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Corpse-Collecting Warrior RAW novel - Chapter 301
승천과 고향(1)
푸욱―
심장을 꿰뚫어 헤집는 세검.
그륵!
주둥이에서 왈칵 쏟아지는 피거품.
소머리 거인의 눈에서 생기가 서서히 지워졌다. 에버론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검을 뽑아들었다.
“쯧.”
성벽 위는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수두룩하게 널브러진 마물들의 사체 사이, 처참하게 찢겨나간 경비단 병사들의 시신.
격렬한 전투에서 생존한 병사들은, 숨만 붙어 꿈틀거리는 고위 마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에버론은 입 안에 고인 피를 모아 뱉었다. 마물의 피는 씁쓸하고 비릿했다.
“···너무 많이 죽었어.”
의무병을 부르짖는 외침. 고통에 겨운 비명.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가족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하나의 어지러운 장송곡이 되어간다.
댈런의 기적으로 모든 병력이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진 전투는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대다수의 마물들이 금강궁의 요새화에 동원됐다고는 하지만, 미궁도시의 곳곳에 자리 잡은 마물의 군세도 여전히 상당수.
심지어 놈들은 성벽 등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한 상태였다. 수성자의 입장에서 막아낼 때도 힘겨웠던 마물 군세를, 이제는 공격자의 입장으로 상대해야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승리를 거뒀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전투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던 기이한 일을 경계해야 할까.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부관이 그에게 다가왔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이쪽 근방은 금방 정리될 것 같습니다.”
“그래?”
“예. 들어보니 다른 쪽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뒤 없이 달려들던 마물들이, 갑자기 꼬리를 말고 뿔뿔이 흩어졌다더군요. 이게 참······.”
미심쩍은 듯한 어조로 말끝을 늘이는 부관. 본인이 보고하는 것임에도 스스로 믿기 힘든 내용이기 때문이겠지.
그건 에버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전투는 호각, 혹은 마물들에게 조금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악마들의 지휘를 받는 마물 군세는, 방어자의 이득을 가능한 대로 취해가며 성벽을 지켜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개체 하나하나가 강력한 놈들인데, 제대로 된 전술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대.
허나 전투가 가장 격렬한 순간들로 접어들 즈음, 마물과 악마들은 돌연 꽁무니를 빼고 도시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혹시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부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은 아니었다.
승리의 도취감에 젖어있기에, 이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글쎄다.”
우선 경계를 늦추지 말라 명령한 에버론은 곧장 성벽의 첨탑으로 향했다.
공성 병기에 반쯤 박살 난 첨탑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 위에서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 역시 그랬다.
널브러진 마물의 조각들 사이, 검은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새하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소녀의 모습.
누가 보면 악마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외견이었다. 수십 년 이상 그녀를 보좌해온 에버론에게도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할망구. 성벽 위는 슬슬 정리된 것 같은데.”
“······.”
“악마들이 전부 퇴각한 거, 함정은 아니지?”
소녀가 웃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에버론. 뭐가 보이나요?”
“···뭐?”
“뭐가 보이는지 말해주세요.”
에버론은 머리를 긁적이며 사방을 둘러봤다.
높이 솟은 첨탑의 시야는 탁 트여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건 불타는 거리, 무너진 건물들, 아비규환이 된 사람들과 어떻게든 질서를 유지하려는 병사들.
시선을 조금 들면 구멍이 듬성듬성 난 순은과 청동 성벽이 보였다. 반대편에는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백금 성벽도 있었다.
그리고 백금 성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악신에게 함락된 금강궁이 그 너머에 있을 터.
생각해보니 악마들이 도망갔다면 지금이야말로 금강궁을 탈환할 기회···.
“그쪽이 아니랍니다, 에버론. 시선을 올려보세요.”
부드러운 선각자의 목소리. 에버론은 무심결에 시선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는 그제야 뭐가 보이냐던 선각자의 되물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하늘이 개고 있군.”
“예. 악신의 구름이 흩어지고 있답니다.”
하늘을 뒤덮었던 붉은 구름이 옅어지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중에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조금만 집중하니 확실하게 보였다.
아직까지는 초월자가 집중해야만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의 느린 속도. 허나 확실한 건 그 너머의 햇빛이 아주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시선을 조금 돌리니 금강궁 위에 내려앉았던 붉은 소용돌이 역시 흩어지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위쪽에 하늘 일부분이 깨진 것 같은 이질적인 색채가 맴도는 것 역시 보였다.
“저긴 일곱 번째 구역 아니야?”
“맞아요. 댈런이 에낙사구스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온 흔적이죠.”
알리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녀의 발이 땅에서 둥실 떠오르고, 신비한 전성이 나직하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벌어진 악신과 영웅의 싸움은, 함께 지옥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한 악신을 중심으로 뭉친 대지옥의 권능과, 한 남자를 중심으로 뭉친 수백 세계선의 희망이 충돌했어요.]우주적인 색채로 번뜩이는 눈. 첨탑 위를 또렷하게 점령하는 예언의 공능.
허나 평소와 달리 선각자의 목소리는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계와 세계가 서로를 깎으며 소멸했습니다. 환상세계의 일축이 붕괴했어요. 무너진 두 기둥 중 하나는 우리가 증오하는 죄과의 총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친애하는 영웅의······.]전성은 이어지지 못했다.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온 그녀의 발끝이 석재 바닥에 닿았다.
“댈런의 업···그 권능을 담는 영역이 소멸했습니다.”
“······.”
“우리는 승리했지만···이 승리의 주역은 제 눈에 보이지 않는군요.”
선각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하늘 어딘가를 올려다보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냈다.
“부디 그의 운명이 고대의 승천자와 같은 길을 걸었기를. 그래서 우리의 감사를 들을 수 있기를.”
흩어져가는 악신의 구름 사이로, 어렴풋하게 한 줄기 햇살이 비쳤다.
붉은 노을빛이었다.
***
노을이 지고 있었다.
거대도시 팔시온의 해 질 녘은 붐비는 시간대였다.
장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상인.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이 오크 노동자. 해가 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시로 들어온 엘프 왕국발 상단 마차들과, 그런 사람들 모두를 상대로 문을 연 식당 주인들까지.
식당에 고용된 아이들은 거리를 종횡무진 질주하며 동화 한 닢어치 호객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고급진 털옷을 걸친 부부가 그 비슷한 또래의 두 딸과 함께 저녁 외식할 식당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는 집으로, 누군가는 가게로, 누군가는 술집과 도박장으로, 뒷골목이나 성문으로 향했다.
사람이 뒤섞이고 종족과 계급이 뒤섞이는 청동 구역다운 모습.
짙은 색 로브에 두건을 깊게 눌러쓴 성기사는, 대로변의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대로변과 뒷골목 사이에 걸친 커다란 주점이었다.
“크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 산적 놈의 수염을 이렇게···!”
“씨발, 저번에도 갚는다고 하더니. 대체 언제까지 미룰 거야?”
“우웨엑! 브에에엑!”
왁자지껄하고 더러운 주점 홀을 지나.
“그러면 우리가 찾는 건 이 새끼가 아니라 이 새끼 동생···.”
“쉿. 밖에 누구 있다.”
좌우로 문과 좁은 복도가 늘어선, 조금 더 조용한 방들을 거쳐간다.
사람 두 명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너비의 복도 끝에는, 투박한 나무 문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까마귀 둥지] [영업시간 : 오후 6시 ~ 오전 4시]성기사는 문 위의 오래된 느낌이 물씬 나는 명패를 조금 쓸어보다, 거침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딸랑-
문 안쪽은 바깥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과 의자들. 천장에 규칙적으로 박힌 마력석에서 비롯한 은은한 조명.
순은 구역에서나 볼 법한 운치 있는 술집이었지만, 이곳에 앉아있는 사람은 단 셋뿐이었다.
바 테이블 앞의 노인과 맞은편의 여자, 그리고 능숙하게 잔을 닦는 바텐더까지 셋.
“···그런데 오늘 루시아 경도 오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 소식에 마탑 업무를 죄다 토미한테 떠넘기고 달려왔는데···오.”
바텐더가 먼저 눈길을 줬고, 성기사의 이름을 부르던 노인이 그 눈길을 따라가다 그녀를 발견했다.
바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검은 머리칼의 여자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도착했네. 오랜만이야, 루시아.”
“다들 오랜만이네. 루시아, 탑주님, 그리고 버번. 아, 저는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이요.”
“성기사가 술 마셔도 되는 거야?”
시에나가 짓궂은 눈웃음을 머금었다. 루시아는 픽 웃고서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두건과 로브를 벗자 긴 금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때 반쯤 빈 잔을 만지작거리던 펠버가 문득 물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구만. 어려운 임무였나?”
“아뇨. 흑마법사 새끼들이 너무 꽁꽁 숨어버린 탓이죠. 악신도 없이 악마 나부랭이들한테 의지하는 주제에, 숨는 재주 하나는 전쟁 전보다 더 좋아져서.”
“전쟁이 끝난 지 5년이나 지났으니까. 성기사단의 악마 숭배자 토벌도 5년이나 된 거고. 그 정도면 도망치는 거 하나는 능숙해질 시간 아니겠나. 그치들도 악마 살해자이자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검께 대들 용기는 없을 테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남은 잔을 쭉 들이키는 대마법사. 능글맞은 노인의 표정에 루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요. 벌써 5년이나 흘렀네요.”
5년.
에낙사구스가 악마 군세를 이끌고 온 ‘대침공’ 이후 흐른 시간이었다.
그 자체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큰 변곡점을 겪은 대륙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금강궁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악신 에낙사구스는 다섯 대지옥과 함께 소멸했다.
물론 악신이 사라졌다 해서 대륙에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었다.
대륙 곳곳에 암약하던 흑마법사와 사교도들의 기세가 꺾였고, 본단을 되찾은 성기사단은 곧바로 대대적인 토벌을 선포.
악마 살해자 루시아와 작은 검성 파른을 중심으로, 성기사와 흑마법사 사이에 크고 작은 국지전이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국이 무너진 남부 역시 혼란의 도가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이 사분오열해서 저마다의 나라를 건립하는 통에, 이쪽은 본격적인 전쟁이 오 년째 계속되는 중이었으니까.
동부에서는 칼날 산맥의 드워프들이 돌아온 칼라드라쿰 왕조를 맞이하며 왕국을 선포했다.
항간에는 원래 그들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부 삼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렇게 잔 채운 것도 술값에 넣을 거야.”
“···크흠. 엄밀히 말하면 이건 내가 채운 술이잖나.”
“하지만 우리 가게 술이지. 시간을 돌린 것뿐이잖아?”
“그래서 아카샤는 언제까지 수행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했지? 청린용이 허물 벗는 데는 한두 해면 족하다고 하지 않았나?”
“말 돌리지 말고.”
몰래 술잔의 시간을 돌려 다시 채우던 펠버와, 그걸 귀신같이 잡아내 타박하는 시에나의 목소리.
웃음이 나오면서도 편안한 시끌거림을 들으며 루시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 년 사이에 전쟁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보다 긍정적인 변화들도 상당했다.
대침공 당시 피난 선박을 보낸 걸 계기로, 동쪽 바다 너머의 엘프들은 대륙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그전까지의 소극적인 무역과 외교로는, 무너진 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노동력과 자재를 충분히 수입할 수 없었기 때문.
그 과정에서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간 하이 오크 용역자 수십 명이, 채식주의자 엘프의 땅에 건너간 건 웃지 못할 헤프닝이기도 했다.
‘일당을 받을 때마다 고기를 부르짖는 통에 수백 년 전에 중지된 사냥 전통을 다시 부활시켰다지. 일을 너무 잘해서 쫓아낼 수는 없었고.’
북부 차르국은 차리나의 사후 왕실 내 암투가 한창. 서부에서는 유적지 한탕을 위해 대사막으로 떠나는 탐험이 유행.
그리고 온갖 범국가적 사건들 사이에서 중간 무역지대를 꿰찬 도시연합은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미궁도시 역시 순식간에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고, 근래 들어서는 회복기가 아닌 성장기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으니.
[원래 생각이 깊은 아이였지만, 오늘따라 상념에 더 잠긴 듯한데. 여기 주문한 술 있다. 마시고 가라앉혀라.]“감사합니다, 버번.”
루시아는 바텐더가 준 잔을 천천히 들이켰다.
갈색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저릿한 기분 좋음을 선사했다.
“······후우.”
어쨌든 대침공 이후의 어지러운 시국은 동시에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서막이기도 했다.
적어도 세계가 끝장날 뻔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 중 하나인 루시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문득 그리워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칼에 키와 덩치는 하이 오크에 버금가지만, 검은 눈 안에는 그 누구보다 깊고 따뜻한 내면이 있는 남자.
한때는 전장과 여로에서 일 년의 대부분을 함께했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한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사람.
“···음?”
술잔을 내려놓는 손에 무언가 부딪혔다. 신기하게 생긴 작은 병이었다.
완전히 투명한 재질의 병에 그 중앙부를 감싼 기묘한 붉은 천, 그 위에 새겨진 알아보지 못할 검고 흰 글씨들.
검은 내용물에는 송글송글 기포가 맺혀 있었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버번이 입을 열었다.
[가게 단골이 네 앞으로 달아둔 음료다.]“···예?”
[저번 주에 들러서 네 안부를 묻고 가더군. 남긴 말도 꽤 있으니 마시면서 듣도록 해라.]“······.”
[하여간 어떻게 서로 오는 날이 이렇게 안 겹치는지. 내가 무슨 전서구도 아니고 언령의 권능을 이렇게 낭비해야 하겠나?]루시아는 고룡의 투덜거림을 뒤로 한 채 병에 손을 뻗었다.
몇 번 더듬거리다 뚜껑을 비틀어 뽑으니 칙 하는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들이키자 느껴지는 희미한 달짝지근함. 그리고 동시에 입과 목을 강타하는 기포의 아릿함.
“······으에.”
[그거 처음 마시면 꽤 아릴 거요. 서부 광천수랑 비슷하긴 한데, 좀 더 쎄서.]휘둥그레진 눈으로 병을 바라보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버번의 전성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먹다 보면 괜찮을 거요. 입에 맞았으면 좋겠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니까.]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