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5
5. 옛사랑
가든은 오래도록 요란했다. 환한 불이 마당을 밝혔고, 건배 소리가 여러 번 울려 퍼졌다. 수연은 고무장갑을 손에 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6시에 시작한 술자리가 벌써 세 시간째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어.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정자가 수연의 등을 떠밀었다.
“지금까지 쉬다가 이제 막 장갑 꼈는데? 이것만 닦을게.”
수연은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며 말했다. 싱크대 안에 냄비며 도마, 프라이팬이 가득이지만 익숙한 풍경이다. 식당 집 딸로 산 32년, 이 정도 규모의 상을 차리고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정도는 힘든 축도 아니었다.
“거의 끝나 가는 것 같지?”
정자가 주방 너머 홀을 넘겨보며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은 홀 쪽을 보지도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세호는 언제 온대?”
“몰라. 이놈시키는 대전만 가면 감감무소식이야. 거기다 꿀을 발라 놨나.”
“그러게.”
“지 형이나 귀찮게 안 하나 모르겠다.”
“둘이 같이 게임할걸?”
“그렇게 노는 걸 좋아하는 놈이 무슨 식당 일을 하겠다고.”
“그래도 잘하잖아.”
“어디 나가서 취직이나 할 것이지.”
형을 보겠다고 도심에만 나가면 소식이 끊기는 막내의 이야기를 하며 수연은 물을 틀었다. 쏴아아 흐르는 물에 냄비를 헹구며 잠시 생각을 하다 정자를 돌아보았다.
“엄마.”
“어.”
주방 한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정자가 대답을 한다.
“나 이제 슬슬 세종에 집 알아보러 가 볼까 봐.”
“벌써?”
복직은 한 달 남짓 남았다. 얼마 전에 서울 청사가 세종으로 내려와 수연도 복직하면 세종으로 출근을 해야 했다. 여기 수연 가든에서 차로 가면 청사까지 어림잡아 30분. 본가에서 출퇴근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수연은 작은 오피스텔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냥 구경도 하고 시세도 보고. 한가할 때 알아보게.”
“그러던지 그럼.”
당장 구하겠다 하면 혹시 서운할까 봐 수연은 괜히 한마디를 덧붙여 보았다.
“그냥 여기서 다닐까? 엄마 밥 먹으면서?”
“아서. 네 운전 실력으로 출퇴근을?”
“못 할 것도 없지. 차도 있는데.”
초보 운전 8개월차. 면허는 10년 전에 땄지만 내내 장롱면허였다가 작년 가을 작은 경차를 한 대 사면서 운전을 시작했다.
“논두렁에 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땐 왕초보였고. 지금은 안 그러지. 그리고 논두렁 아니고 배수로라니까.”
지난달, 친구를 만나러 대전으로 용감하게 차를 몰고 갔었다. 가기는 잘 갔었는데 들어오는 길에 마주 오는 차 때문에 좁은 길에서 후진을 하다 배수로에 한쪽 뒷바퀴가 빠졌었다. 동만이 트럭으로 견인줄을 묶어 끌어서 빼 주었다.
“너 운전하면 네 아빠 불안해서 못 산다. 결국 아빠 트럭 타고 출근하게 될 게 뻔해. 어우, 생각만 해도 창피하다, 야.”
서른둘 먹은 딸이 아버지가 모는 하얀 트럭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더니 정자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집 구해서 나가. 그래야 남자도 만나고 연애도 하고 그러지. 엄마 친구 영숙이 이모 알지? 영숙이 이모네 현영이는 영어 학원에서 남자 만났다더라. 너도 영어 학원이라도 다녀 봐. 요즘엔 뭐냐, 그런 거. 그런 것도 많이 하잖아. 취미로 하는 거.”
수연은 고무장갑을 벗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건강과 연애 두 가지 주제로 귀결되곤 한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뭐, 동호회?”
“어. 그거.”
“동호회 나가서 애인 많이 사귀긴 하더라.”
“그치?”
“유부남 애인.”
수연의 대답에 정자가 으이그, 하고 퉁박을 주었다.
“누가 그런 애인 만들래.”
“언제는 건강만 하라며.”
“건강도 하고, 연애도 해야지. 어찌된 애가 도통 연애에 관심이 없어.”
지난 연애들에 대하여 까맣게 모르는 엄마를 보며 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굳이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거라고요. 목소리 높여 봤자 돌아오는 것은 잔소리이기에 수연은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그때 마침 홀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어, 이제 일어나나 보다. 엄마 나가 봐야겠네.”
수연의 말에 정자가 홀로 나갔다. 수연도 슬쩍 그쪽을 보았다. 우르르 일어난 사람들이 아빠에게 인사를 하고, 엄마에게도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마루 위, 좌식 테이블 네 개를 붙여 놓은 상 위를 가득 채운 그릇들이 보인다. 수연은 벗어 놓았던 앞치마를 다시 걸치며 음식을 나를 때 쓰는 커다란 사각 쟁반을 꺼냈다.
“잘 부탁해, 장 팀장.”
“예, 걱정 마십시오.”
몰려 나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마당에 서서 인사를 나눈다. 흘끔 바라보니 술기운이 잔뜩 오른 이장님이 태산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모두 바깥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수연은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는 커다란 사각 쟁반을 들고 홀 쪽으로 나왔다.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 남은 반찬을 한군데로 모으고 반찬 그릇, 밥그릇을 차곡차곡 쌓으며 상을 치우는데 뒤에서 동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냅둬. 뭐 하러 이런 걸 손대. 아부지가 하면 되는데.”
“상만 치울게.”
수연이 담담히 대답을 하며 그릇을 올린 쟁반을 들었다. 뒤를 돌아 서는데 불쑥 나타난 커다란 손이 쟁반을 받아 든다.
“저도 돕겠습니다.”
술을 마신 태산의 얼굴이 붉었다.
어, 할 사이도 없이 태산이 쟁반을 가져가 버렸다. 주방 안으로 가져가더니 다시 나와 쓱쓱 그릇들을 치운다.
“됐어. 손님한테 시키면 쓰나. 장 팀장은 그만 들어가 쉬어요. 여보, 수연이 엄마. 얼른 와 상 치워야지 뭐 하는겨.”
“뭐 하긴, 설거지하지. 당신이 좀 치워!”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특유의 넉살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태산이 척척 그릇을 쌓았다.
“아이고,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세호 이놈자식은 언제 오는겨!”
손사래를 치는 동만의 말에 태산은 빙그레 웃어 주고는 묵묵히 상을 치웠다. 수연이 모은 그릇도 한 번에 가져간다. 동만도 전골냄비며 물컵 등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돕는 손이 하나 늘었다고 그 많던 그릇이 금세 사라졌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방석도 한쪽 구석에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안에서 행주를 들고나온 정자가 마지막으로 상을 닦으며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아, 이제 그만 들어가. 팀장님도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서 어쩌나.”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 준비해 주셨으니 제가 더 감사하죠.”
“아유, 맛은 무슨. 있는 동안 편히 지내요.”
“예. 어머님도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잘도 대답하는 태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었다. 주방에선 아버지 동만이 마무리 설거지를 하는 중이고, 상도 바닥도 깨끗하기만 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태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른 들어가 쉬어요. 수연이 너도 들어가라니까.”
“으응.”
엄마의 재촉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과 나란히 나가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어색하다. 태산이 나가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가야지.
그런 생각에 괜한 앞치마 끈을 붙잡고서 느릿느릿 푸는데 마루 아래에 선 태산이 수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느리게 끈을 푸는 수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쟤는 왜 안 가고 저래.
속으로 생각하며 수연이 괜히 시선을 돌리는데 태산이 말했다.
“커피 마실까?”
지금? 커피를? 수연이 황망히 눈을 깜빡이는데, 태산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아까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울려 퍼지는 태산의 목소리에 주방의 물소리가 뚝 끊겼다. 주방에서 홀을 볼 수 있게 만든 틈으로 스르륵 동만의 얼굴이 나타났다. 행주질을 하던 정자도 슬그머니 뒤를 돌아 태산과 수연을 바라보았다.
묘한 정적이 흐르며 모두가 수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부디 부모님이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부디 태연한 목소리가 나와 주기를.
“그럴까, 그럼.”
수연은 주르륵 풀리는 앞치마를 모아 쥐며 대답을 했다.
“어디로 갈까. 오는 길에 커피집 있던데, 그리로 갈까?”
마당으로 나오며 태산은 수연에게 물었다. 수연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의 자동차 키를 잡다가 태산은 깨달았다. 정신은 멀쩡해도 자신은 막걸리 세 병을 비웠으며, 덕분에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다는 것을.
“맞다, 나 술 마셨지.”
목덜미를 긁으며 태산이 중얼거리자 수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인 것 같기도 하고 한심하다는 뜻 같기도 하다.
“술도 마셨는데 그냥 들어가 쉬어. 커피 안 마셔도 돼.”
차분히 말을 하는 수연의 얼굴에 음영이 짙었다. 마당의 둥근 불빛이 드리워진 덕분에 수연의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했다.
태산은 잠시 대답을 미룬 채, 수연을 바라보았다. 불빛 아래서 여전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끝이 긴 눈매, 차분한 눈동자, 오뚝한 작은 코, 잘 웃진 않지만 어쩌다 한 번씩 웃을 때면 예쁘게 휘어지던 입술.
“커피 안 마셔도 괜찮다고.”
담담한 듯 건조한 목소리도 여전하다. 태산은 크게 숨을 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색의 하늘에 달이 빛나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달빛을 머금은 저수지의 은빛 물결이 보였다.
굳이 너와 커피를 마시고 싶어지는 건 취했기 때문인지, 달이 빛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판기 커피도 괜찮지?”
태산은 가든 앞의 커피 자판기로 향했다. 수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넣었다. 밀크커피 버튼을 누르자 위잉 소리와 함께 커피 물이 내려왔다. 안으로 손을 넣어 종이컵을 꺼내니 달큰한 커피 냄새가 물씬 풍긴다. 태산은 수연에게 따끈한 종이컵을 내밀며 말했다.
“조금만 걷자.”
태산이 먼저 걸음을 떼었다.
반달이 저수지 위에 떠 있었다. 수연 가든에서 조금 빗겨 난 산책로를 향해 걸었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의 빛이 무대의 조명 같다. 태산이 가로등 아래 칠이 벗겨진 낡은 벤치에 앉았다. 태산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다는 생각을 하며 수연도 다른 한쪽 끝에 앉았다.
아직은 찬기가 남아 있는 봄의 밤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란히 앉아 저수지를 바라볼 뿐 태산도, 수연도 말이 없었다. 수연이 다 식어 차가워진 커피를 홀짝이는데,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태산의 시선이 느껴진다.
“왜?”
수연이 물었다.
“그냥 믿기지가 않아서.”
태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연은 가만히 종이컵을 쥐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 맞다. 할 말. 나한테 할 말이 뭐였어?”
깊은 생각에서 퍼뜩 깨어난 사람처럼 태산이 물었다. 이번에는 수연이 태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뭐였는데?”
궁금해진 태산은 다시 물었다. 수연이 물끄러미 태산을 보다가 느리게 입을 떼었다.
“우리 집에서 좀 나가 줄래?”
태산의 눈이 크게 둥글어졌다. 수연은 한숨을 푸욱 쉬면서 남은 커피를 탈탈 털어 마셨다. 빨리도 묻는다, 체념과 포기를 담아 중얼거리는데 태산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웃지 말아 줄래?”
“그래서 하루 종일 날…….”
“하루 종일은 아니거든?”
새치름한 수연의 반박에 태산이 다시 크게 웃었다. 수연이 한숨을 쉰다. 태산은 쿡쿡 웃으며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이상하게 수연이 주변을 맴돈다 했었다. 유심히 자신을 보길래 무슨 할 말이 있나,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나가 달라는 말을 하려고 그랬다니.
“그만 좀 웃지?”
“어, 미안.”
태산이 억지로 입꼬리를 내렸다. 아직도 반쯤 웃는 얼굴이다. 수연은 그런 태산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태산이 말했다.
“있는 동안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할게.”
“존재 자체로 불편하거든요.”
수연의 말에 태산이 다시 웃었다. 왜 자꾸 웃냐고 질책하는 수연의 눈빛에 다시 입꼬리를 내렸다. 한 가지 부탁을 더 할까 말까. 수연은 손끝으로 종이컵의 끝을 꾹꾹 눌렀다.
“춥겠다. 들어갈까?”
태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연은 태산을 올려다보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우리 이야기는…….”
입술을 깨무는 수연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태산은 뒷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과거 두 사람의 일은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거겠지.
“부모님께는…….”
“알았어.”
태산은 선뜻 대답했다. 한쪽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수연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수연이 알면 질색을 하겠지만.
“우리가 사귄 건 비밀로 할게.”
태산의 목소리에 수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사귀었다고?”
“아니야?”
태산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수연은 기가 막혀 태산을 바라보았다. 제 버릇 누구 못 준다더니, 눈 안에 장난기는 여전한 태산이었다. 놀린다고 당할 줄 아나.
“사귀기는. 근처에도 안 갔거든?”
이번에는 태산이 눈을 크게 떴다.
“근처에도 안 갔다고?”
그건 아니지, 태산의 표정이 말하고 있다. 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뭐…….”
“와. 그럼 나는 뭐였지?”
억울함을 담은 태산의 눈동자에 오래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수연아, 하고 부르던 태산의 목소리와, 그럴 때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눈을 피했던 스무 살의 이수연과, 언제나 성큼 다가와 기어코 눈을 맞추었던 스무 살의 장태산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10년 전의 너는 나에게.
“흠……. 요즘 말로 하자면, 구썸남?”
흘러가 버린 농담처럼, 피식 웃고 지나면 그만인 사이로 남기를. 수연은 간단하게 정리했다. 태산의 한쪽 눈썹이 들린다.
“썸남? 그, 썸 타는 썸남?”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바람이 쏴아 분다. 흔들리는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태산이 하아, 어처구니없다 듯 중얼거렸다.
“썸남이라니.”
“구, 썸남.”
수연이 정정하자 태산이 기가 막혀 하핫, 헛웃음을 웃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기막힌 것인지, 수연은 부지불식간에 그만 묻고 말았다.
“그럼 뭐였는데?”
수연의 질문에 태산이 수연을 보았다. 나에게 너는.
“너는…….”
마치 두 사람의 지난날들을 읽어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래 수연을 본다. 저수지의 물결이 바람에 일렁이고, 싸늘한 밤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태산의 시선이 수연에게 머물렀다. 덕분에 수연은 숨 쉬기가 곤란해질 지경이었다.
“옛사랑.”
잠시 적막이 흘렀다. 수연의 고개가 기울어지더니 진심이냐는 듯 태산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입을 막고는 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큭……. 그게 뭐야.”
틀어막았어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수연이 웃었다.
“진짜 촌스러워.”
한참을 웃던 수연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태산이 수연의 말에 가만히 웃더니 흐음, 숨을 길게 내뱉은 뒤 저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첫사랑.”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태산의 목소리가 담백했다.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첫사랑이라고 말해 놓고는 빙긋 웃고 있었다.
수연은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저수지 위로 오리 떼가 유유히 밤물결을 갈랐다. 수연은 잠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큰 도로를 지나는 차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서너 번.
“아, 재밌었다.”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는 듯 수연이 작게 말하며 일어섰다.
“나 먼저 올라갈게.”
수연이 종이컵을 구기며 말하더니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태산은 식은 커피를 마시며 저만치 멀어지는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달이 저수지 위로 뜬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