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2
2. 흥복 저수지
국도변 가로수에 연초록 싹이 돋았다. 길을 따라 노랗게 피어난 개나리가 보이고, 멀리 산등성이에는 연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태산은 핸들을 살짝 돌리며 차창을 내렸다. 이른 봄날,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초록색 이정표에 조치원이라는 세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핸드폰의 내비게이션 화면이 사라지더니 전화벨이 울렸다.
[사장님]화면 위의 세 글자를 보는 태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대시보드의 시계를 보니 10시 39분.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다가 굳게 마음먹고 전화를 걸었을 작은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그린 듯 생생했다.
그렇다면 순순히 받아 줄 순 없지. 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태산은 웃음기 쏙 빠진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 장 팀자앙.
정색을 하는 태산의 목소리에 현기가 말꼬리를 늘이며 콧소리를 섞어 태산을 불렀다. 태산은 짐짓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러시깁니까. 진짜. 저 아산 현장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간 지…….”
태산은 대시보드의 시계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열 시간도 안 됐다고요. 숨도 돌리기 전에 휴가 취소라니요.”
아산만 방조제 보수 공사에 투입되어 한 달이 넘도록 현장에서 강행군을 했었다. 공사의 규모도 큰 데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현장의 특성상 한 달간 주말도 없이 일을 했다.
현장을 마무리 짓고, 서울에 입성한 시간이 저녁 8시. 마무리해야 하는 보고서까지 끝내 놓고 나니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단내 풀풀 풍기며 침대에 털썩 누운 게 기억의 마지막이다.
“사장님 출국하시기 전에 뭐라고 하셨어요. 장 팀장 4년 만에 갖는 휴가라고,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죠? 천지가 개벽해도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꼴랑 일주일 쉬는데 그걸 방해해야겠냐고, 절대 번복 없으니 이번에는 진짜 푸우우욱 쉬라고.”
4년 동안 휴가를 줬다 뺏다를 번복했던 장본인이, 온 직원 앞에서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치며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번엔 장 팀장 휴가를 꼭 주겠노라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 철석같이 믿어서 저 어제 새벽까지 야근했습니다. 씻지도 못 하고 침대에서 기절하면서 그래도 내일은 휴가니까 푹 자야지 했는데에.”
다낭의 리조트에서 핸드폰을 쥐고 안절부절못할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태산은 말꼬리를 늘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라뇨. 그것도 치사하게 정 이사님 시켜서.”
어찌나 급한 목소리로 당장 세종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을 하던지, 큰일이 난 줄 알고 잠이 번쩍 깨고 말았다.
– 어어, 그건 오해다. 나는 절대 너한테 전화를 하라고 시킨 적이 없어. 가능한 빨리 내려갈 수 있는, 나를 대신해서 현장을 지휘할 만한 능력이 되는, 책임감 있고 믿을 만한 그런 사람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는데 정 이사 그 사람이 하필 너한테 전화를 했지 뭐냐.
능청스럽게 말하는 현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산은 피시식 웃었다. 이제 엣헴 뒷짐을 지고는 적반하장 큰소리를 치시겠지. 매년 휴가를 주었다 철회할 때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였다.
– 아 그럼 내가 누굴 보내겠어. 이번 달에 와이프 복직한다고 애 봐야 한다는 구 과장을 보내겠어, 이제 막 입사해서 보고서도 제대로 못 쓰는 철우를 보내겠어.
“정 이사님 계시잖아요.”
– 정 이사느은, 인마, 나랑 동기잖냐. 나이가 환갑인 사람한테 막노동을 하라고 어찌 시켜. 내려가면 전부 자기 농어촌공사 다닐 때 한참 아래였던 후배들이 줄줄이 서 있을 텐데, 거기다 대고 굽실굽실 어떻게 하냐고.
흠. 이제 남은 레퍼토리는 하나다. 가족과 투자자 레퍼토리.
“그리고 말이야 삼촌이 조카한테 이 정도 부탁도 못 하나. 너랑 내가 이 ‘장현 종합 건설’을 어떻게 만들었는데. 직원 세 명 있던 코딱지만 한 사무소를 우리가 어떻게 키웠는데. 인마, 그러고 보니 이게 내 회사냐? 어? 나만의 회사냐고. 절반은 네 회사야. 네가 돈 싸들고 와서 투자한다 했잖아. 자기 회사 일을 자기가 해야지, 그럼 누가 해?
멀리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태산은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주변을 보았다. 온통 산과 들이던 풍경에 건물이 들어섰다.
“급할 때만 투자자 운운하시더라. 평소엔 월급 주는 막노동꾼으로 부리시면서.”
– 어허. 장 팀장. 장태산이. 이보게, 조카.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이러기야 정말?
“조카라고 너무 부려 먹으신다는 생각은 안 드시고요?”
태산은 신호등을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핸드폰의 화면에 내비게이션을 띄웠다. 흥복 저수지로 가려면 조치원 시내를 지나 샛길로 빠져야 했다. 핸드폰 안에서는 여전히 현기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 나라고 부려 먹고 싶어서 부려 먹겠어. 어떡해 그럼. 충남 지사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한 번만 도와 달라고 아주 애걸복걸 난리도 아닌데. 물난리가 났다잖아. 아주 콸콸콸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 생중계가 되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는데.
저수지 보강 공사의 한 종류인 그라우팅 공사의 경우 규모에 따라 공개 입찰로 진행을 하거나, 수의 계약을 통해 맡기는 것이 보통의 관례이다. 지사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 선배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선배님만 믿는다고, 제발 한 번만 도와 달라고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을.
한 음 한 음 끊어 강조하는 현기의 말을 끊고 태산이 물었다.
“그래서 언제 들어오실 건데요?”
– 오늘 저녁 비행기야. 내일 아침까지 갈게.
대답하는 현기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작은어머님은 괜찮으시겠어요? 며칠 안 남았는데 마저 쉬시다 오시죠. 그때까진 제가 어떻게 해 볼게요.”
충남에서 활동하던 ‘장현 기술사 사무소’가 ‘한경 엔지니어링’을 인수하며 서울에 기반을 둔 ‘장현 종합 건설’로 성장한 지 7년.
사장인 현기가 직접 현장을 지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보통은 팀장인 태산이나 과장인 동식이 현장을 지휘하고 사장인 현기는 오가며 감수를 보는 정도가 보통이었다.
– 내가 가야지. 송주민이 직접 전화까지 했는데.
“그래도 작은어머님 환갑 기념 가족 여행인데.”
– 그래서 내가 없는 시간 쪼개서 발리인지 세부인지 여기 와 있잖아. 뭔 놈의 환갑 기념 여행에 골프를 한 번 못 치냐.
아파트를 지나고 외곽으로 접어드니 길이 2차선으로 좁아졌다. 마을길을 따라 과수원 표지판이 자주 보이고 지붕에 주황색 슬레이트를 얹은 주택들도 보였다.
전방에 과속 방지 턱이 보여 태산은 속력을 줄이며 현기를 불렀다. 오류는 정정해야 하니까.
“사장님.”
– 어. 그래.
“다낭입니다.”
– 그러냐?
머쓱하게 되물은 현기가 에헴 기침을 하더니 태산에게 말했다.
– 아무튼, 내일 도착하는 대로 조치원으로 내려갈게.
“그럼 전 내일 저녁에 다시 서울 갑니다? 휴가 남은 거 맞죠?”
– 마. 나도 나이가 60이다. 나도 좀 편하게 살아 보자. 사장이 어? 직원 대신 일하면, 어? 그게 무슨 사장이냐?
작은 초등학교와 빨강 파랑 지붕을 얹은 주택들도 스쳐 간다. 시골 마을길을 천천히 지나며 태산은 창문을 조금 더 내려 창턱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숙모가 토라지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작은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만 들어가세요. 숙모님 기다리시겠다.”
– 제일 김 사장도 출발했으니까 점심쯤엔 도착할 거야.
“옙.”
충남 쪽의 현장을 맡게 되면 1순위로 섭외하는 장비 기사님과 인부들까지 섭외가 끝났다. 오전에 현장을 확인하고 오후쯤엔 세팅을 마쳐야 할 테니 서둘러야겠다.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오시구요.”
– 그래, 내일 보자.
삼촌과의 통화를 끝낸 태산은 화면의 내비게이션을 흘깃 보았다. 지도 위 붉게 뻗은 길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한적한 샛길을 지나는 차는 태산의 차 한 대뿐이었다.
스치는 풍경에 마음은 여유로워진다. 이런 맛에 현장으로 도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태산은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갈래 길을 지나 크게 굽은 코너를 돌자 물비늘이 반짝이는 저수지가 나왔다. 규모가 큰 저수지였다.
태산은 저수지 변의 폭넓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굽이굽이 저수지를 둘러싼 길을 따라 벚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붉은 손톱 같은 꽃망울도 가지마다 맺혀 있어, 며칠 후면 활짝 열릴 벚꽃 길을 어렵지 않게 그려 볼 수 있었다.
저수지의 둘레를 따라 데크로 만들어 놓은 산책로가 있었다. 태산은 아직은 차가운 4월의 공기를 마시며 데크의 계단을 올랐다. 난간을 짚고 서서 저수지 전체를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저수지였다. 고요한 저수지를 한참 바라보던 태산의 눈이 먼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가늘어졌다.
“조치원이라.”
세상에는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사람을 소환하는 주문 같은 단어가 존재한다. 그것은 노래의 한 구절일 수도 있고, 숫자의 조합일 수도 있다. 태산에게는 조치원이라는 지명이 그러했다.
이수연.
살면서 어쩌다 한 번씩, 국도 변의 이정표를 보았을 때나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DJ가 조치원에서 온 사연입니다, 라고 말을 했을 때. 마트 한편에 쌓인 복숭아 박스에서 조치원 복숭아라는 굵은 글씨를 읽었을 때. 수연이라는 이름은 한 번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켜켜이 쌓인 종이 박스와 그 박스 위에 쓰여 있던 ‘조치원 복숭아’라는 글자. 복숭아 단내가 코끝을 맴돌던 작은 방.
‘누가 조치원에서 복숭아 농장이라도 하는 거야?’
경솔하게 물었던 말에 돌아온 차분한 대답.
‘응. 우리 집이 조치원에서 과수원 해.’
‘아……. 그렇구나. 조치원.’
조치원이라는 곳이 대한민국의 어디쯤인지 가늠을 하려는 듯 지리적인 지식을 더듬어 보는 태산에게 수연이 말했었다.
‘천안 대전 사이.’
너무 많아 다 먹을 수 없다며 한 아름 안겨 준 복숭아를 들고 돌아오던 길, 천안과 대전의 중간쯤에 있다는 조치원이라는 지명은 이수연의 고향으로 태산의 가슴에 쿡 박혔다. 그리고 조치원이라는 지명처럼 남겨진 기억들이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혜화역의 플랫폼과 노을이 지던 창가. 여름의 숲과 쏴아아 불어오던 바람. 숨결이 마주 닿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순간과.
‘네가 장태산이니?’
조금은 낮고 건조했던 목소리가.
기억의 끝에서 태산은 흐리게 미소 지었다. 저기 멀리 보이는 과수원이 수연의 집일 수도 있을까. 어쩌면 길을 가다 한 번쯤 마주칠 수 있으려나.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되면 반갑다고 악수를 청해 볼까. 나를 기억이나 하려나.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는 것은 잘 안다. 군대 제대 후, 수연이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학교 어디엔가 걸린 현수막으로 본 것이 마지막이다. 그게 8년을 훌쩍 넘긴 일이니, 이제 수연의 본가는 조치원에 없을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 본가가 조치원에 남아 있다 해도 이 넓은 조치원 땅이 전부 이수연네 집도 아니고, 무엇보다 청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이수연을 조치원 중심가도 아닌 흥복 저수지에서 마주칠 리가 없었다.
서른둘이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쯤 수연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바람대로 선이 고운 선비 같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으려나. 아이도 있을까. 수연이라면 왠지 예쁜 딸을 낳았을 것 같은 생각에 태산은 희미하게 웃었다.
고요한 저수지를 앞에 두어서인지 상념이 길어져 버렸다. 어디서 누구와 함께하든 이수연은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세월 많이 흘렀네.”
태산은 으랏차 기지개를 켜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멀리 하늘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고 있는 새 한 마리를 바라보며 크게 숨을 쉬었다. 뜻하지 않게 떠올려 버린 대학 시절을 툭툭 털고 내려와 차를 향해 성큼 걸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제일 건설에서 보내온 주소를 입력하자 마을 회관이 뜬다. 태산은 옹기종기 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을 향해 차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