이 바라보자, 태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헤어지기 싫어서.”
참 나. 수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몇십 분 차이로 수연 가든에 들어갈 텐데.
“나 출발하고 한 30분쯤 있다가 와.”
혹시 모를 의심을 방지하기 위해 수연은 태산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얼마 전 태산이 자신의 차를 졸졸 뒤따라 오던 생각이 난다. 한쪽 팔을 창턱에 걸치고서 여유 넘치는 얼굴로 느긋하게도 쫓아왔었지.
“얄미워.”
수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태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 뒤에서 운전하지 마.”
“흐음.”
“베스트 드라이버 되고 말 거야.”
수연의 말에 태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시든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다 커피잔을 들고 수연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저리 가.”
“뒤에서 운전 안 할게.”
무슨 소리를 하려고. 수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자 태산이 말을 이었다.
“베스트 드라이버 될 때까지 응원도 하고.”
당연하지, 라는 표정의 수연에게 태산이 말했다.
“뽀뽀 한 번만 해 줘라.”
이 무슨……. 수연은 상체를 뒤로 물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태산을 보았다.
“그럼 키스.”
참나. 수연이 어이없어하자 태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섹스?”
으아. 수연은 황급히 태산의 입을 막았다. 입을 막은 자신의 손 위에서 태산의 눈이 휘어지도록 웃고 있다.
“망측하게.”
수연의 말에 태산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망측이라는 단어를 얼마 만에 듣는 건지 모르겠다. 저 빈티지한 단어 선택이라니. 수연이 귀여워 양손으로 수연의 얼굴을 잡아당기면서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야.”
수연이 기겁하는 것도 귀엽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무도 안 봐.”
“나 집에 갈래.”
수연이 일어서는 척을 했다.
“알았어. 안 할게. 30분만 더 있자.”
태산의 말에 눈을 흘기던 수연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태산이 의자를 움직여 아예 수연 쪽으로 돌아앉았다. 턱을 괴고 수연을 보았다.
빤한 눈빛에 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엔 외면을 하다 나중에는 태산의 얼굴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그래도 자꾸 돌아오는 시선에 마지막에는 수연이 손을 들어 태산의 눈을 가렸다.
“비 왔으면 좋겠다.”
눈이 가려진 채로 태산이 말했다.
“너랑 동학사도 가고, 커피도 마시게.”
“…….”
태산이 수연의 팔을 잡아 자신의 눈을 가린 손을 벌렸다. 서서히 드러나는 태산의 눈동자에 수연의 모습이 비쳤다.
“매일매일 비 왔으면.”
수연은 뭔가 무심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아니면 웃긴 대답도 좋았다. 새침한 대답이라도 괜찮았다. 그런데 태산의 눈빛이 너무 짙어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수연아.”
“응.”
태산이 수연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댄 채로 뚜렷한 눈동자로 수연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리는 동안 오래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가자. 이러다 정말 늦겠다.”
손등에 화인 같은 입맞춤을 남기고 태산이 말했다. 왜인지 마음이 먹먹해진 수연은 그저 응, 하는 대답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