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20
20. 아까워서요
낫에 발을 베인 성씨 아저씨를 대신해서 황씨 아저씨가 왔다는 것을 빼면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수연 가든이었다. 장현 건설의 사람들은 늘 그렇듯 8시쯤 아침밥을 먹으러 별채에서 가든으로 건너오고, 12시에는 점심을, 6시에는 저녁을 먹으러 올라왔다.
날씨가 포근해져서인지 평일에도 매운탕을 먹으러 올라오는 손님들이 늘었고, 근처의 카페나 산책로에도 사람들이 는 정도. 그 정도의 변화만 눈에 보였다.
수연은 오후 2시면 산책을 나섰다. 점심을 차리는 엄마와 세호를 돕고, 느지막한 점심을 먹은 다음 모자를 눌러쓴 뒤 운동화를 신는다.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산책인 줄 알고 펄쩍펄쩍 뛰는 진돌이에게 하네스를 채우고 볕이 따뜻한 길을 걸어 내려갔다. 집 앞의 길을 따라 느티나무까지 내려간다. 평소 같으면 느티나무를 지나 쭉 뻗은 마을길을 걸었겠지만, 왼쪽으로 꺾어 저수지 둘레의 도로로 향했다.
도로를 따라 20분쯤 걷다 보면,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메시지가 왔다며 작게 울렸다.
[출발]수연은 작게 미소를 짓고 진돌이를 불렀다.
“진돌아.”
진돌이 고개를 돌려 수연을 올려다보았다.
“형아 온대.”
며칠 태산의 차를 얻어 탔다고 그새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태산의 차를 타면 툭 던져주는 닭가슴살 육포를 기억하는 것인지, 진돌이 걸음을 멈추고 도로 쪽을 보며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웡!”
진돌이 크게 한 번 짖으면, 어김없이 태산의 SUV가 미끄러지듯 길을 따라 내려온다. 진돌이의 꼬리가 빠르게 움직이는 와이퍼처럼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수연은 조금 부끄러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진돌이는 꼬리를 붕붕 흔들고 침을 뚝뚝 흘리면서 태산을 반기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그래서인지 태산의 차가 수연의 앞에 서면, 마음과는 다른 덤덤한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왔어?”
“응.”
뒷좌석 문을 열고 진돌이를 먼저 태운 뒤, 조수석에 타면 태산이 자신을 참으로 빤히도 보고 있었다. 흠흠, 잠깐 목을 가다듬으며 수연이 앞만 보고 있으면 태산은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본다.
“진돌이, 형아 기다렸어?”
“웡!”
“형아도 진돌이 보고 싶었는데.”
“웡!”
“형아가 맛있는 커피 사 줄게. 가자.”
대체 진돌이에게 하는 말인지, 이수연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을 하는 태산이다. 그런 태산을 흘깃 보면, 태산은 씩 웃으며 수연에게 말했다.
“잘 잤어?”
오후 늦게 나누는 아침 인사를 하고,
“이제야 마음 놓고 보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수연은 태산과 진돌이 비슷한가 잠시 생각도 했다. 눈빛과 표정에서 심지어는 자세에서도 숨기지 않는 마음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아까도 봤거든?”
무심하게 말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태산이 말없이 웃으며 운전을 한다. 신록이 빛나는 저수지 가로수를 따라 몇 분을 더 가다 보면, 에브리 먼데이가 나왔다.
얼마 전에 끙끙거리며 내려왔을 땐 한없이 길어 보이던 길인데, 이렇게 태산과 함께 가면 짧고도 짧아서 같은 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태산이 쓱, 주차를 한다. 앞으로 쭉 나가서 뒤로 한 번에 들어가는 모습은 여전히 신기했다. 후방 카메라가 비추는 화면도 안 보면서 사이드 미러만 쓱 보고서 어떻게 저렇게 하는 건지.
“흠. 진돌아, 누나도 금방 저렇게 할 거다?”
태산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 쪽으로 돌아오는 동안 수연은 진돌에게 작게 속삭였다.
“누난 유튜브 보면서 공부할 거야.”
진돌은 그러거나 말거나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헥헥 태산의 쪽을 보고 있다. 태산이 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면서 끙끙거리면서 빙글빙글 돈다.
태산이 뒷좌석 문을 열자 진돌이 뛰어내렸다. 수연도 차에서 내렸다. 진돌과 함께 앉아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야외 데크 자리에 자리를 잡고서 바로 옆에 있는 가로등 기둥에 진돌의 끈을 묶었다.
“주문하고 올게. 진돌이는 이거.”
하얀 개껌을 앞에 놓아 주고는 태산이 에브리 먼데이 안으로 들어간다. 진돌이가 껌을 물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빙글빙글 돌더니 뒤돌아 앉아 껌을 앞발로 꼭 붙잡고 이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달라진 것은 이 정도. 매일 커피를 사러 내려오는 태산과 잠깐 만나 커피 반 잔을 마실 만큼의 시간을 보내는 정도이다.
“커피 배달이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수연의 앞에 놓아 주며 태산이 옆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수연은 잠시 풍경을 즐기며 커피를 마셨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맞는다. 옆에선 진돌이가 야무지게 개껌을 물어뜯는 한가로운 오후의 시간.
“날씨 좋다.”
태산이 말하면,
“그러게.”
수연이 대답을 하고.
“커피 맛있네.”
수연이 말하면,
“응.”
태산이 대답을 했다.
저수지의 물결이 반짝이며 햇살을 반사하고 그 위를 유유히 지나는 오리 떼가 보인다. 하늘이 무심하게도 맑았다. 당분간 비 소식은 영 없을 것처럼 푸르기만 하다.
“비는 언제 오나.”
태산의 중얼거림에 수연이 피식 웃었다. 사흘째 이렇게 짧게 만나는 중이다. 그리고 매일 태산은 중얼거렸다. 비는 언제 오냐고.
“내일은 못 와.”
수연은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태산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수연을 본다.
“세종에 계약하러 내려가는 날. 정윤이랑 점심 먹고 늦게 올 거라서.”
하아. 태산의 한숨이 짙다. 턱을 문지르며 저수지 쪽을 보더니 수연에게 물었다.
“이사가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
흐음. 태산은 남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지금은 수요일, 다음 주 토요일이 이삿날이면.
“열흘 남았네.”
“응.”
수연이 대답을 하고는 커피잔을 들었다. 한 모금을 마시고 가만히 잔을 내려놓는다. 태산이 계속 쳐다보고 있자, 커피잔을 내려놓은 수연이 묻는다.
“왜?”
“그냥. 너 없는 수연 가든은 상상이 안 돼서.”
태산의 말에 수연은 피식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홀짝홀짝 마셨던 커피는 어느새 반밖에 남지 않았다.
“늦겠다. 그만 일어나.”
커피를 사 오겠다고 내려와서 감감무소식이면 안 되니까. 수연이 마음속으로 정한 시간은 10분 정도다.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태산이 아쉬운 듯 수연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1분만.”
“일어나, 얼른.”
태산은 수연을 당겨 안으며 말했다.
“그럼 30초.”
“안 돼.”
“10초.”
“10. 9, 8, 7, 6, 5, 4, 3, 2, 1. 땡.”
태산의 품에서 수연이 후루룩 10초를 세었다. 땡 하는 말에 태산은 한숨 쉬며 몸을 뗐다. 안으로 들어가 미리 주문해 두었던 커피를 받아 나오니, 수연은 진돌의 끈을 잡고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레 만나.”
진돌과 함께 태산의 차 앞에서 기다리던 수연이 담백하게 인사를 건넸다. 개껌 하나를 뚝딱 해치운 진돌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며 헥헥거리고 있었다.
너는 남아서 수연이랑 같이 있겠지.
“이수연.”
“응?”
저 담백하고도 맑은 눈빛이라니. 나만 썩은 건가. 태산은 후,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듯이 문질렀다.
“이대로 가라고?”
“응.”
수연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태산은 잠깐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말했다.
“뽀뽀는?”
수연이 실없는 농담에 웃는 사람처럼 바람 빠진 웃음을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이다.
“그럼 잠깐만 안아…….”
“진돌아, 가자.”
수연이 태산의 말을 잘랐다. 가자는 말은 기똥차게 알아듣는 진돌이 고개를 돌려 길을 내려다본다. 수연이 진돌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원래도 부러웠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진돌이 부러운 적이 없다.
“나는?”
태산의 말에 수연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난 언제 쓰다듬어 줄 건데?”
수연이 피식 웃었다.
“다음에, 라고 하지 말고.”
태산이 말했다. 다음이라는 애매한 말로 도망치지 말고 언제 어디서 몇 시 몇 분에 안아 줄 건데?
수연은 햇빛 때문에 가늘게 뜬 눈으로 태산을 올려다보다 대답을 했다.
“비 오는 날.”
태산은 끙 하고 앓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야속한 대답을 남겨 놓고 수연이 진돌과 함께 멀어진다.
네 잔의 커피와 흙이 잔뜩 묻은 커다란 차만 태산의 앞에 남아 있다. 사방이 봄인데 이렇게 애를 태우다니.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나.”
태산은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차에 올랐다.
* * *
가든에 도착한 뒤, 수연은 가든으로 들어가 진돌의 물그릇과 차가운 물 한 병을 가지고 나왔다. 먼저 더위에 헉헉거리는 진돌에게 물을 한 그릇 떠 주고 컵에 가득 따라 자신도 마셨다.
“산책 다녀온겨? 덥지?”
아버지 동만이 제방 쪽에서 올라오며 수연에게 말했다. 아버지 옆으로 장현 건설의 대표인 장현기 사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태산의 작은아버지라 생각하고 보니, 닮은 듯도 하다. 굵직한 뼈대와 숱 많은 머리카락. 날카롭지만 웃으면 부드럽게 휘는 눈매도 비슷한 것 같다.
“안녕하세요.”
수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우리 맏딸. 이수연이. 왜 지난번에 말씀드렸는데. 장 팀장이랑 한 대학 나왔다고. 알고 보니 둘이 아는 사이더라구요. 기억하실랑가 모르겄네.”
“기억하고말고요. 그 청사에 있다는 따님 아닙니까.”
“예, 예. 이제 한 열흘 있다 복직인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독한 약 먹느라 몸이 너무 상해서, 좀 더 쉬었으믄 했거든요. 세종이야 가차우니까 마음 같아선 태워다 주고 태워 오면서 집에서 다니게 하고 싶은데 기어이 나가겠다네요. 쟤가 저래 순해 보여도 독한 데가 있어선 아주 지 일을 간섭하는 걸 질색을 해서리.”
동만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다. 수연은 진돌의 목줄을 풀고 엉덩이를 툭 쳤다.
“진돌아, 집에 들어가.”
그 말에 동만이 집으로 졸랑졸랑 걸어가는 진돌을 보았다. 보면서 또 한 번 한숨을 쉰다.
“진돌이 저것도 지 누나 가면 이래 산책도 많이 못 다닐 텐디. 진순이라고, 어미가 있었는데 얼마나 똑똑했는지. 거의 사람이었다니까요. 자유롭게 키워도 함부로 짖지도 않고, 우리 집에서 부르면 저 멀리 있다가도 기가 막히게 돌아오고 그랬는데 그 똑똑이가 덫에 걸려선. 에휴. 말하면 뭘혀. 맘만 아프지. 그래 내가 진돌이는 집 둘레다가 울타리를 쳤잖어요. 답답해도 죽진 않을 테니깐.”
화제가 진돌이로 돌아가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수연은 작게 인사했다.
“전 들어가 볼게요.”
“응. 그려. 들어가.”
장현기 사장에게도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데, 동만이 갑자기 수연을 불렀다.
“아 참. 수연아, 장 팀장 여자친구 있는 거 맞지?”
걸어가던 수연의 목덜미가 쭈뼛 서는 질문이다. 수연은 흐읍, 숨을 들이마시고 뒤를 돌았다.
“네?”
“아 왜, 전에 말했잖어. 그 뭐냐, 결혼할 사람 있다고. 대학 때부터 오래된 사람.”
그 말에 현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이다. 수연은 난감해졌다.
아버지에게 한 거짓말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아빠니까 들켜도 시침 떼면 되는 그 정도의 일이었는데, 태산의 작은아버지 앞에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마음이 쪼그라들다 못해 땅으로 푹 꺼져 버리고 싶어진다.
“허허, 거 참. 태산이한테 여자친구가 있었다니. 그 녀석 내가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봐 왔는데 말이죠. 아닌데, 없었는데.”
“그게…….”
수연이 대답을 어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있어요.”
태산이다. 수연이 뒤를 돌아보자 잠깐 눈으로 웃어 준다. 장현기 사장이 믿지 못해 다시 물었다.
“있어?”
“있습니다.”
태산이 대답했다.
“언제부터 있었어?”
“한 10년 되었나.”
“10년이나? 근데 왜 나한테 안 보여 주냐?”
장현기 사장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태산에게 말했다. 태산이 씩 웃더니 대답을 한다.
“아까워서요.”
“허 참. 이놈 보게?”
“것 봐유. 틀림없이 있다고 했다니깐. 장 사장님이 내 말을 영 안 믿는겨. 장 팀장이 그때 나한테 여자친구 만나러 서울 간다 했다니깐요.”
동만이 태산에게 일러바치는 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사장님은 저랑 농어촌공사 가셔야죠. 사장님 밭에 나가셔야 하는데 그만 붙드시고요.”
“어, 그래. 그래야지.”
태산이 동만과 현기를 몰아가면서 뒤를 슬쩍 돌아본다. 수연과 눈이 마주치자 찡긋 웃었다. 나에게 맡기라는 뜻인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웃음기 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올, 이수연. 오오오올. 신경 끄라더니만 오오오올.”
세호가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수연의 한숨이 깊어졌다.
철없는 막냇동생이 누나 놀릴 거리를 잡아서 아주 신이 난 표정이다. 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어느새 자신보다 훌쩍 커 버린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근엄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절대, 절대, 비밀로 해.”
“오오올. 진짠가 봐. 장, 태산 형님이랑 응? 막 응? 좋아지고 그런 건가 봐?”
촐랑대면서 몸을 배배 꼬는 세호의 등을 수연은 야무지게 때렸다. 찰싹 소리가 나자 세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퍼, 아퍼.”
“조심해라. 들키면 너인 줄 알 테니까.”
그 뒤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처절한 응징을 예고하는 수연의 날 선 눈빛에 세호가 능청을 떨었다.
“내가 뭐. 난 당당해. 찔리는 거 없다구.”
“과연 그럴까. 내가 듣기로 흥복 공업사 둘째…….”
“어워허어어워허허. 누나. 누님. 누니이임.”
세호가 다급하게 수연의 입을 막았다. 흥복 공업사 둘째 딸 선우와 다니는 것을 모르는 줄 아나. 수연이 눈으로 말하자 세호가 손을 딱 모아 빌었다.
“절대 비밀 지킬게. 누나도 지켜.”
공업사 강씨 아저씨라 하면 아버지와 툭 하면 다투는 사이였다. 젊은 날 미모의 박정자 여사 때문에 시작된 앙숙 사이라고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엄마의 이야기였고. 확실한 것은 아버지끼리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린다는 것이다.
“조심해.”
“누나도.”
비밀스러운 협정을 맺듯이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도 찍었다.
세호가 가든 쪽으로 뛰어가고 난 뒤, 수연은 집으로 들어왔다. 이제야 한숨 돌리겠네. 거실 소파에 앉으며 크게 숨을 내쉬는데, 벽에 걸린 달력이 보였다.
세종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열흘. 열흘만 들키지 않게 잘 보내면. 그러면…….
생각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열흘 후의 태산과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매일 얼굴을 볼 수 없는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열흘 후의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사가 언제라고 했지?’
태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열흘 남았네, 세어 보던 목소리도. 태산은 무슨 생각을 했었던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상념이 길어지려 해서 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 일은 그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될 일이다. 수연은 생각을 멈추고 핸드폰을 들어 정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윤? 나야.”
– 이게 누구신가. 이수연 씨 아니세요?
“내일 점심에 시간 괜찮아?”
– 아오. 내일만 딱 안 되는데. 12시에 나진이 접종 예약되어 있어. 어떡하지?
“어떡하긴. 다음에 보면 되지.”
– 들어야 할 얘기가 산더민데! 만나지를 못 하다니. 야, 그래서, 그래서 만났어? 우리 집에서 잔다고 하고는 어떻게 됐는데?
수화기 너머로 정윤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수연은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긴 통화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