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7
7. 스물한 살
태산이 수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교 2학년, 스물한 살의 봄이었다.
“쟤야, 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것도 모자라 같은 대학 같은 학부에 진학해 대학 동기가 되어 버린 형주가 목소리를 낮추며 태산의 어깨를 빠르게 내리쳤다.
그때 태산은 학생 식당의 창가 자리에 앉아 뜨끈한 잔치 국수의 국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릇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쟤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형주가 먼저 다급하게 말했다.
“왜, 나 교양 듣는 거 있잖아. 고대 신화의 이해.”
고대 뭐? 태산은 귀를 쑤시며 형주를 바라보았다. 태산의 시큰둥한 표정에 형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또 잊어버렸냐? 출석 안 부르고 학점 잘 준다는 그 강의 말이다. 내가 강추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너 다음에 꼭 이 강의 들어. 너 같은 날라리한테 딱 맞는 수업이야.”
그러고 보니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형주는 유리창 너머 식당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여학생을 눈으로 좇으며 태산에게 말했다.
“아무튼, 같은 조원인데 행정학과 2학년. 우리랑 동갑이고 이름은 이수연.”
열심히도 태산에게 설명을 했다. 그러다 수연과 눈이 마주쳤는지 살짝 목례를 했다. 헤벌죽하게 벌어지려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태산의 눈에는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긴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얕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를 하고는 스쳐 지나간다. 태산은 흘끔 곁눈질로 여자를 보고는 형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떠냐고.”
형주의 눈이 반짝거린다. 그럴 줄 알았다. 또 시작인 거다. 지난번에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고백도 못 하고 홀로 정리한 게 일주일도 안 지난 것 같은데, 그사이 형주는 쓰러져도 벌떡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새로운 여자를 찾아냈다. 태산은 피식 웃으며 다시 한가득 면발을 들어 올렸다.
“괜찮지? 수수한 느낌인데 뭔가 분위기 있지 않아? 나 이번엔 진짜 잘해 볼 거야. 왠지 느낌이 좋아. 남자친구도 없대. 보니까 수업, 알바, 수업, 알바 딱 그래.”
형주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늘 있던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금사빠 김형주가 혼자만의 사랑에 빠지고, 혼자 앓다가 혼자만의 이별을 겪는 것을 고등학교 3년 내내 보아 왔으니 말이다.
“얼마 전까지 다른 애 아니었어?”
“누구?”
“그…… 음대생? 아니, 영어교육학과였나? 아니다, 언론학부였던가? 아, 맞다. 남자친구 생겨서 포기했었던가?”
네가 좋다고 했던 여자가 한둘이어야지, 라는 표정으로 태산이 말하자 형주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올해는 나 진짜 연애한다. 말리지 마라.”
형주가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하며 하하하 과장되게 웃었다. 태산은 웃는 형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연은 그렇게 스치듯 지나간, 친구의 짝사랑 상대일 뿐이었다.
그 뒤로 한 학기가 지나는 동안 형주는 수연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형주의 짝사랑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태산의 일이라, 태산은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시큰둥한 얼굴로 들어주곤 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학생의 이름은 이수연.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게, 수연의 이름을 형주가 돌림 노래처럼 불렀기 때문이다.
‘수연이 도서관 간다던데. 우리도 가서 책이나 빌려다 볼까?’
‘오, 사회과학대다. 수연이 있으려나.’
‘공짜표 생겼다고, 우리 팀원 다 같이 보자 그러면 수연이도 나오려나?’
형주의 헛소리를 듣는 태산의 대답은 주로 이러했다.
“고백은 했냐? 대화를 하기는 해?”
유독 여자 앞에서 수줍음이 많은 형주였다. 틀림없이 과제 모임에서도 말 한마디 못 건넸을 게 뻔했다.
“무슨 소리야. 무려 전화번호까지 교환했다고!”
“팀원들 모두 했겠지.”
“어쨌든, 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내가 대신 말이라도 걸어 줘? 전자공학부 김형주가 좋아한다고.”
“얌마, 조용히 못 해!”
입을 틀어막는 형주를 떼어 내며 웃던 시간. 수연은 시시껄렁한 농담 속의 한 줄로 존재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부탁할게.”
형주가 검지를 곧게 펴면서 한 번만 부탁을 하자며 매달렸다.
수연이, 그러니까 얼굴도 모르겠는 이수연이라는 여자가 여름 방학이 지나면 휴학을 한다고 했단다. 장학금과 학기 중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생활하기가 아무래도 힘이 든다고 했다나.
“지방에서 서울 올라와서 유학하는 애들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월세에 식비, 폰비, 수도세, 전기세, 금방 백만 원이다? 근데 그게 그냥 최저 생활비야. 책 사 보고 옷 사 입는 그런 거 다 포함하면 어휴.”
3대째 서울 토박이인 놈이 뭐라는 건지. 더구나 자취라고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데다가 남들 월급만큼 용돈을 쓰는 놈이 생활비를 운운하다니. 태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형주를 바라보았다.
“어려울 게 뭐가 있어. 태은이는 과외 선생님 구하고, 수연이는 과외 학생 구하고. 넌 그냥 중간에서 연결만 하라고. 아니, 집에다 말만 해 줘. 조교가, 아니다. 교수님이 보장하는 실력이라고.”
형주와 대화를 나누다 우연치 않게 중학생인 태은의 과외를 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라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그 순간 형주가 눈을 빛내 버렸다.
“네가 소개해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껴서 소개시킬 거면 뭐 하러 해?”
“휴학한다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발을 동동 굴러 가며 말하는 형주였다. 누가 보면 정말 여자친구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래도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대학생한테 과외를 해. 우리 어머니 몰라? 전문 강사로만 찾고 있어. 벌써 구했을걸?”
“야, 원래 과외는 대학생들이 하는 거야. 우리만 몰랐던 거라고.”
형주가 자신과 태산을 한 번씩 가리키며 말했다. 초등 저학년부터 고3까지 대한민국에서 날고 기는 강사들에게 소수 정예로 짜여진 팀 과외를 받아 결국 한국대에 입학한 두 사람이다.
어머니의 극성과 외할아버지의 재력, 대한민국의 기형적인 사교육 환경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그럭저럭한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면 인서울 중상위권 4년제라는 결과가 최상이었을 거다. 적어도 태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바짝 쪼아서 대학을 오면 뭘 하나.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태산은 멀리 푸른 잔디밭을 보며 중얼거렸다.
유경 그룹 창업주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남의 이목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비록 방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친인척 중 하나였지만, 그래서 어머니는 더욱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 듯했다. 소위 직계라는 사람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네 아버지 고생하는 것 봐. 모르겠니?’
타고난 것들이 중요한 사회에서 아버지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평범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두각을 나타냈던, 그러다 어머니를 만나 유경 화학의 사장자리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버지를, 그 까닭에 더욱 그 능력이 빛을 발했지만 한편으로는 한계가 너무나 자명했던 아버지를 어머니는 평생 속상해했다.
네 아버지가 조금만 있는 집에 태어났어도. 차라리 내가 아니라 네 아버지가 유경 그룹의 핏줄이었더라면.
평범한 집안의 빛나는 사람을 사랑했던 어머니의 아쉬움은 남편을 제일 많이 닮은 자식이자, 장남이었던 태산에게로 향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 때문에 어릴 적에는 바둑과 서예를 배우고, 수영과 승마를 꾸준히 하면서 집에 돌아오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회화 선생님과 수업을 했다.
학교를 다닌 이후로는 방과 후 기사가 모는 차에 실려 대치동 유명 학원을 전전해야 했다. 그 덕분에 학교 숙제를 할 시간이 없어 모든 학원 일과가 끝난 후에도 밤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고 숙제를 하곤 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체 휴강을 하는 거야? 지난 학기에도 간신히 학고 면해 놓고 또?”
형주가 걱정을 했지만 태산은 씩 웃기만 했었다.
“사색 중이라고 해 두자.”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이대로 성적 맞춰 들어온 전공 수업을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듣고, 학점 받고, 졸업 후에 유학을 다녀오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든 외삼촌의 회사든 입사를 해서 그들 중의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인가.
뒤늦은 사춘기였다. 번아웃 증후군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연히 예상되었던 일이다. 경주용 말의 차안대를 푸는 순간, 말은 목적지를 잃는 법이니까.
태산은 좁은 책상보다는 넓은 운동장을 좋아했었다. 깊은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좋았고 높은 산을 숨차도록 오르는 것이 좋았다. 책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 하늘을 보려고 고개를 드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더욱 고개를 숙이라 한다. 땅을 보고 걸으라 했다. 목적지까지는 숨도 쉬지 말고 걸어야 한다고, 아니, 뛰어야 한다고 했다. 옆을 볼 여유는 없다고. 그래야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그 사회의 계급이 가장 숨 막히고도 견고한 계급이었다. 재력을 따지고 집안을 따지고 핏줄을 따졌다. 직계와 방계를 나누고 서자와 적자를 나누었다. 살아 숨만 쉬는 미라 같은 존재 앞에서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어른들을 볼 때는 기이한 감정마저 들곤 했다.
어디까지가 나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빌려 온 것인가. 인간은 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물한 살의 태산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사색은 너 혼자 잘해 보고. 태산아, 한 번만 부탁하자. 응?”
“그렇게 안타까우면 네가 직접 어머니한테 부탁해.”
“어머님 무섭단 말이야.”
모든 것이 최고이기를 바라는 어머니를 잘 아는 형주가 징징거렸다.
“수연이 걔가 고향에서는 과외로 휩쓸고 다닌대. 방학에 내려가면 줄을 선다더라. 실력은 내가 보장해.”
고작 한 계절 알아 놓고 뭘 얼마나 안다고 보장을 한다는 건지. 태산은 한숨을 쉬며 형주에게 말했다.
“그렇게 좋냐?”
“어. 그러니까 한 번만 도와줘라. 나 진짜 도와주고 싶어.”
“네 동생은 어쩌고?”
“형태는 남자라서 엄마가 남자 선생님만 붙여 주잖아.”
날은 점점 더워지는데 끈질기게 달라붙는 형주가 귀찮은 마음이 반, 저렇게 좋다는데 한 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뭐에 홀렸는지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진짜 딱 말만 꺼낼 거다.”
“응. 응.”
“평생 형님으로 모셔라.”
“응, 응. 고맙다 진짜.”
형주가 신이 나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식지 않는 순수한 열정을 부러워해야 하는 건지 한심해해야 하는 건지. 저 애달픈 마음, 다음 학기엔 다른 여자로 옮겨 간다는 것에 태산은 새끼손가락 하나쯤 걸 수 있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걸. 헛걸음하겠네.”
당연히 채용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건 형주도 잘 알고 있다. 한 번의 기회라도 주고 싶은 마음일 거다. 태산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말았다.
형주가 추천하더라,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학생인데 마침 한 타임이 비었다더라, 자기 동생 때문에 알아봤는데 여학생이라 포기했더라.
태산은 형주를 위해서 나름 공을 들여 이야기를 전했다. 그 정도가 자신이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니 그냥 한 번 면접이라도 보는 것은 어떤지, 넌지시 권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입에서 먼저 만나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쯤에 태은이 다니던 학원의 유명 강사와 고등부 학생이 소위 연애를 해서 여학생이 임신을 하는 바람에 학원이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다고 했다.
태은이 죽어도 오피스텔로 찾아가야 하는 그룹 과외는 하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던 중에 면접이 결정되었다. 거기까지가 태산이 아는 전부였다.
“그 학생 말이다.”
그 뒤로 2주쯤 흘렀을까. 주말이라 본가에 들러 식사를 하던 중에 어머니 영혜가 말했다.
“누구요?”
“태은이 과외 선생님.”
그때야 알았다. 이름만 아는 그 여학생이 면접을 거쳐 태은의 과외 교사가 되었다는 것을.
“형주에게 좋은 학생 소개시켜 줘서 고맙다고 전해 줘. 태은이가 잘 따르네.”
“예. 형주가 좋아하겠네요.”
“너는 언제쯤 들어올래.”
본가에 들르는 날이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질문에 태산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너 그러다 영영 내쫓기는 수가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구요.”
태산의 차분한 대답에 영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산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홀연히 독립을 선언했다. 받아 온 성적표는 간신히 학사 경고만 면한 상태.
깜짝 놀란 영혜는 모든 경제적인 지원을 끊는다고 했지만 태산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방세를 충당하겠다는 기막힌 말을 하더니, 자퇴까지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 말에 오히려 영혜가 식겁했고, 부디 대학만은 제때 졸업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독립을 했다. 물론 늘 아들인 태산의 편이었던 아버지 장현준의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굴 닮아서 고집이 저렇게 셀까.”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은근히 태산을 돕고 있는 아버지가 으흠 헛기침을 했다.
밖에서는 타고난 카리스마가 있는 유능한 전문 경영인.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시원시원한 애처가. 태산이 가장 존경하며 좋아하는 사람. 현준이 영혜 몰래 찡긋 윙크를 했다.
“여자친구는 아직이야?”
현준이 화제를 돌리며 태산에게 묻는데 영혜가 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여자친구는 무슨! 얘가 지금 그럴 때예요? 빨리 정신 차리라고 해야지 당신도 참.”
“오빠가 여친을 사귄다고? 으엑.”
상상도 하기 싫다는 표정을 짓는 중2병 걸린 태은과 형 따위에겐 일말의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밥을 먹는 태경. 늘 비슷한 본가의 풍경이었다.
* * *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아마도 수연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하느라 처음으로 방학 기간에 본가에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학교 근처에 얻은 하숙방에는 선풍기 한 대가 전부였으니까.
한 달에 40만 원. 원룸형 방에는 작은 욕실이 있고, 세탁기는 층마다 공동으로 있는 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입구에 도어락이 따로 있고, 꼭대기 층의 주인집 주방에서 간단한 아침과 저녁이 제공되는 하숙집이 부모님이 서울에 며칠이나 머물며 고르고 고른 수연의 거처였다.
고르고 골랐지만 창문을 열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 옆 건물이 보였다. 눈이 탁 트이는 저수지의 풍경 대신 화강암 외장재를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여름 방학이었지만 계절 학기 수업을 신청한 덕분에 수연은 매일 학교에 나가야 했다. 어차피 내려가지 못한 방학, 학기 중에 여유가 있도록 계절 학기 수업을 바짝 들어 놓을 생각이다.
기왕 서울에 남은 거 욕심내서 두 개나 신청을 했다. 월화수목금, 매일 아침 9시에 세 시간짜리 강의를 듣고 점심 먹은 뒤 1시부터 다시 세 시간짜리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끝나면 과외 수업을 하러 갔다. 두 시간씩 주 2회 수업을 하는 과외 아르바이트가 세 개. 도합 여섯 번의 수업이 있으니 매일 저녁은 과외로 꽉 찼다.
두 시간짜리 수업을 두 번 하고 나면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늦은 밤. 밤 10시를 넘겨 하숙집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자면, 발목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걷는 것 같았다.
유난히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던 날, 그날따라 평상에 앉아 큼지막이 썬 수박을 먹고 싶었다. 더운 여름밤 아버지가 모기향을 곳곳에 피우면, 엄마가 수박을 썩썩 썰어 주고, 키가 훌쩍 커 버린 남동생들이 수박 씨앗을 멀리 뱉으며 놀던.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른 풍경이 유난히 그리워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날. 수연은 밤사이 식은땀이 줄줄 날 정도로 몸살을 앓았다.
아니, 어쩌면 몸살을 앓아서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진초록인, 여름 내내 달큰한 복숭아향이 가득한, 멀리서부터 수연을 알아보고 웡웡 짖는 진순이가 있는 곳.
수연은 다음 날 처음으로 수업을 빠졌다. 서울로 올라온 뒤 딱 한 번 있었던 일이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교수님께 제출할 통원 내역서도 받은 그날 하루를 쉬었는데, 하필 그날 과제를 통보했다고 했다.
‘연극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이었는데, 두 명씩 짝을 지어 연극을 관람하고 서로 다른 입장에서 토론한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어디 보자……. 이수연……. 이수연…….”
수업이 끝난 후 교단으로 내려가 통원 내역서를 내며 지난 수업의 결석을 설명하자, 교수님이 출석부를 짚어 내리며 수연의 이름을 찾았다. 워낙 출석을 부르지 않기로 유명한 수업인데, 어제는 둘씩 짝을 지어 주는 것 때문에 출결 체크를 했는지 빗금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수연이는 장태산. 얘랑 하면 되겠다. 과제 설명은 들었지?”
“네에.”
수연은 대답하며 출석부를 내려다보았다. 지난 시간 수업에 빠진 사람들을 임의로 짝을 지어 준 모양인데, 장태산이라는 이름 옆에 ‘(재)’라고 쓰여 있었다. 재수강이라는 뜻이다.
이름 옆 칸에는 전기공학부라는 소속과 수연과 앞자리가 같은 학번도 쓰여 있었다. 출석부가 정식으로 나오던 날과 과제를 내주던 어제, 딱 두 번 출석을 불렀는데 두 번 다 빠졌는지 빗금이 두 개다.
“오늘 안 왔나? 잘 찾아봐.”
뿔테 안경을 쓴 여자 교수님이 격려하듯 수연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부터 수연은 장태산이라는 불량 학생을 기다려야 했다.
그 후로 이틀이 지났다. 매일 수업이 있으니 두 번의 수업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과제 제출 기한은 점점 다가왔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자니 얼척이 없어 웃음이 나기도 했다. 확실한 건, 처음 본 얼굴이라면 그 사람이 장태산이라는 거다.
이수연은 장태산을 찾는데, 장태산은 이수연을 찾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 뒤로 한 번도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 강의 따위 상관없는 건지 장태산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도 수연은 수업 시간 도중 문이 열릴 때마다 절로 뒤를 돌아보았다. 장태산이 들어오나 싶어서.
딱 한 번, 그것도 아파서 빠졌을 뿐인데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사람이 하필 파트너라니. 수연은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면 재수강은 왜 하는 건지.
그다음 수업이 끝나고 수연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이름만 아는 어떤 놈 때문에 과제를 날릴 수는 없었다. 장태산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전기공학부라는 것. 학번이 같다는 것. 그 두 가지뿐이었다.
일단 땀 뻘뻘 흘리며 공대 건물을 찾았다. 그리고 학부 사무실을 찾아갔다. 자신의 이름을 대고 학생증도 보여 주고 강의명도 대며 태산의 전화번호를 물었지만, 조교에게서 개인 정보는 알려 줄 수가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수연은 연락처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전화 한 통만이라도 걸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수연을 가엾게 여긴 조교가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 주었지만 응답이 없으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기계음만 들려왔다.
수연은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와 벤치에 앉았다. 7월의 오후는 목이 바싹바싹 탄다. 가방에서 미지근한 생수를 꺼내 마시며 수연은 생각했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공과 대학에서 장태산 찾기라니. 대체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보다 장태산이라는 학생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같이 수업 들었던 사람들 중에 공대생이 누가 있었더라. 알음알음 알아보면 누군가 알고 있을까. 갑자기 전화해서 장태산을 아느냐 물어보면 황당해하겠지. 그래도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 막막한 마음으로 빈 생수병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태산, 같이 안 갈 거야?”
수연의 고개를 저절로 돌아가게 하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태산은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후문으로 나가는 샛길은 무성한 나무가 가득한 숲길이라 들어서기만 해도 더위가 한풀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스커피가 담긴 컵을 옆에 대충 놓고 다리를 편하게 뻗었다. 두 팔은 벤치의 등받이 부분에 걸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름도 모르겠고, 나이도 모르겠는 나무들은 높고도 곧았다. 시야 가득 무성한 진초록의 잎이 보였다. 초록 잎사귀가 바람에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동기들에게 붙잡혀 축구 한 게임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2차로 PC방에 가서 게임 한판하자는 걸 거절하고 자취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축구를 했는데 아픈 건 어깨와 팔이다. 태산은 한쪽 팔로 다른 팔을 툭툭 두드렸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인 어깨와 팔뚝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보름간 방조제에서 혹사당한 몸뚱어리가 휴식을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도 재밌었지.
태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1학년 여름 방학에 반은 장난으로 시작한, 작은아버지가 소개해 준 현장 아르바이트는 벌써 세 번째였다. 숨이 턱턱 막히게 더운 날, 희뿌연 시멘트 가루가 날리는 건설 현장의 아르바이트는 억 소리 나게 힘들지만 이상한 뿌듯함이 있었다.
‘정신이 바짝 들지?’
첫날 고강도의 노동 후에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때 작은아버지가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말을 했었다. 일당 10만 원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 정도면 한 달도 할 수 있겠다 허세를 떨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입방정을 떤 대가로 꼼짝없이 한 달을 머물러야 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시멘트 포대를 어깨에 지면 절절 끓는 바윗덩이가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미네랄 보충을 위해서 일부러 소금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힘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일이 나를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지만, 입에 소금을 물고 있는 건지 땀이 굳어 소금이 된 건지도 헷갈렸지만 매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나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이 드넓은 땅이 과연 변하긴 할까. 고작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나 싶은데, 돌아보면 길이 나 있고 돌아보면 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황무지가 파헤쳐지고 철근이 세워지고 길이 이어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노라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이번 방학엔 재수강을 신청한 강의가 있어 아르바이트를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작은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카 용돈 챙겨 주려고 전화를 했다면서 딱 일주일만 내려오라 했다. 예정되어 있던 인부 한 명이 조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태산은 크게 망설이지 않고 내려갔다. 덕분에 강의는 내리 일주일간 결석을 했지만, 출석을 부르지 않는 수업이니 시험 보는 날만 나가면 별 탈은 없을 거였다. 학점에 연연하느라 듣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F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신청한 거라 열심히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높이 뻗은 나무와 무성한 잎.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태산은 초록의 그늘 아래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나마 무더위를 식혀 주는 청량한 풍경이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어 가만히 눈을 감았던 그때.
“네가 장태산이니?”
그대로 눈만 떠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거꾸로 보이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행정학과 2학년 이수연이라고 해.”
계절 학기로 연극의 이해 수업 듣고 있지? 여자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과제가 있었어. 중간고사까지 제출해야 하는데…….
이수연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담담하게 과제에 대해 설명을 했다. 열등생에게 천천히 풀어서 설명을 해 주는 모범생처럼 차분히 말을 잇는데, 태산은 고요 속에 잠긴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여자의 목소리에 잠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다.
이수연. 형주의 짝사랑 상대. 태은의 과외 선생님.
얼굴도 실체도 없이 그저 세 글자 이름으로 막연히 알고 있던 여자. 그 여자를 실제로 마주한 순간일 뿐인데, 어째서 비로소 만난 기분이 드는 걸까. 돌고 돌아 마침내 만난 것 같은 이 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태산은 물끄러미 수연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