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1009)
러스트 [RUST]-1009
기순의 가느다란 실눈이 일순 커졌다.
“뭐··· 뭐라고? 지금 캄보디아 군부를 무너뜨렸다고?”
[네. 캄보디아 군부와 태국을 공격한 군단을 없애셨습니다.]말 그대로 걸렸다 하면 그냥 밀어버리는 마루였다.
‘아니. 왜?’
한국 대통령, 제국 총리 덴 브라운과 조금 전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바로 캄보디아를 치웠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좋지 않았다.
“디아나.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한국과 제국에서 특사가 왔다는 거 전달하지 않았어? 한국 대통령과 제국 총리가 한 말 그거 전달되지 않은 거야?”
[전달했습니다.]“내가 이야기한 것도? 신성 왕국이 한국과 제국의 힘을 빼고 견제하기 위해서 동남아를 공격한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전달했습니다.]“그런데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캄보디아를 공격했다고?”
[캄보디아가 싱크홀 닫겠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태국을 공격했습니다.]“미친. 캄보디아는 왜 그런 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연결해줘.”
[현재 태국으로 넘어온 캄보디아군을 처리하고 캄보디아에 있는 싱크홀을 정리하기 위해 출발하셔서 통신 불가능합니다.]죽음을 이용해서 이동한다는 뜻이었다. 기순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과 제국 모두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무시한 것도 모자라 신성 왕국이 동남아를 통째로 손아귀에 넣고 흔들려고 한다고 판단할 것이다.
‘동남아 공격이 두 나라를 경제적으로 예속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설명해야 하는데.’
마루의 성격상 그럴 리는 없지만, 또 몰랐다. 그렇다고 한 번 경고를 받았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었다.
지금 동남아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는지에 따라, 신성 왕국과 한국. 그리고 제국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결정되지 않을까?
‘아니··· 제국과는 이미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봐야겠군.’
제법 인연이 긴, 덴 브라운이 총통으로 있다지만. 기순은 냉정했다. 덴 브라운도 그러지 않았는가? 황제가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황제만 그럴까? 제국 사람들은 어떨까? 신성 왕국의 행동에 인내심을 보여줄까?
‘그럴 리 없겠지.’
제국의 전신은 미합중국이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은 불안 요소를 그냥 두지 않았다. 미합중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도. 쪼개는 것도. 묻어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행태가 지금은 변했을까?
‘방법을 찾아야 해.’
일단 동남아 사람들의 여론을 돌려야 했다. 한국과 제국도 마찬가지였고.
어떻게?
아니. 방법도 방법이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태국 사태였으니, 어째서 태국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는지 여론전을 시작해야겠네.’
젠장. 마루 녀석 일을 치기 전, 작업 했으면 좋았잖아.
한국 식인귀 정권이 여론을 장악해 여론전을 시작했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어떤 사태를 인지하기 전 효과적인 것이지, 이미 마음속에 판단이 선 뒤에는 효과가 낮았다.
효과가 작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위험까지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그랬다.
태국 국민은 신앙의 대상인 신수와 왕가를 잃었다. 경비대와 근위대로 대표되는 태국 최고의 정예군과 능력자까지 모조리.
미얀마 사람들은 징병으로 군부에 끌려간 아들‧딸을 잃었다. 그들은 분명 군정권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돌아오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국민은 수도와 함께 능력자 대부분을 잃었다. 그저 수도에 살고 있던 일반 시민까지 전부.
캄보디아는 태국으로 향한 병력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잃은 옛땅을 되찾을 기회를 잃었다.
그리고 한국과 제국은 동남아 시장과 자원 수급을 통째로 잃고 있었다. 이제 막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있었고 높았던 실업률이 낮아지고 있었는데, 한 방에 날아간 것.
한국과 제국 사람들이 소중한 동남아 시장을 날려버린 신성 왕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동남아 사람들은?
어쨌든 이미 신성 왕국에 부정적으로 돌아선 사람들에게 여론 작업을 해야 했다.
어떻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방법이 기순이 정말 싫어하는 방법이었을 뿐···.
기순의 실눈이 꾹 감겼다.
“디아나. 여론전 준비해. 태국부터. 태국 정부가 인신 공양했고 신수라고 했던 코끼리가 사실은 변이 괴물이었다는 걸 알리자. 신성한 빛이 아니라 세뇌의 빛이었다고.”
[초두효과 때문에 효과적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초두효과(Primacy effect)란 심리학 용어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내용의 진위보다, 먼저 제시된 정보가 추후 알게 된 정보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말 그대로 뇌에 처음 입력된 정보가 나중에 입력된 정보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신성 왕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먼저 자리 잡았으니, 그걸 되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인공지능 디아나의 이야기였다.
“알아. 이대로 가면 공적(公敵)이 된다. 신성 왕국이 공공(公共)의 적(敵)이 된다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겠지만, 우리에겐 아직 지켜야 할 게 많이 남았어.”
[그분께서 권능을 사용하시면 전술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근처에 있는 CCTV나 전자장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실제 촬영 장면이 없어, 여론 전에 사용할 영상과 사진이 없습니다.]이미 머리에 박힌 인상을 깨려면 초두효과 이상의 강렬한 정보가 필요했다. 문제는 그런 자료가 없다는 것. 마루가 죽음을 펼치면 전자기기가 먹통으로 변하니,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현장을 알 수 없었다.
[현실감 있는 정보를 전달하고 필요한 사진과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보정 작업이 필요합니다. 허가하시겠습니까?]인공지능을 통한 정보 가공은 신성 왕국에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던 영역이었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가공된 정보는 언론이 그렇듯,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을 이용한 정보가공에 반대했던 기순은 선택했다.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라도 여론을 바꾸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신성 왕국과 다른 나라들은 무력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이었다.
“마루···. 하- 왕님에게 상황 보고하고, 실행해.”
[알겠습니다. 보고 후, 여론전 시작합니다.]아니라고 생각하면, 하지 말라고 하겠지.
‘최악은 피했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입에서 탄 맛이 맴도는 것 같은 기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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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디아나는 기순의 외교 상황 보고와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보의 가공과 재가공을 활용한 여론전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여론전이라.”
여론전이 얼마나 골치 아픈지 여러 차례 경험했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마루였다.
[기순 외교 담당이 화상 통화를 요청했습니다. 연결할까요?]“그래.”
[왕님아. 제발. 진짜로 플리즈(Please).]기순은 시작부터 애원했다. 동남아 살아남은 나라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고.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정권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을 본 나라 지배층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마루의 별명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왕 살해자, 신수 사냥꾼, 과부 제조기, 정부의 악몽, 국가의 종말, 모든 어머니의 슬픔 등···. 미묘한 별명에서부터 죽음의 군주, 죽음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존재 자체가 재앙처럼 통하기 시작했다.
“흠- 그래서 그런가?”
최근 들어 죽음의 물리력이 강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수도를 통째로 담가버릴 수 있었다.
[뭔데? 뭐가 그래서 그런데?]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마루의 ‘그런가?’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기순이었다.
“태국 신수를 잡은 뒤로 죽음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뉴클립스의 공간 씹기 사정거리도 더 늘어난 것 같고. 담담한 마루의 말에 기순은 실눈을 감았다.
경험치가 차서 강해진 건지, 신앙을 먹은 괴물과 태국 왕을 죽여서 그런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죽음의 물리력이 얼마나 강해졌으면 인도네시아 수도를 통째로 가라앉혔겠나.
“그건 오해야. 지하수가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고, 지반도 약해져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게 가라앉을 줄은 몰랐어.”
[어쨌든 너 때문에 가라앉은 건 맞잖아. 아니냐? 맞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제 어지간한 화기로는 넝쿨 잎사귀를 뚫지 못할 것 같다.”
[총화기라면 미사일 같은 것도 막는다는 거지?]처음 죽음의 넝쿨은 그랬다. 총화기로 공격받으면 끊기고 잎사귀가 뚫렸다. 그래서 적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죽음이 소모됐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물리력이 강해지고 있었는데, 강해졌다는 표현에 인색한 마루가 강해졌다고 말할 정도에,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뚫리지 않을 것 같다고 할 정도라니.
마루의 약점은 미사일이나 전술핵 같은 것이었다. 근데 이젠 그걸로 저지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가 됐다는 것.
“해봐야겠지만 아마도.”
[해보지 말자. 우리 목표가 평화···는 아니었지. 그래. 우리 목표는 안전과 생존이잖아. 굳이 위험한 짓을 할 이유는 없잖아.]무슨 소리래? 하는 표정의 마루를 향해 기순이 매달렸다.
[그러니까 왕님아. 진짜- 썰기 전에 딱 3초만 참자. ‘이 새끼들 치워야겠군.’ 그런 생각이 들면 딱 3초만 참고.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주고 썰면 안 될까? 깜빡이 좀 켜자. 제발.]죽음이 더 강해졌다며? 그렇지 않아도 죽기 힘은 몸이었는데, 더 강해졌으면 강해진 만큼 여유를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기순의 애원에 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네 예상대로 신앙을 먹은 놈들이 강해졌다. 그냥 설렁설렁 쉽게 이긴 게 아니었어.”
[······.]사라진 줄 알았던 위기 감지가 다시 발동될 정도였다. 이제까지 위기 감지가 발동되지 않았다는 건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마루와 기순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인공지능 디아나와 사만다를 주축으로 여론전이 시작됐다.
동남아 여러 나라는 인터넷을 스마트폰으로 접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는 것은 무선 인터넷을 주로 활용한다는 뜻이었고, 무선 인터넷 회선 해킹과 탈취는 초고성능 인공지능에는 식은 죽 먹기였다.
순식간에 방송앱과 인터넷 채널이 만들어졌고 ‘좋아요.’ 추천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그리고 시작된 영상.
태국 왕가가 인신 공양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신수라고 떠받들던 코끼리가 사실은 사람 죽이는 살인 코끼리였다는 영상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사기다. 이거 전부 사기야.’
‘우리 친척 태국 왕성 근처에 사는데 연락이 끊겼어.’
‘안됐네. 신성 왕국에서 죽였겠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분노한 댓글이 달렸지만, 순식간에 지워졌고 그 자리를 다른 댓글이 채웠다.
‘어쩐지 왕성에 사는 친척들 명절 때마다 모였었는데 갑자기 연락을 끊더라.’
‘괴물 코끼리와 왕한테 세뇌당해서 그렇지 뭐.’
‘인신 공양? 진짜 미쳤네.’
급기야 스마트폰이 저절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자기가 쓴 댓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지만, 로그를 보면 그가 댓글을 작성한 것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신성 왕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태국 사람들도 점차 중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거짓말도 반복되면 믿게 되는 법인데, 신성 왕국의 영상 자료는 인공지능이 만들고 유통했지만, 사실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
덴 브라운은 태국에서 시작한 신성 왕국의 여론전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이라.’
태국 왕가가 일반인을 인신 공양하고 세뇌했다는 게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지?
신성 왕국이 여론전에 쓰고 있는 영상이 증거가 될 순 없었다. 인공지능으로 만들었을지 모르는 영상을 어떻게 믿겠나?
관계자가 전부 죽었는데?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고, 증인이 없으면 사실이라는 건가? 증인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관련자가 모두 죽었다는 것. 명분을 쌓으려면 관계자를 살려두는 게 나았다. 여론전을 하려면 살려두고 증언하게 하는 게 나았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사실 여부를 따지기 전, 죽여 버려도 감당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인공지능으로 만든 영상일 가능성이 50% 이상입니다.]“정교하군.”
[네. 맨눈으로 구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입니다.]“수고했네.”
덴 브라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렇군.
그 발달한 기술로 한다는 짓이 고작 정보 조작인가?
언론의 덕목은 진실이었다. 진실을 감추고 진실을 조작한다면 그것이 나치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괴벨스가 말했듯.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계속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되는 법이었다.
대놓고 거짓 정보라도 반복하면 믿는 게 인간인데, 인공지능으로 진짜 같은 가짜 정보를 유통하면 어떻게 될까?
신성 왕국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었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정보를 조작했다는 건, 인간의 선택과 판단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여론전이라. 신성 왕국은 위험하군.]레온 보나드 황제의 판단이 중립에서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건 덴 브라운도 마찬가지였다.
[긴급 보고입니다. 라오스 정부와 북베트남 군부가 신성 왕국 국왕의 공격에 무너졌습니다.]분명히 알아듣게 이야기했다.
동남아를 그런 식으로 장악하는 건 제국을 위협하는 행동이라고.
그랬더니 인공지능으로 여론 조작하지 않나, 이제는 한 번에 두 나라를 쓸어 버린다고?
제국의 사정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제국의 경고 따윈 무시한다는 건가?
레온 보나드 황제와 덴 브라운 총리의 생각이 처음으로 일치했다.
‘어떻게 해야겠는걸.’
신성 왕국의 미친 짓을 그냥 둘 순 없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