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21
21. 봄, 갑사
다음 날 오전, 수연은 언덕을 내려가는 태산의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어쩌다 자신이 태산의 차를 타고 세종으로 가고 있는 건지 기가 막힐 뿐이다.
“이세호를 믿은 내가 바보지.”
수연의 말에 태산이 씩 웃었다.
“너도 한 패였지?”
수연의 추궁에 태산이 웃기만 한다. 그 미소를 보고 수연은 의심스러워하며 말했다.
“네가 주동자였구나.”
태산이 어깨를 으쓱한다. 미리 준비한 듯한 태연한 표정이라니. 수연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난 그저 갑자기 세종에 볼일이 생겼다고 말을 했을 뿐인데.”
수연은 코웃음을 쳤다. 아침의 일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인사를 하러 가든으로 들어갔더니 홀의 식탁에 태산과 세호가 앉아 있었다. 흙 묻은 작업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슈트 차림이었다.
수연이 들어가자마자 세호가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손뼉을 짝 하고 치더니 매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맞다. 형도 세종 내려간다고 했었죠? 우리 누나도 간댔는데. 마침 시간도 딱 맞네요. 하하, 같이 타고 가면 되겠다.”
수연이 어이없어 노려보자 세호가 갑자기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더니, 엄마! 하고 크게 정자를 불렀다.
“태산이 형이 누나 태워다 준대!”
치사하게 엄마를 이용해?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
그 뒤로는 뻔했다. 엄마가 또 도랑 이야기를 들먹였다. 태산의 차 타고 갔다가, 올 때는 아버지나 세호를 부르라고 했고, 장태산이 슬쩍 나서서 올 때도 시간 맞으면 태워 오겠다고 했다.
짜고 친 고스톱처럼 척척 손발을 맞추어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주고받더니, 태산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이 손목시계를 흘깃 보면서 말했던 것이다.
‘이러다 늦겠다. 가자.’라고.
제일 큰 문제는, 못 이긴 척 타 버린 내가 제일 큰 문제지. 수연은 얕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이러다 부모님이 알게 될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냉큼 타 버렸으니 말이다.
“볼일이 있긴 해?”
“당연하지.”
태산이 대답했다. 수연은 가늘게 눈을 뜨고 태산을 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가는 길에 내려 줘.”
계약하기로 한 집의 주인은 30대 후반의 여자였다. 원래는 공부방처럼 차려 놓고 아이들 과외하는 용도로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파트 안이 입지가 더 나을 것 같아 아예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고 했다.
“같은 여자분이 들어오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아요. 보면 여자분들이 집도 깔끔하게 쓰시더라구요.”
중개하는 여사님의 말에 집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설명을 들어 가며 도장을 찍고, 계좌번호로 계약금을 보냈다. 비어 있는 집이니 계약일 전이라도 아무 때나 들어와도 된다는 쿨한 주인의 말을 끝으로 계약은 끝났다.
“그럼, 이사 오는 날 뵐게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길 건너편에 눈에 익은 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삐리리리, 때마침 울리는 신호등의 알람음을 들으며 수연은 길을 건넜다.
“세종 갈 일 있다는 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수연은 벨트를 매면서 태산에게 말했다. 태산은 수연을 부동산 앞에 내려 주고는 볼일을 보러 간다고 했었다.
“거짓말 맞아.”
슥 웃으면서 말하지 말라구. 수연은 느긋하게 미소 짓는 태산이 얄미워 눈을 가늘게 떴다.
“열흘밖에 안 남았다는데, 비 소식은 2주 뒤더라고.”
“땡땡이를 치시겠다?”
“무슨 소리. 엄연히 월차 썼습니다만.”
태산이 정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수연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럼 어디 갔다 온 거야?”
태산이 컵홀더에 담겨 있던 테이크 아웃 잔을 수연에게 내밀었다.
“커피 사러 갔다 온 거야?”
“옙.”
진지하게 볼일이 있다고 해서 시청이라도 가는 줄 알았었다. 수연이 커피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차가 출발을 한다.
“뭐 먹을까? 가고 싶은 곳 있어?”
태산이 물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디라도 갔다 와 볼까. 수연은 차가 많지 않은 한적한 목요일의 도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갑사?”
“가을 갑사를 봄에 가시겠다?”
“사람 많은 거 싫어.”
“훌륭한 생각이야.”
듣기 좋은 태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말이나 못 하면. 수연은 태산을 살짝 흘겨보았다. 흘겨보는 시늉은 했지만 사실은 상관없었다. 태산과 함께 하는 길이 이어지고 봄날의 풍경이 이어진다면, 목적지가 어디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공주 방향으로 뻗어 있는 국도를 타고 달렸다. 금강을 건너서 갑사 터널을 지나 달리다 보니 간판이 붉고 주차장이 큰 중국집이 나오고 이어서 삼거리가 나왔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고 쭉 이어진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갑사 주차장이 나왔다.
“저 건물은 뭐지?”
짓다 만 커다란 건물이 주차장 맞은편에 있었다. 리조트나 호텔용으로 짓던 건물로 보였는데 4층쯤에서 멈춰 있었다. 어느 을씨년스러운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외관이었다.
“짓다가 부도났나 보네.”
“그, 왜, 그 영화 생각난다. 빈 건물에 소파 놓고 담배 피우던 거. 조직폭력배 나오고.”
“아, 그거.”
“응. 그거.”
서로 말하고 있는 영화가 뭔지 알겠는데, 영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세 글잔데……. 수연이 중얼거리자 태산이 말했다.
“찾아볼까?”
수연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귀찮아. 아무튼 그 영화.”
“그래, 그 영화.”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손을 잡았다. 말린 나물을 팔고 있는 식당을 지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을 따라 걷는다. 일주문 앞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애완동물 입장 금지라는 팻말에 진돌이를 한 번 생각한 다음, 커다란 나무들이 터널을 만든 길을 천천히 걸었다.
“왜 가을 갑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
수연은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연둣빛으로 물든 이 길이 가을이 되면 색색의 단풍으로 곱게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봄에도 좋네.”
태산이 말했다.
“응.”
“가을엔 더 좋겠지.”
“그렇겠지.”
“그때 다시 오자.”
태산이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수연도 가볍게 대답했다.
“가을엔 마곡사지.”
“오호. 청개구리 스타일이구나.”
태산이 씩 웃으며 말했다. 수연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사천왕문에 다다라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대천왕을 올려다보았다. 뒤에서 다가온 태산이 수연의 팔짱을 끼며 손을 잡았다. 수연이 돌아보자 싱긋 웃으며 말한다.
“무서워서 그래.”
“지은 죄가 많으신가 봐요?”
“그래서 그런가. 무서워 죽겠네.”
도깨비도 씹어 먹게 생겨 놓고는 태산이 수연의 팔을 꼭 잡았다. 팔짱을 끼고서 다시 걸어 대웅전 앞으로 갔다. 기와 보시를 하는 곳에서 태산이 발걸음을 멈춘다.
“소원 빌게?”
“음.”
태산이 5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상자에 넣고는 기와 위에 하얀색 글씨를 쓴다.
[이수연, 아프지 않기를]먹색의 기와 위에 태산의 소원이 담겼다. 태산이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갑자기 울컥 목이 메어 와 수연은 황급히 뒤를 돌았다.
“어디 가?”
돌아서 걷는 수연에게 태산이 물었다. 수연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쪽 계단 올라가 보려고. 뒤에 산책로 있을 것 같아서.”
“같이 가.”
태산이 기와를 반듯하게 세워 놓았다. 천년의 절에 수연의 이름이 담긴 날이다.
갑사를 둘러보고 내려왔을 땐 어느새 1시가 훌쩍 넘었다. 입구 근처의 식당에서 수연은 산채 비빔밥을, 태산은 불고기 백반을 먹고 다시 차에 탔다.
“커피 마시러 갈까?”
태산이 흘깃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수연이 정윤을 만나고 오겠다고 말해 놓았으니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응. 나가서 금강 건너편에 ‘스몰디’라고 카페 있어. 커피는 내가 사 줄게.”
수연이 말하자 태산이 귀엽다는 듯이 웃는다.
“왜?”
“그냥. 귀여워서.”
“별게 다 귀엽네.”
“응. 넌 별게 다 귀엽더라고.”
입이 있는데 할 말이 없어진다. 장태산이 뭔가 잘못 먹은 건 아닌지, 그래서 시력이 나빠졌다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공주님, 타시죠.”
태산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하지 말라구. 수연은 태산의 팔을 찰싹 때리면서 차에 올랐다. 껄껄 웃는 태산의 목소리가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좌회전이 아니라 우회전인데?”
내비에는 우회전이라고 붉게 길이 그려져 있는데 큰길로 나가는 삼거리에서 태산이 좌회전을 했다.
“조금 돌아서 가자. 이쪽 길이 예쁘거든.”
코너를 돌자 태산의 말대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왼쪽에는 녹색으로 빛나는 산이 있고 오른쪽에는 반짝이는 강물이 흘렀다.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에는 푸른 잎이 흔들거렸고, 수변 공원에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오후 2시. 따뜻한 햇볕이 차창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국도 길을 느긋하게 달리며 차창을 내리고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는다. 찰랑이는 강물이 도로 옆을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봄이네.”
태산이 잠깐 옆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예쁘다.”
수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런 국도 지날 때면 한 번씩 생각하는 건데.”
수연이 차창 밖을 보다 말고 문득 말했다.
“모텔 이름이 LA네. 계룡산 밑에 있으면서 의리도 없이.”
태산은 짧게 웃었다.
“한 번씩 생각하는 건데 우리나라 모텔 진짜 많아. 심지어 이런 시골길에도, 저 봐, 저기 또 있잖아. 이름이…….”
수연이 미간을 좁히며 멀리 보이는 간판을 읽으려 애썼다.
“바…… 반포? 반포래. 이름은 누가 지은 걸까? LA 모텔 주인인가?”
수연의 말에 태산이 계속 웃었다.
“거기다 핑크색이야. 아까 LA는 연보라색이고.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아무래도 주인이 같아 보여.”
“그럴지도.”
태산은 대답했다. 수연은 여전히 차창 밖을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교회랑 모텔이랑 진짜 많은 것 같아. 저 앞에 또 있네. 세상에나 성 모양이야. 신데렐라 모텔? 신데렐라가 알면 기절하겠다.”
꼬깔콘같이 생긴 뾰족한 붉은 첨탑에 하얀 외벽과 기둥의 모텔이라니. 그 와중에 목욕도 가능한 것인지 온천 모양의 마크까지 있었다.
“대체 저런 데는 누가 가는 걸까?”
이 희한한 조합의 건물이 웃기고도 신기해서 수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태산이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모텔이 점점 가까워질 때쯤 태산이 말했다.
“글쎄…….”
수연은 태산을 돌아보았다. 태산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아마, 우리 같은 사람들?”
태산이 핸들을 꺾었다. 방향을 틀자 차가 크게 호를 그리며 모텔 주차장으로 쑥 빨려들어가듯 들어간다. 놀라 눈을 크게 뜨자 태산이 싱긋 웃는다.
“가고 싶어서 내내 모텔 얘기한 거 아니었어?”
차를 세워 놓고 태산이 말했다. 가고 싶어서라니. 그건 정말 아니었다. 수연은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거든?”
“그럼 들른 김에 올라나 가 보지 뭐.”
더더욱 어이가 없는데, 태산이 수연이 손을 잡아 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래서, 들어갈 거지?”
수연은 밉지 않게 태산을 흘겨보았다. 태산이 싱긋 웃었다.
빨간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올라서 입구에 들어가니, 커다란 금색 화병에 조화가 잔뜩 꽂혀 있었다. 그 와중에 무인 모텔인지 카운터도, 지키고 있는 직원도 없었다. 화면이 있고, 빈방이 표시된 부분을 누른 뒤 카드를 넣고 결제를 하면 키가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태산이 결제를 하는 동안 한 바퀴를 둘러보는데 한편에 성인용품을 파는 자판기가 보였다.
“오.”
결제를 마치고 돌아보던 태산의 눈이 빛났다.
“쳐다도 보지 마.”
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태산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잡아끌었다. 태산이 씩 웃으며 말한다.
“역시, 급했구나.”
“아니라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며 태산이 씩 웃었다.
“진작 말하지.”
“아니라고. 난 그냥.”
태산이 입을 맞추는 바람에 수연은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어 수연의 입을 벌린 태산의 혀가 깊게 들어왔다. 어지러울 정도로 깊고 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으응.”
아랫배에서부터 신음 소리가 올라왔다. 저릿저릿한 감각들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수연의 입술이 붉게 부풀고, 다리에 힘이 풀렸을 때 태산이 입술을 살짝 떼고 말했다.
“나는 하루 종일 네 생각만 하는데.”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이어 말한다.
“급한 척 좀 해 주라.”
침대 맞은편의 작은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빗금처럼 쏟아진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상대적으로 침대 쪽은 어두웠다.
“나름 강변뷰인가 봐.”
처음 자는 게 아닌데도 긴장이 되어서, 새하얀 시트가 덮인 침대를 모른 척하며 창가로 다가갔다. 나무색의 시트지가 조잡하게 붙은 작은 창문이 금강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이리 와.”
침대에 앉은 태산이 말했다. 공간이 주는 긴장감 때문인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뻔히 알고 있어서인지 수연은 태산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응.”
대답은 응, 이라고 해 놓고 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보다 더 부끄러워지는 경우도 있나.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수연은 고집스럽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갈까?”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산의 목소리가 낮은 목소리는 침착하게 들렸다. 시선은 강변을 향해 있는데 신경은 온통 뒤로 쏠려서인지 태산이 일어서 재킷을 벗어 의자에 툭 던지는 소리나, 투둑 셔츠의 단추를 푸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쏴아 물을 틀었다 잠그는 소리도 들렸다.
“어디 한번 볼까. 강변뷰.”
태산이 수연의 뒤로 다가왔다. 수연은 여전히 창밖을 보는 척했다. 사실 강변뷰랄 것도 없었다. 어깨높이의 작은 창문은 최소한의 빛과 환기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이 풍경이 그렇게 좋아?”
태산이 팔을 벌려 창틀을 짚었다. 수연은 창과 태산의 사이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응.”
“계속 이렇게 있으려고?”
“응.”
태산이 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바로 뒤에서 태산의 체온과 체취가 느껴졌다. 태산이 수연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뒤에서 안았다. 태산의 단단한 몸이 느껴진다.
“섹스는 언제 하고?”
수연의 어깨에 입술을 대면서 태산이 물었다. 얇은 천을 뚫고 태산의 목소리가 어깨에서 가슴 쪽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다. 수연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따가.”
수연이 대답하자 태산이 웃었다. 어깨에 태산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흘러내렸다.
“다음에 산을 넘었더니 이따가 산이 나타나네. 이따가 언제?”
“이따, 이따가.”
뒤를 돌면 그만인 일이다. 섹스가 목적인 건물에 들어와 놓고 순진한 처녀처럼 굴고 있는 것도 웃겼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뒤를 돌기가 어려운지.
“그럼 계속 봐.”
허리에 둘러 있던 태산의 손이 수연의 단추에 닿았다. 셔츠형 원피스의 앞 단추가 툭 하고 풀린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툭, 툭 단추는 쉽게도 풀렸다. 옷깃 사이를 벌리는 태산의 손이 차갑게 젖어 있어서 손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수연은 작게 움찔거렸다.
단추가 전부 풀리고 앞섶이 벌어졌다. 느슨해진 옷깃 사이로 태산의 입술이 닿았다. 목에, 목과 어깨를 잇는 곡선에, 햇살이 부서지는 하얀 어깨에 태산이 입을 맞추며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었다.
느슨해진 브래지어 안으로 태산의 손이 들어왔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이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연한 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수연은 짧은 숨을 들이켜며 잠시 눈을 감았다.
교묘하게 정점은 스칠 듯 피해 가면서 둥글게 부푼 가슴 아랫부분만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살짝살짝 스치기만 한 정점이 단단하게 솟아올랐지만 태산의 손길은 연한 갈색의 유륜에만 머물렀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꼭지 주변을 간지럽히자, 수연에게서 더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응.”
앓는 것 같은 소리가 아랫배에서부터 울려 나와서, 수연은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애를 태우던 태산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정점을 꾹 집어 비틀었다.
“하윽.”
입을 막았음에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랫배가 확 조여들면서 찌릿한 전율이 정수리까지 뻗쳐올랐다. 태산이 양쪽 정점을 동시에 비틀며 가슴을 한껏 쥐었다. 기름한 손가락이 붉게 솟은 유두를 꼬집듯이 비틀다가 앞으로 잡아 빼면, 오뚝하게 솟은 부분이 튕겨지듯 솟아올랐다. 그 순간 신음과 동시에 다리 사이에서 울컥 하고 무언가가 새어 나왔다.
“흐윽.”
태산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한 손을 밑으로 내렸다. 스타킹과 속옷을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스타킹의 압력 때문인지, 태산의 손이 수연의 아래와 저절로 밀착하듯 빈틈없이 붙었다.
“태산아…….”
다음의 일을 예감한 수연은 태산을 불렀지만 그와 동시에 태산의 손가락이 수연의 틈을 파고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곳에 태산의 손이 닿는다. 그 사실이 창피해서, 수연은 뒤를 돌려 했지만 태산이 돌아보지 못하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앞에 봐.”
태산의 손가락이 젖어 있는 틈을 가르며 들어왔다. 차가 휭, 소리를 내며 국도를 지나갔다. 태산이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굽혀 젖어 있는 정점을 꾹 눌렀다. 쾌감의 버튼을 눌린 수연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태산의 손가락이 부푼 클리토리스를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릴 때마다 찔꺽이는 소리가 났다. 야릇한 소리와 함께 신음 소리도 같이 어우러졌다. 목구멍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끓는 소리가 낯 뜨거워서, 수연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태산의 손끝에서 시작된 쾌감이 자꾸만 자꾸만 온몸으로 뻗어 나갔다. 아랫배가 단단히 뭉치고 다리가 움찔거렸다. 숨은 가쁘게 쉬어지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뿌연 시야 속에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보였다.
“그만. 태산아, 그만.”
다가올 절정이 무서워서, 수연은 태산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태산의 손가락이 천천히 멈추었다. 빨갛게 끓어오르던 풍경들이 일시에 정지했다. 수연은 태산에게 몸을 기댄 채로 창틀을 잡았다. 무언가가 지탱해 주지 않으면 금세라도 다리가 풀려 주르륵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정말 그만할까?”
손을 빼지 않은 채로 태산이 물었다. 아직 절정에 오르지 못한 부푼 정점이 아쉬움 때문인지 저절로 움찔거리며 욱신거렸다. 응, 하고 대답하고 싶었고, 동시에 아니,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하지 마?”
태산이 물으며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부풀어 욱신거리던 곳에 강렬한 자극이 왔다.
“하앗.”
수연은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는 채로 고개를 저었다. 태산의 손가락이 느리게 둥근 원을 그린다. 지그시 누르다가 손을 떼면 온몸이 자르르 떨렸다.
“싫으면 말해. 멈출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태산이 말했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은 가슴으로 올라갔다. 부드럽게 정점을 잡아 비틀면서, 아래로는 둥글게 원을 그렸다. 멈춰 있던 쾌감들이 일시에 끓어올랐다.
휘잉, 거센 바람 소리가 들리면 차가 빠르게 지나간다. 휘잉, 휘잉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동안 수연은 창틀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아앗.”
비틀린 신음 소리와 함께 수연이 무너졌다. 태산의 손아래에서 수연의 몸이 발작적으로 떨리더니 손이 흠뻑 젖을 정도로 물기가 흥건해졌다.
주르륵 아래로 주저앉으려는 수연을 태산이 안아 올렸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셔츠 원피스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수연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며 허공에 들렸다.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이 침대에 등이 닿고 스타킹과 속옷이 한 번에 내려갔다. 태산이 아래로 내려간다.
“아냐, 태산아, 잠깐만. 읏.”
다급하게 가렸지만 다리는 활짝 벌어지고 그 사이로 태산이 얼굴을 내렸다. 쭙, 하고 빠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아득한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뜨겁고 진득한 무언가가 클리토리스를 지근지근 물었다가 세게 흡입을 했다. 혀로 훑었다가 빙글빙글 돌렸다.
“흑.”
수연은 몸을 비틀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감은 눈 속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가 뜨겁게 녹아내렸다가 터질 듯이 팽창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부풀어 오른 무언가가 팡 하고 터져 나갔다.
“아흐읏.”
온몸을 관통하는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날아가 버리며 아무것도 없는 세상만이 남은 것 같았다. 아득한 세상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뜨겁고 단단한 것이 그 세상을 비집고 들어왔다.
“흐윽.”
나쁘다고 생각했다. 단번에 몸을 넣어서 숨 쉴 겨를도 없이 다시 몰아치는 태산이 나쁘다고. 눈이 붉게 짓물러진 채 수연은 태산에게로 손을 뻗었다.
“나빠.”
쇠에 긁힌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산이 수연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수연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평소엔 착하니까, 용서해 줘.”
그래. 그럴게. 대답 대신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태산에게 입을 맞추었다. 태산이 수연의 아랫입술을 물며 허리를 움직였다. 어릿한 통증과 함께 온몸이 꽉 차올라, 수연은 허리를 들며 등을 휘었다.
“좋아?”
태산이 묻는다. 잠자리에서 제일 우스운 질문이 좋아? 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우습지 않았다. 자신을 누르고 있는 태산의 크고 단단한 몸, 남자다운 체취, 닿으면 저릿저릿한 느낌을 주는 살갗, 자신을 꽉 채우고도 넘치는 은밀한 부분과 내내 뜨거운 눈빛. 전부 다 좋았다. 태산이 좋았다.
“좋아.”
자신의 대답에 태산이 웃을 줄 알았는데 웃지 않았다. 움찔 몸을 굳히며 수연을 내려다볼 뿐이다. 수연에게 깊게 몸을 묻은 상태로 태산이 다시 한 번 물었다.
“한 번만 더 말해 봐.”
태산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
“좋아.”
수연은 태산의 눈을 보며 말했다. 태산이 뚫어질 것처럼 수연을 바라보았다.
“한 번만 더.”
“좋아.”
태산이 수연의 눈을 보며 세차게 몸을 밀어 넣었다.
“읏.”
“한 번 더.”
“좋아. 너무……. 아읏. 좋아…….”
태산이 밀려왔다. 이후로는 둘 다 말이 없었다.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깊게 밀려오는 태산의 목을 꼭 끌어안으면서 수연은 눈을 감았다. 아득한 쾌감이 밀려올 시간이었다.
정사가 끝난 뒤에 태산은 수연의 말랑한 몸을 품에 안았다. 힘이 빠진 수연이 태산의 가슴에 맥없이 얼굴을 묻는다. 수연의 몸을 휘어 감듯이 안고서, 태산은 수연의 볼을 쓰다듬었다.
“눈꺼풀이 무거워.”
수연이 손을 들 힘도 없다는 듯 말했다.
“한숨 잘래?”
수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녁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그럼 한 번 더 할까?”
그 말에 수연이 고개를 들고 태산을 올려다본다. 방금 전의 행위로 상기되어 붉어진 볼과 물기 젖은 눈동자가 예뻐서 태산은 수연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님. 진심이세요?”
태산의 품에서 수연이 말했다. 수연이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가슴에 닿아 간질거렸다.
“진심인데요.”
태산의 대답에 수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태산을 올려보았다.
“다섯 번이 기본 아니야?”
헐. 수연의 눈이 커지자 태산이 웃었다. 방금 그게 농담인가? 농담일 텐데 왜 농담 같지 않은 걸까.
“농담. 다섯 번은 무리지. 세 번이면 몰라도.”
다시 한 번 수연의 눈이 커졌다. 이번엔 태산이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다.
“있잖아. 수연아.”
그렇게 수연의 눈을 들여다보다 태산이 수연을 불렀다.
“응.”
“그때 말이야.”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 수연이 쳐다보자 태산이 말을 이었다.
“왜 나한테 집에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랬어?”
수연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돌아가 어머니를 뵈면 모르는 척해 달라고. 아는 척도 말고,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도, 책망하지도 말아 달라고.
수연은 둘 사이를 부정했던 말이 마음에 남았다고 했던 것처럼, 태산의 마음에도 오래 남아 있던 것이 있었다. 홀로 마음 아픈 말을 듣게 했던 것. 그것이 두고두고 남아 있는 아픈 기억이었다.
그즈음에 어머니를 뵐 때면 가슴에서 불길이 바르르 끓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냐는 원망과 부끄럽지 않으시냐는 책망이 목 끝까지 차올랐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수연이 부탁했기 때문에.
수연이 물끄러미 태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새삼스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존심이지 뭐. 우린 정말 아무 사이 아니다. 당신께서 틀리게 보셨다. 난 상처받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그리고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땐 어렸으니까.”
“지금은?”
태산이 물었다. 수연은 지금? 하고 되묻더니 음, 하고 잠깐 생각하더니 픽 웃으며 말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야지. 삼십육계 줄행랑.”
그래 놓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싱긋 웃는다.
“그러니까 들키지 마시라구요. 세호랑 이상한 작당도 하지 말고.”
다 알고 있다는 듯 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볍게 말하는 수연에게서 아직은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채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오로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태산도 같았다. 자신이야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상관없지만, 현실의 무게나 쓸데없는 걱정 같은 건 수연에게 한 줌도 안겨 주기 싫었다.
수연이 자신을 믿기를 바란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고, 지켜 주지 못할 마음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때까지 이렇게 단둘이 비밀스럽게 지내면 되니까.
“오케이. 안 들킬게.”
수연이 웃었다. 반달 같은 눈이 예뻐서, 태산은 마주 웃으며 수연의 몸을 자신의 위로 올렸다.
“뭐죠 이건.”
태산의 몸에 올라타 버린 수연이 눈을 좁히며 물었다. 단단하게 부푼 부위가 수연의 몸에 맞닿아 있었다.
“내 마음.”
태산이 씩 웃으며 대답을 했다. 수연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태산이 상체를 일으키며 수연을 당겨 안았다.
“받아 주시죠.”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태산이 수연의 가슴을 물었다. 쭙 소리가 나게 빨면서 수연을 본다. 뭔가 외설스러운 장면을 본 기분에 얼굴이 빨개진 수연이 눈을 가리자 태산이 낮게 웃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만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