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26
26. 1번 국도
“전화, 를, 왜, 안 해.”
태산의 첫 마디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너 때문에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수연을 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익숙한 수연의 체취. 말간 얼굴과 연한 미소. 수연이다. 수연이 도망가지 않았다. 그대로 있었다. 다행이다. 그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끝나고 하려 했지.”
수연의 대답에 태산이 몸을 떼고 수연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괜찮은 거야?”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연의 얼굴은 멀쩡했다.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나니 뒤늦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 대체 왜! 내가 그렇게! 한 번만 더 이런 식이면!”
두서없이 북받치는 마음에 태산은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뱉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고서 한숨 한 번 크게 쉬고, 태산은 양재역 대로변에서 크게 소리를 내며 수연에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나겠다고 한 거야?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이런 식이면 내가 널 어떻게 지켜!”
흠. 수연은 화를 내는 태산을 보았다. 분명 태산이 화를 내는데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알지 못할 때, 왜 매번 너 혼자서!”
그런데 듣다 보니 어쩐지 기분이 조금 그렇다. 대체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람. 여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바보 취급을 받는 기분인데? 수연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수연의 말에 태산이 움찔했다. 그러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어. 지금 너한테 화내는 거야.”
수연이 물끄러미 태산을 바라보자, 태산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수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너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야?”
“아니, 바보가 아니라.”
태산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수연은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 내가 미술관 앞에서 보자고 했잖아. 내가 약속 어기는 거 봤어? 진짜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
“미안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태산은 수연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수연이 잘못한 것 같은데 왜 자신이 사과하는 중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난 그냥, 지난번에 어머니랑 네가 만났을 때.”
그때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는데 수연이 고개를 들고 태산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잘랐다.
“그때도 내가 분명히 너한테 만나자고 연락은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랬긴 했다. 만나서 서늘할 정도로 차분하게 그만하자고 했었지.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는 마음 아픈 말을 하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태산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어머니가 뭐라셨어.”
태산의 목소리가 낮고 깊었다. 얼어붙은 표정은 과거의 상처를 말해 주고 있었다. 이제는 태산의 상처를 털어 줄 시간이다. 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을 했다.
“미안하다고 하셔서, 감사하다고 했지.”
태산의 눈썹이 찡그려진다.
“그게 전부야?”
“응. 그게 전부.”
“헤어지라거나, 만나지 말라는 그런 말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싫은데요, 계속 만날 건데요, 대답하려고 마음먹고 나왔는데 그동안 많이 미안하셨대.”
수연은 아직도 딱딱하게 찌푸려져 있는 태산의 미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인상 펴시죠.”
태산은 멍하니 서 있었다. 미간을 펴 주는 수연의 손길이 느껴졌다. 정말 그것이 전부인지,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쫄보.”
수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순간 태산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겁먹어서 망설이던 게 누군데.
“내가?”
“완전 쫄보. 내가 뭐, 잠수라도 탈까 봐?”
“그거야 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다고 그랬으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넌 충분히 그래 보여.”
참나. 수연이 혀를 찬다. 공무원 생활 8년차, 구를 만큼 굴렀다며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백만 민원인을 상대해 온 공무원을 무시하는 거냐며, 옆에서 종알거리더니 새침하게 말했다.
“이럴 일로 헤어질 거면 애초에 만나겠다고 하지도 않았거든?”
태산은 톡 쏘듯이 말하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제야 수연과 자신의 관계가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시간이 흘렀고, 두 사람 모두 어른이 되었다. 혼자 밀어붙인 마음이 아니라 둘이서 같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겠다.
“날 무시하지 말라고.”
수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말했다. 단단한 수연의 마음이 느껴진다. 내내 태산의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 오늘 진이 다 빠졌어.”
태산은 벽에 기대며 마른세수를 했다. 수연이 달래듯이 말했다.
“축의금 내고 신부 얼굴만 보고 올게. 점심 먹으러 가자.”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어디 가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여기 근처에 호텔이 아마.”
수연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미소를 짓는다. 태산도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태산과 수연은 근처에서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시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5월의 덕수궁을 한 바퀴 돌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한 바퀴를 돈 뒤, 벽 한 면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숲의 풍경을 담은 그림 앞에 앉았다.
“어땠어?”
혹시나 지루한 시간이었을까 봐 수연이 물었다. 태산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숲의 풍경을 보면서 말했다.
“처음엔 잘 그렸다고 생각했고, 그다음엔 이런 사람이 왜 이렇게 어지럽게 그렸나 싶었는데, 지금은…….”
압도적인 그림을 응시하다가 수연을 보면서 말했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해.”
태산이 다시 그림을 본다. 수연도 그림을 보았다.
“결국 이런 그림을 그리려고, 그 모든 과정을 지난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정도?”
수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에 대해 잘 아는 편도 아니고 전시회도 드물게 다니는 편이지만 오늘은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그치?”
수연이 물었다.
“응. 좋네.”
태산이 답했다.
마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손을 잡는다.
이 모든 것이 그래야 하는 일. 이렇게 되기 위한 일. 너와 내가 함께하기 위해 겪어야만 했던 일. 이제는 전부 지난 일.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세종으로 오는 길,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던 태산은 오산 근처에서 1번 국도로 갈아탔다.
예쁜 카페가 나올 때는 잠깐 멈추어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경치가 좋은 공원이 보일 때는 내려서 한 바퀴 산책을 했다. 찐빵과 만두를 파는 가게 앞에 차를 대고, 찐빵을 호호 불어 먹기도 했다.
아름드리 가로수가 늘어선, 초록이 찬란한 길도 지났다. 햇빛이 물비늘처럼 바닥에서 반짝거리는 길을 지날 때면 창문을 내리고 바람을 맞았다.
수연은 창문에 턱을 괴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로수 사이로 마을이 보이고, 학교가 보였다. 산과 들이 보이고 꽃과 나비가 보였다. 그렇게 한가로운 풍경이 이어져, 수연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중간중간 멈추어 가며 느긋하게 내려오다 보니 조치원을 지날 때는 저녁이었다. 수연이 좋아하는 낙지볶음집 앞에 멈춰서 해물 파전과 낙지볶음을 먹었다.
세종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다가 그리스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더니, 세종시에 도착했을 땐 깜깜한 밤이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집에 있자.”
엘리베이터 안, 태산이 수연을 뒤에서 안으며 속삭였다. 수연은 몸을 돌려 태산의 목에 팔을 감았다.
“오호. 도발하는 거야?”
“응.”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현관문까지 한걸음으로 키스를 하며 걷는다. 태산이 키스를 멈추지 않고는 손을 더듬어 잠금장치를 더듬더듬 풀었다. 사이사이로 수연이 큭큭 웃었다.
“아니 이게 시방 참말이란 말이여?”
경악에 찬 동만의 목소리가 들려 돌처럼 굳기 전까지, 수연은 정말이지 완벽한 데이트라고 생각했었다.
“누나 미안.”
방문 뒤에 숨어 있던 세호가 검지를 맞대면서 쭈뼛쭈뼛 나왔다. 동만이 뒤를 돌아 벽을 보고 앉았다. 수연과 태산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자가 빨래 건조대에 널린 수건을 걷어 동만의 옆에 앉았다.
“하여튼 유별나. 아니 다 큰딸이 연애하면 좋은 거지. 뭘 그렇게 삐져선 뒤까지 돌아앉는대. 장 팀장 편히 앉아요. 그러다 쥐 나겠어. 수연이 너도 편하게 앉아.”
정자의 말에 동만이 흘깃 뒤를 보더니 킁, 하고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서로 마음이 있던데, 그걸 몰라보고 혼자 뒤늦게. 에이그.”
정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동만이 뒤를 휙 돌면서 정자에게 물었다.
“자네는 알고 있었다 이 말이여?”
“당연하지. 어떻게 아빠가 돼선 그걸 몰라? 장 팀장이 괜히 커피 사다 주고 케이크 사다 주고 그랬겠어? 툭 하면 나가서 밥 먹고 커피 마시던데. 아니 어떻게 그걸 몰라?”
동만이 목덜미를 잡았다.
“커어피? 밥? 언제 그런겨? 어? 대체 언젯쩍부텀 그런겨? 여자친구 있다고 그래 놓고!”
“그거야, 당신이 하도 감시를 하니까 둘러댄 말이지. 장 팀장 손가락에 반지도 없더구만 그 말을 믿었단 말이야?”
뒤에서 세호가 쿡쿡 웃는다.
“아, 웃지 말어! 세호 너는, 너도 그러는 거 아니여. 누나가 저런, 저런…….”
동만이 태산을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런 산도둑 같은 놈이랑 만나는 것 같으면은! 퍼뜩 아부지한테 말을 했어야지!”
웃다가 들킨 세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태산이 형이 비밀로 하면 용돈 준다고 그래서…….”
“허이고! 아주 뇌물로 사람을 어? 자네 지금 돈 많다고 지금 유세 떠는겨?”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태산이 넙죽 사과를 했다. 하아. 수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몰래 연애한 죄로 무릎을 일단 꿇긴 했는데 이럴 것까지는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빠.”
“수연이 너도 그러는 거 아니여. 어? 어뜨케 나만 빼고 죄다 알어. 세호가 입방정 안 떨었으면 나만 계속 몰랐을 거 아녀. 나는 그것도 모르구선 우리 딸 멕이려고 인삼을 꿀에다 절이고!”
“아빠가 이럴까 봐 말 안 했어.”
“뭐여?”
“아버지 이럴까 봐 말 안 했다구요. 태산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태, 태산이!”
동만이 다시 목덜미를 잡으며 뒤로 넘어갔다. 어이쿠, 소리와 함께 태산이 동만을 부축했다.
“수연 아빠, 1절 했으니까 이만 갑시다. 너무 늦었어.”
그사이 수건을 다 개고 욕실장 안에 넣은 정자가 동만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래, 아빠. 좀 너무 창피할 정도로 유난스럽긴 해. 막말로 누나 정도에 태산이 형은 어이구, 감사한 거지.”
“이, 이눔의 시키가! 너희 누나가 어? 어딜 내놔도 어?”
“제가 잘하겠습니다. 수연이 행복하게…….”
“수, 수연이라니! 남의 딸 이름을 그렇게 막. 아이고, 아이고.”
하아. 수연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생각한 수연은 엄마와 세호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신호를 주었다. 태산의 어깨도 톡톡 쳐서 밖으로 나가 달라 눈짓을 했다.
“다들 어디 가는겨? 어? 나는 못 가네. 나는 안 가. 우리 딸을 저런 소도둑놈이랑 같이 두고 나는 못 가.”
동만이 고집을 피우는 사이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수연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동만을 불렀다.
“아빠.”
“…….”
“아빠. 나 좀 봐.”
“…….”
“자꾸 이러면 나 내일부터 밥 굶는다?”
수연의 말에 동만이 움찔 놀랐다. 수연은 팔짱을 풀고 차분한 목소리로 동만에게 말했다.
“아빠, 나는 있잖아. 태산이한테 아빠가 좋은 어른이었으면 좋겠어요. 반갑다, 고맙다, 잘 지내라, 그렇게 말해 주면 안 돼? 아빠가 나한테 최고의 아빠인 것처럼, 태산이한테도 그래 주면 안 돼?”
동만이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물었다.
“내가 최고의 아빠여?”
반절은 먹혔다. 수연은 숨을 한 번 크게 마시고 동만의 옆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럼. 아빠가 최고지. 나는 아빠가 일등이야. 태산이는 그다음이고. 아빠가 있으니까 내가 밖에서도 잘 지내는 거고, 아빠가 있으니까 힘든 일도 덜 힘들게 견디고 그러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근데 아빠.”
“어.”
“태산이는 그런 아빠가 없잖아요.”
동만이 입을 꾹 다물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자꾸만 깜빡였다. 눈을 깜빡이는데도 동만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나 위해서 태산이한테 못되게 하면, 태산이한테 괜찮다, 아빠가 있잖니, 그렇게 말해 줄 아빠가 없잖아요.”
“그치. 그건 그려.”
“그러니까 잘해 주면 안 될까. 지난번에 드라마 보다가 아빠가 그랬잖아. 다른 사람 귀한 자식한테 상처 주는 거 아니라고.”
크흠. 동만이 눈을 껌뻑였다.
“혹시라도 태산이가 나 마음 아프게 하면, 아빠한테 이를게. 조금이라도 그렇게 하면 내가 꼭 말할게. 응?”
수연은 동만의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돌아앉았던 동만이 슬금슬금 몸을 틀었다.
“참말로 아부지한테 제일 먼저 말하는겨. 알았지?”
“응.”
“만에 하나라도 그 집서 너한테 요만큼이라도 뭐라고 하거나 그러면은.”
“꼭 말할게. 그땐 아빠가 혼내 줘. 약속.”
수연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동만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저하며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한 거다.”
“…….”
새끼손가락을 굳게 거는 동만의 눈시울이 붉었다. 수연은 가만히 동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더 잘할게요. 아빠가 한 번만 봐줘라.”
눈물을 닦아 주고 눈을 맞추니 동만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여튼 유별나, 유별나. 난 누가 뭐래도 찬성이야. 찬성.”
현관문 밖에서 정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동만을 다독인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어떻게 잘 해결했어?”
정자의 물음에 수연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정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봐. 반나절도 못 버틸걸 뭐 하러 분주하게 내려왔다 올라갔다. 어휴. 세호야, 짐 챙겨라. 얼른 가자.”
동만이 태산을 보며 어깨를 쭉 펴고 말했다.
“내가 두고 보는겨. 허락한 게 아니라구. 명심혀.”
“네.”
태산이 순순히 대답을 하는데 동만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왜 그러고 섰어? 장 팀장도 그만 올라가야지?”
어…… 그건.
태산은 수연을 흘깃 보았다. 수연이 바깥을 향해 고갯짓을 한다. 일단 나가는 척이라도 해, 라는 뜻이다.
“네. 올라가야죠. 그럼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수연이 웃음을 참고 있다. 아무래도 세종시에 따로 거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태산은 현관문을 닫았다.
“어디야?”
가족들이 모두 떠난 뒤, 세호에게서 확실히 가고 있다는 문자를 받고 나서 수연은 태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 공원. 아니다. 산책로인가?
태산이 현재 위치를 지도로 찍어 보내 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파트 단지 둘레길이었다.
“내려갈게.”
– 내가 올라갈게.
“아니야. 잠깐 걷고 싶어.”
– 그래, 그럼. 큰길에서 만나자.
수연은 가벼운 카디건을 걸쳐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건물을 나서 큰길 쪽으로 걷고 있는데, 태산이 먼저 길을 건너왔다.
“오래 기다렸지?”
“아냐.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뭘.”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동만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었다. 수연은 미안해서 웃으며 태산의 손을 잡았다. 태산이 씩 웃으며 말했다.
태산도 웃으며 말했다.
“하루가 길다.”
“응.”
삐리리리, 소리가 나며 신호등이 켜졌다. 2차선 도로를 건너자 아파트 단지가 나오고 그 단지 사이의 작은 공원이 나왔다.
“계획도시라 이런 건 참 좋아.”
단지와 단지를 잇는 산책로가 마을 하나를 둘러쌌다. 늦은 시간인데도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킥보드를 타는 어린이도 있고, 유모차를 미는 아빠와 그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 번씩 아빠의 입에 넣어 주는 엄마도 있었다.
“우리도 아이스크림 먹을까?”
태산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파트 단지 건너편의 상가에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보였다.
“그럴까.”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아이스크림콘을 하나씩 샀다. 동그란 스쿱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으며 다시 걸었다. 선선한 밤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나 여기 집을 좀 구해 볼까 봐.”
부동산을 지나며 태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하러.”
“출퇴근을 아예 여기서 할까 싶기도 하고.”
“무리인 거 알지?”
“KTX 타면 금방이야. 40분이면 도착해.”
“타러 가고, 내려서 이동하는 시간은 왜 빼.”
태산이 흠, 하고 생각을 하다 말했다.
“너희 집으로 아버님이 불쑥불쑥 쳐들어오시면 어떡해.”
수연이 멈칫했다. 태산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왠지 낫을 들고 오실 것 같단 말이지.”
수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난 진지해.”
농담인 줄 아는지 수연이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래도 태산은 주의 깊게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상가가 가까운 동의 5층쯤이 좋겠다. 수연이 좋아하는 푸른 공원이 잘 보일 테니까.
“다 먹었다.”
수연이 마지막 남은 한 입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이 수연을 비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라일락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솔솔 불어왔다. 수연의 귀밑머리가 산들바람에 흔들린다. 태산은 수연의 보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도 만났고, 너희 부모님도 뵈었고. 이젠 숨어서 안 만나도 되겠다.”
“글쎄…….”
수연이 음, 하고 생각하는 척을 했다.
“아직도 안 되는 거야?”
수연이 연하게 웃는다. 그 미소가 예뻐서 태산은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뭐야.”
수연이 눈을 흘겼다. 태산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수연의 손을 잡아 반듯하게 피면서 말했다.
“반지도 샀는데, 공개 좀 합시다.”
수연의 눈이 커진다. 태산은 커플링이 담긴 케이스를 수연의 손바닥 위로 올려놓았다. 그중 작은 반지를 꺼내 수연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이런 걸 언제…….”
“지나가다가 예뻐서 샀어.”
태산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수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힘껏 다물었는데도 눈가가 시큰거렸다. 고개를 내려 반지를 보는 척하는데 태산이 수연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도록 했다.
“이제는…….”
태산이 말하며 수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랑할 일만 남았네.”
수연의 눈이 붉어졌다. 붉어진 눈매로 수연이 미소 지었다.
“이수연. 사랑해.”
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메어 나도, 라는 말이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그 마음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오래 걸려도 괜찮다는 듯이 태산이 수연의 얼굴을 감싸며 다정하게 웃었다.
“기다릴게.”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산이 눈물을 지우며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수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바람이 부는 5월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