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27
27. 에필로그
태경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백화점 옆의 흡연 코너에 서 있었다. 세 번째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메시지를 적었다.
[적당히 하고 나와라.]라이터의 불을 켜는데, 태은에게서 답 메시지가 왔다.
[싫은데? 메롱.]하아. 태경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한 가닥 남은 인내심이 간당거린다. 마지막으로 한 브랜드만 더 들른다더니, 이 옷 저 옷 다 입어 보면서 패션쇼를 펼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필 본가에서 근무하시는 한 기사님이 휴가를 낸 날이다. 거기다 태은이 자신의 차는 동업자인지 나발인지가 써야 한다고 가게에 두고 왔다며 ‘엄마’랑 같이 갈 거니 직접 데리러 오라고 했다.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왔으니 확 가 버릴 수도 없고. 늘 입는 브랜드에서 1분 만에 슈트를 고른 대가가 무한 대기라니. 다시 한 번 짜증이 울컥 솟아 태경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어쭈.”
태경은 담배를 물고서 헛웃음을 웃었다. 백화점 바로 옆으로 연결된 지상 주차장에 태산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놈의 기사도 정신이라도 발휘하는 중인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빙그르르 차를 돌아 조수석 문을 열고는 여자를 에스코트하고 있다.
“저거 완전 모지리 아냐.”
담배 연기를 후욱 뿜는데 더 가관인 장면이 펼쳐졌다. 여자의 자그마한 토드백과 알량한 쇼핑백 두어 개를 당연하다는 듯이 본인이 들고 걷는다. 이건 뭐, 결혼을 약속한 커플이 아니라 숫제 아가씨와 머슴이다.
“저 등신.”
뭐가 좋다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지.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온다. 짧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데 태산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며 태경을 발견하고는 아는 척을 했다.
“벌써 끝났어?”
“끝났으면, 내가 여기 이러고 있겠어?”
삐딱한 말을 뱉으며 장태산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별로 좋은 표정도 아니었을 테고 눈빛도 짜증이 듬뿍 담겨 있을 텐데 여자는 크게 동요 없이 태경을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먼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사무관? 서기관? 서기관으로 승진했다고 들은 것 같다. 뭐 영 쓸모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태경은 대충 몸을 세우고 인사를 했다.
“그리 안녕치는 않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장태경입니다.”
여자가 웃었다. 장태산 취향이 이런 쪽이었단 말이지. 연하게 말랑말랑해서는, 픽 쓰러질 것 같이 생긴. 하여튼 뭐든지 나랑 취향이 정반대라니까.
대체 만질 만한 볼살 한 줌 없는 여자가 뭐가 좋다는 건지. 자고로 여자란 볼살 통통해서 쭉 잡아당기는 맛이……. 아, 씨발. 왜 장태은 동업자가 생각나는 건데. 태경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수연이 말했다.
“이수연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태산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안 반갑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그랬더니 여자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말했다.
“초면에 어떻게 그래. 다음부터 그럴게.”
말랑말랑 취소. 생긴 게 함정이구만.
“태은이가 아직인 거지? 먼저 가 봐. 내가 어머니 모실 테니까.”
“그런 건 빨리 좀 알려 줘. 괜히 시간만 버렸네.”
쥐고 있던 담뱃갑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태경은 옷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세 걸음쯤 걷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뒤를 돌아 태산에게 물었다.
“결혼식이 언제라고?”
“11월 17일.”
“뭐야. 한 달밖에 안 남았잖아.”
상견례를 빠졌더니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젠장, 주차장도 왜 이렇게 멀고 지랄이야. 중얼거리면서 태경은 빠르게 걸었다.
“저 사람이 그 소문의 장태경이었구나.”
“소감은?”
“어머님 많이 닮았네.”
수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태산이 크고 단단하고 강건한 느낌이라면 비슷한 키의 태경은 날렵하게 잘생긴 타입이었다. 살짝 마른 몸에 한눈에 봐도 고급 브랜드인 슈트가 잘 어울렸는데, 슈트 따위 먼지가 묻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대충 걸터앉아 있던 것도 잘 어울렸다.
“자주 볼 일은 없을 거야.”
“다행이네.”
수연의 대답에 태산이 웃었다.
“오늘은 정말 이 코스가 끝인 거다?”
태산의 손에 이끌려 정문으로 향하면서 수연이 물었다. 결혼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러서 주말에도 쉴 수가 없었다. 결혼 준비로 쏟아야 하는 에너지와 시간이 이렇게 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정해야 하는 건 왜 그리 많고, 사야 하는 것도 왜 그리 많은지. 태산이 밀어붙여 최대한 간소하게 진행을 하는데도 정신이 없다. 태산과 통화를 할 때마다 우리 둘이서 물 한 그릇 떠 놓고 맞절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물으면, 태산은 농담인 줄 알고 웃었지만 사실 수연은 진심이었다.
오늘만 해도 드레스숍에 들러서 마지막 가봉을 끝내고 웨딩링과 커플 시계를 찾느라 명동에 있는 백화점에 들렀다가, 아무래도 빈손으로 만나기는 뭐해서 태은과 영혜에게 선물할 홍차와 쿠키 세트를 사서 오는 길이다.
“정말로 끝.”
태산이 약속했다. 태산의 뜻대로 간소한 결혼식에 동의는 했지만 영 마음에 차지 않았던지, 영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물이고 예단이고 전부를 양보해도 며느리 옷 한 벌은 해 주고 싶다는 말에 못 이긴 척 백화점으로 찾아온 길이었다.
“태은이가 너 보면 좋아하겠다.”
상견례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쭈뼛쭈뼛 나타났던 태은을 떠올리며 수연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잡고 붕붕 흔들면서 자기를 기억하냐고 물었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수연의 엄마 아빠에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기는 언니 너무 기억난다며 그때부터 정말로 좋아했었다고, 이렇게 되려고 그랬나 보다, 라고 해맑게 말해서 상견례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었다.
“어제도 통화했는데 뭐.”
수연의 말에 태산의 눈썹이 들렸다.
“통화를 해?”
“응.”
“나랑은 피곤하다고 금방 끊었잖아?”
“태은이랑 통화했더니 피곤해져서. 요즘 자주 통화해.”
“하, 참.”
태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태은이 문제였던 걸 몰랐다니. 적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거늘.
“오빠, 여기!”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태은이 손을 흔든다. 태산은 엄한 표정을 지어 보려 했지만, 수연을 보며 방글방글 웃는 태은의 얼굴에 그만 웃고 말았다.
“언니 여긴 이게 진짜 맛있어요. 믿고 먹어만 보세요. 농어구이가 짱짱짱. 껍질은 크리스피하고 안은 촉촉한데 입에서 살살 녹아요.”
수연은 베이지색의 얌전한 원피스를 단번에 골랐다. 작은오빠와 쇼핑 스타일이 닮았다면서 태은이 웃었다. 수연은 단번에 골랐지만 영혜의 고집으로 구두 두 켤레와 스카프, 결국엔 가방까지 들어 한 세트로 완성을 하고 나서야 쇼핑이 끝났다.
그러고도 영혜가 자꾸만 뒤를 돌아 얘, 이거 한 번만 들어 볼래? 저게 너랑 어울릴 것 같은데, 한 번만 입어 볼까? 라고 묻는 통에 태산이 우르르 몰고 나와야 했다.
간신히 식당가로 올라와 태은이 좋아한다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은 뒤 막 메뉴판을 받은 참이었다.
“그럼 전 농어구이로 할게요.”
“난 티본 스테이크.”
태산이 말했다.
“엄마는 봉골레 파스타고, 나는 한우 안심을 얹은 버섯 크림 리소토. 에, 또…….”
태은이 메뉴판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태산이 심각하게 같이 읽는다.
“제철 버섯 샐러드랑…….”
태은이 말하자 태산이 이어서 말했다.
“돌문어 감자구이도 시키고.”
“이거, 뇨끼. 뇨끼까지만 할까?”
“흠…….”
태산이 고민을 한다. 그러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족하지 않을까?”
“그치? 그럼……. 스튜풍의 매콤한 해산물 토마토 파스타 어때? 지금 우리 고른 거 중엔 토마토 소스가 없으니까.”
“그럼 일단 거기까지만. 봐서 모자랄 것 같으면 더 시키자.”
머리를 맞대고 진중하게 회의를 하던 태산과 태은이 고개를 들었다. 수연이 웃음을 꾹 참고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어. 이거 별로 안 많은 건데요.”
“진짜야 한 줌밖에 안 나와. 스테이크가 손톱만 하다니까.”
태은과 태산이 번갈아 말했다. 어느 세상의 손톱이 그렇게 크냐는 농담을 하고 싶지만, 마주 앉은 영혜가 태산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려서 하지 못했다.
“언니, 제가 케이크를 세 가지 버전으로 준비해 봤는데요. 한번 보세요.”
에이프릴이라는 카페의 오너 파티시에인 태은이 웨딩 케이크를 담당하기로 했다. 케이크 커팅 같은 건 생각도 안 해 본 일이라, 괜찮다 사양을 했더니 본인이 꼭 하고 싶다고 했었다.
“이건 3단. 요건 4단. 요건 5단. 좀 부족한가? 한 10단 정도로 만들어 볼까요?”
태산이 옆에서 쿡쿡 웃었다. 간소한 결혼식이 어째 점점 산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태은과 영혜를 본가에 태워다 주고 세종의 신혼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드디어 우리 집이다.”
현관의 센서 등이 켜지자 수연이 말했다. 익숙한 현관의 타일만 봐도 마음이 안정이 된다.
태산과 함께 신혼집을 구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한 뒤 수연 먼저 들어와 산 것은 이제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집은 한 달 만에 홈 스위트 홈이 되어 버렸다.
“고생했어.”
이런저런 쇼핑백들을 양손 가득 들고 있는 태산이 말했다. 수연은 신도 벗지 않은 채로 태산에게 기댔다. 팔을 둘러 태산의 허리를 안고 옷깃 사이로 머리를 묻어 흐음, 하고 태산의 냄새를 맡았다.
“많이 피곤했지?”
태산이 쇼핑백을 바닥으로 떨구고는 수연의 등을 안아 토닥거렸다.
“이상해.”
수연이 태산의 가슴에 대고 웅얼거렸다.
“뭐가?”
“네 냄새가 신경 안정제 같아.”
지쳤을 때, 힘이 들 때, 신경이 예민해져서 두통이 일 때, 수연은 태산을 안고 깊게 숨을 쉬었다. 태산이 쓰는 향수 냄새와 체취가 섞인 냄새를 맡으면 안심이 된다.
태산이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만 움직여 신발을 벗고는 수연을 안아 올렸다. 수연이 태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태산은 허공에서 대롱거리는 수연의 신발을 하나씩 벗겨 주고는 거실로 향했다.
수연을 안은 채로 태산은 소파에 기대앉았다. 자신에게 꼭 붙어 있는 수연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수연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중얼거렸다.
“우리 집 좋아.”
첫눈에 마음에 든 집이다. 아파트의 1층이지만 집집마다 제공한 넓은 베란다 정원이 있어서 주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게 꾸민 정원 너머로는 호수 공원이 보여, 수연 가든과 비슷한 경치가 보인다.
“나도.”
태산도 동의했다. 수연이 좋다 하면 뭐든 좋았지만 이 집은 태산이 먼저 보고는 한눈에 반해 수연을 데려왔었다. 불이 꺼진 거실도 아늑하게 느껴져, 태산은 수연을 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짐 정리는 언제 하지?”
수연이 태산에게 머리를 기댄 채로 말했다.
“아무 때나 하지 뭐.”
“냄비 배송 온 거 풀어 보지도 못 했는데.”
“내일 같이해.”
“그릇도 왔어.”
“그것도 내일.”
“액자도 걸어야 하고.”
수연이 중얼거린다. 태산이 수연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자신을 보도록 위로 올렸다. 눈을 마주하고서 말했다.
“그만.”
해야 할 일. 하지 못한 일. 전부 그만 생각해.
“지금은 그냥 쉬어.”
“응.”
수연은 다시 태산에게 기댔다. 그만 생각해야지. 여기는 우리 집이고, 태산이 왔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태산이랑 같이…….
잡생각들이 스르륵 사라진다. 태산의 토닥이는 손길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연은 코알라처럼 태산을 안고서 잠이 들었다.
수연이 눈을 떴을 때, 벽에 어른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태산이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묻는다.
“깼어?”
그 자세 그대로 안고 있었나 보다. TV가 소리 없이 켜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까 안겨 있던 그대로였다.
“나 얼마나 잔 거야?”
수연은 눈을 비비며 물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깨우지.”
“나도 잠깐 졸았다가, TV 보고 있었어.”
“소리도 안 켜고서 본 거야?”
“응.”
“뭐 하러.”
“너 감동하라고.”
태산의 말에 수연이 피식 웃었다. 눈을 다시 비비고는 태산의 목을 안으며 기댔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수연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태산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면서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데 태산의 손이 자연스럽게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수연이 고개를 들자 태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맨살을 어루만지던 손이 툭 하고 브래지어 호크를 풀었다. 수연은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진짜 좋았는데.”
“더 좋은 거 할 시간이야.”
태산이 원피스와 브래지어에서 한 번에 수연의 팔을 빼냈다. 스륵 흘러내린 원피스가 허리춤에 걸렸다. 반라가 된 수연의 몸에 TV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태산은 수연의 가슴을 쥐고 한 번씩 번갈아 입을 맞추었다. 수연이 옅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움츠렸다. 더운 입김이 오래 가슴에서 머물러 수연의 등이 뒤로 휘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태산이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거든. 아까가 더 좋았거든.”
수연이 말하자 태산의 눈썹이 쓱 들렸다.
“그래? 그렇다면.”
태산이 수연을 간지럽히며 고개를 숙여 가슴을 물었다. 꺅, 하고 수연이 짧게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태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태산은 휘릭 몸을 돌려 자신의 아래에 수연을 가두었다. 수연의 입에서 좋다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끝-
글쓴이 이유진
탄수화물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출간작으로 『원페어』, 『그녀석에 관한 고찰』, 『봄 깊은 밤』, 『길티 플레져』, 『사랑의 새싹약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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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9년 5월 20일
글쓴이 이유진
펴낸곳 카멜
책임편집 김효선
본문삽화 반지
이메일 camelbook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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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86083-46-8(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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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은 카멜과 글쓴이 이유진에게 있습니다. 허락없이 복제하거나 다른 매체에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