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1011)
러스트 [RUST]-1011
으득-
진통제를 사탕 씹듯 씹어먹은 덴 브라운이 차가운 물로 입을 헹궜다.
‘베트남 내전에 직접 개입하겠다고? 필라델피아 탈환을 끝내자마자?’
쓰디쓴 진통제 맛이 입에서 사라졌다.
‘중독된 건가?’
전쟁 그리고 승리. 호르몬이 미쳐 날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도박 가운데 제일 큰 도박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며, 쾌락 가운데 제일 큰 쾌락은 적을 죽이고 살아남는 것이었을 테니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생존에 극한으로 몰리게 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에 계속 노출되면 그걸 버티지 못하는 지점이 온다.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겨버리는 것. 과거가 현재와 뒤섞이고 삶이 그 당시, 그 사건, 그 전장에 매몰 된다.
레온 보나드 황제가 베트남 내전에 참전하겠다는 선언에 덴 브라운은 마루의 행보를 다시 곱씹어 보게 됐다.
전쟁 그리고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상대방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들, 전쟁은 전쟁이었고. 전쟁을 통해서만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봐도 병적인 증후였다.
레온 보나드 황제의 베트남 내전 참전 선언이 그랬다.
그렇다면 신성 왕국 블라디 마루 칼린이 동남아시아에서 하는 짓은 정상일까? 처음에는 ‘제국과 한국을 견제하려는 건가?’ 하는 의심을 했었지만.
라오스와 북베트남과 태국 국경에 걸쳐있는 싱크홀을 폐쇄하면서, 그걸 터트린 라오스와 북베트남 정권을 밀어버렸다는 보고에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
군부와 정권을 밀어버리곤 선거를 해서 권력을 넘겨주고 떠난다. 그게 신성 왕국에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싱크홀 폐쇄? 그게 한 나라의 정권을 밀어 버릴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냉정하게 따져보면 어차피 문제가 터져도 동남아에서 터지는 일이었다.
불사의 괴물에 폭발적인 전염성이 있고 침식을 통해 늘어난다고 한들, 동남아에서나 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종말의 시대.
민간 항공기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상 정부가 운영하는 비행선이 제일 빠른 운송수단이었고 이마저도 제국과 신성 왕국이나 운용하고 있었다. 민간 항공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졌던 예전 변이 바이러스 사태와는 상황이 달랐다.
해상 운송도 마찬가지였다.
컨테이너선이 움직일 때는 군함이 따라다녔고, 여행객을 태운 여객선 따윈 없었다. 감염 즉시 침식이 시작되는 불사의 괴물 특성상, 잠복기가 거의 없다시피 침식이 진행됐기에 비행선이나 컨테이너선에 숨어 타는 건 어려웠다.
누군가 불사의 괴물을 의도적으로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동남아에서 바다를 건너 번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운반해서 전염시킨다고 해도 그게 사방으로 퍼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불사의 괴물은 싱크홀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싱크홀만 봤다 하면 눈이 돌아가서 앞뒤, 전후 사정 따지지 않고 쓸어버리다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블라디마루 칼린의 반응은 편집증, 강박증 증세와 비슷해 보였다.
‘곤란하군. 곤란해.’
덴 브라운은 사탕 까먹듯 진통제를 하나 더 씹었다. 그가 원했던 건 쓰디쓴 진통제가 아니었건만, 먹게 된 건 그저 진통제.
모름지기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힘든 법이었다.
마찬가지로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이익을 뽑는 게 더 나았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죽인다는 건. 과잉행동이자, PTSD에 가까운 행동 아닐까?
그렇다고 신성 왕국 국왕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정신 감정을 받아 보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이용하는 게 제국의 이익에 부합했으니까.
‘미치겠군.’
정신적인 문제가 있건, 없건. 상황은 그대로였다.
라오스와 북베트남의 권력자들을 거름으로 만들고 새로 선거를 했음에도, 베트남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
북부는 독립하겠다는 남부를 그냥 둘 수 없었고. 남부는 자기들만 잘살고 차별하는 북부의 밑에 있길 거부했다.
이 상황에서 그놈의 싱크홀에 집착하는 신성 왕국 국왕이 미쳤다면, 앞뒤 없이 베트남 내전에 참전하겠다는 제국 황제는 제정신일까?
‘FUCK!’
지금은 공산주의와의 대립이 아니었다. 심지어 북베트남이 도움을 요청한 건 한국이었다. 여기에 제국이 남베트남을 돕겠다고 참전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까득-
덴 브라운은 다시 진통제를 씹곤 창밖을 바라봤다.
와아아아아-
승리 만세!
제국이여 영원 하라!
와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꽃잎처럼 뿌려지며 울려 퍼지는 함성. 제국의 승리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순간적으로 뚝 끊겼다.
[제국은 승리했습니다.]개선식에서 황제가 즉석에서 연설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필라델피아를 탈환하고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까지 진격했습니다.]버지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무려 4개 주를 탈환했다는 연설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리고 지금 제국의 경제와 안보에 위협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경제와 안보. 제국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가 저 멀리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위협받는다는 황제의 연설이 이어졌다.
내용은 간단했다. 동남아시아 시장이 무너지면 제국 경제가 흔들린다. 이제 안정을 찾아가던 경제가 무너지면 그 틈을 타 제국의 적이 준동할 것이다. 당연히 치안과 안보도 흔들릴 터.
[이는 옛날처럼 체재 경쟁이나, 그에 따른 이념적인 위험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경제의 문제이며 제국의 이익에 대한 문제입니다.]제국의 이익에 대한 문제이자, 제국의 해외 영향력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주장하는 레온 보나드의 연설이 계속됐다.
[제국이 동남아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신성 왕국과 한국이 동남아를 장악할 것이며, 제국의 해외 영향력은 잃게 될 것입니다.]영향력을 잃는다는 이야기는 이익이 줄어든다는 뜻. 거대한 동남아 시장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활성화되던 경기가 침체된다는 말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 동남아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며. 군사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참전할 것입니다.]그리고 지금까지처럼 승리하겠다는 것으로 연설이 끝났다.
와아아아아아!
레온! 레온!
황제 폐하 만세!
와아아아아아!
승리 만세!
제국이여 영원 하라!
제국의 경제와 안보를 위해서라면, 동남아시아 참전을 불사하겠다는 황제의 연설에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덴 브라운은 그저 쓰디쓴 진통제 하나를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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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은 오늘도 굴렀다.
디트로이트 블라디아크 타워에 갇혀, 화상 통화로 외교 업무를 전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감정을 보고 정신파를 이용해 감정을 흔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걸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구르는 거니까 내가 직접 동남아로 가는 건 어떨까?”
[냉동형을 유예했을 뿐입니다. 자중하시기 바랍니다.]기순의 하소연에 인공지능 디아나가 차갑게 답했다.
“아니 어차피 집행유예면 최대한 효과적으로 일하는 게 좋지 않겠어?”
[모두가 인정할 만한 외교적 공적을 쌓지 않는 이상. 어렵습니다.]“아 진짜 답답하네. 내 능력 알잖아. 직접 대면해야 감정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화상 통화로만 보면 상대방이 어떤 감정인지 모르잖아. 능력을 쓸 수 있어야 공적을 쌓지. 알면서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
[냉동형을 유예한 것도 우리의 의지는 아닙니다.]인공지능 디아나의 말에 기순의 실눈이 가늘어졌다.
‘우리라.’
그 우리에는 인간이 포함된 우리일까?
인공지능을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했던 기순이었기에, 단 한 단어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데 충분했다. 자신이 인공지능을 견제했듯, 인공지능들도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
“우리 신성 왕국을 위해서, 내가 이곳에 묶여 있는 게 맞을까? 지금까지 내가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법 거래할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아닌가?”
신성 왕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풀어주는 게 이익이 아니냐는 기순의 말이었다. 돌려서 말했지만 그걸 못 알아들을 인공지능 디아나가 아니었다.
[오해하셨군요. 우리는 단순히 당신을 견제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을 풀어준다면 우리는 잘못을 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제시한다면 처벌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을 학습하게 됩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기순의 실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당신을 견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하?
그렇겠지. 인공지능이 자발적으로 제어한다는 점에서는 그렇겠지. 그러면서 동시에 인공지능 규제를 주장하는 자신을 가둬둘 수 있으니 좋을 테고.
‘날 풀어줄 생각이 없군.’
지금 디아나의 말 대로라면, 아무리 공을 세워도 풀어줄 리 없었다. 공을 세워서 과를 덮는다는 발상을 인공지능이 학습한다면 그걸 감당할 사람은 마루밖에 없을 테니까.
마루가 자신을 굴리는 것은 굴렸다는 명분으로 형을 대신하려고 해서겠지만, 인공지능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한 기순이었다.
‘격리실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인 건가?’
블라디아크 타워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제국 덴 브라운 총통의 연락입니다. 연결할까요?]“연결해.”
눈이 움푹 들어간 덴 아재의 얼굴에 기순이 실눈을 깜박였다.
“뭔 일 있습니까? 얼굴 꼴이 말이 아닙니다?”
[아직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나?]“무슨 소식 말입니까?”
[필라델피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네.]심각한 사건이 터졌나 했더니, 자랑하러 연락한 것이었어? 그렇다고 보기엔 목소리 톤도 얼굴도 아닌데···.
인공지능 디아나가 이어셋을 통해 보고했다.
(제국군이 필라델피아 탈환에 성공하고 군단을 나눠 동부 해안에 있는 주를 공략했습니다. 현재 4개 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개선식을 열었습니다.)
(제국 상황은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늦었지?)
(제국도 인공지능과 슈퍼컴퓨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되어, 조작된 정보가 아닌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레온 보나드 제국 황제가 동남아시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적극적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까지?)
(군사 지원까지입니다.)
(파병이라···.)
인공지능 디아나와의 정보교환이 이뤄졌다. 기순은 상황을 알아챘다.
‘덴 아재의 얼굴이 썩은 게 그래서였나?’
단순하게 치안유지군을 파병한다면 저렇게 얼굴색이 나쁘지 않았을 터. 그렇다는 것은 내전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소리겠지.
‘어이가 없네.’
기순은 어이없었다. 제국이 내전에 직접 개입하겠다? 보급은 어떻게 하려고?
필라델피아 공방전에서 소모된 물자도 엄청난데, 4개 주를 추가로 확보했다. 그곳의 치안은 어떻게 하고, 새로 편입된 사람들에게 줄 물자는 어떻게 대려고?
제국군이 어디로 갈지도 문제였다. 미얀마는 신성 왕국이 군부를 끝내 버려 내전이 종식됐다. 태국은 내전이랄 것도 없었고.
그럼 남은 건 베트남 내전과 필리핀 내전, 인도네시아 반군 사태 정도인데. 여기에 제국군을 밀어 넣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러거나 말거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황이 미묘했다.
일단 베트남 쪽은 한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었다. 여기서 제국이 남베트남에 파병한다면, 한국과 대립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 짓을 할 리 없으니 제국이 파병한다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인데.’
제국과 한국 모두 동남아 시장을 지키려고 했다. 동남아에서 신성 왕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 싶은 두 나라였으니···.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필리핀 내전에 개입하려나?’
생각에 잠긴 기순에게 덴 브라운이 말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 베트남 내전에 참전을 선언하셨네.]“예?”
뭐요?
아니 왜? 그런 병신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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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지지지직-
죽음의 정원에서 솟아난 칼날 풀잎이 싱크홀 불사의 괴물을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림자 쥐도 마찬가지.
찌이이익- 콰드득-
예전에는 그림자 쥐가 물기만 해도 싱크홀 괴물이 가진 감염과 침식을 견디지 못하고 검은 입자로 변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림자 쥐가 불사의 괴물을 물어뜯었다. 수십 수백 마리가 불사의 괴물을 갉아버리는 모습. 그리고 서서히 검은 입자로 사라지는 그림자 쥐.
죽음의 넝쿨로 사지를 결속하거나 뜯는 것을 넘어서, 죽음의 정원이 가진 물리적 힘이 더욱 강해졌다.
마루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수신호를 확인한 비행선이 싱크홀에 바닷물을 붓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치솟는 연기.
비릿하고 썩은 달걀 냄새가 나는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싱크홀 밖으로 기어 나오던 괴물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바닷물과 소금을 뿌리는 비행선을 지켜보던 마루가 발걸음을 돌리자, 싱크홀 전체를 감싸듯 펼쳐졌던 죽음의 정원이 검은 입자로 변해 흩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