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1029)
러스트 [RUST]-1029
여자가 필사적으로 레온 보나드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확정된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사선으로 쪼개진 상반신에서 내장이 흘러나와 바닥으로 쏟아지는 모습.
피의 창과 뱀이 레온 보나드의 혈액을 흡수하기도 전, 검은 넝쿨이 달린 다리와 하반신을 휘감았다.
푸스슥-
순식간에 생기를 뽑아버리는 검은 넝쿨. 잘렸음에도 생명력이 남아있던 두 다리와 하반신이 고운 비료처럼 변해버렸다.
스으으읍- 후으-
그 거친 숨소리에 여자의 시선이 마루를 향했다.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전신이 넝마가 됐음에도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살기.
그 흉흉한 살기에 몸이 굳어버릴 정도였다. 고위급인 그녀가 몸이 굳을 정도면 일반인이나 어설픈 능력자는 심장마비로 죽어버릴지 몰랐다.
‘괴물···.’
살기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괴물이 아니면 무엇이 괴물이겠는가? 뭣도 모르는 인간들이 신인류를 보고 식인귀니, 흡혈귀니 말하지만, 그럼 저건 뭐라고 해야 하지?
쓰으으읍- 후으-
저벅-
느릿하게 걷는 발걸음.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여자를 향해 걷기 시작한 마루를 향해 여자가 말했다.
[있잖아. 난. 그러니까 프리랜서야. 용병이지. 그래서 말인데 고용주가 죽었으니 더 싸우고 싶은 생각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싸울 이유도 없고. 그렇지?]대답 이어진 발걸음.
저벅-
흐으으읍- 쓰으-
저벅-
[아니. 잠깐 멈춰봐. 용병했었다며?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는데, 꼭 목숨 걸고 싸워야겠어?]치이익-
핵폭발이 터진 뒤 아직 식지 않은 열기. 뜨겁게 달궈진 바닥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넝마가 된 슈트 사이로 화상에 문드러진 피부가 보였다.
검은 넝쿨을 뽑아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검은 입자로 변해버리는 극악한 상황이었음에도 마루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도망치려면 진작 도망쳤겠지.’
저렇게 주절거릴 시간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년은 뭔가 노리고 있는 게 있었다.
저벅-
느릿한 압박에 밀려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 여자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좋지 않네.’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피를 뿌려봐야 금방 익어버렸기 때문. 거기에 생명력을 흡수하는 검은 넝쿨까지 상대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해.’
레온 보나드가 당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저렇게 느릿하게 걸어오다 갑자기 거리를 좁혔다. 대략 15m 내외가 괴물의 사거리라고 봐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여자의 시선이 레온 보나드의 상반신을 향했다. 사선으로 잘리면서 우측 팔과 머리통이 남은 시체.
묘하게 시체를 가로막은 듯한 마루의 위치에 여자가 살짝 대각선 뒤로 몸을 뺐다. 그와 동시에 저벅 한 걸음 내디디며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한 위치를 잡는 마루.
‘우연?’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완전히 옆으로. 여자가 옆으로 빠지자, 저벅- 똑같이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마루.
결과적으로 또다시 레온 보나드의 시체를 가린듯한 구도가 됐다. 두 번이나 같은 구도를 잡는다고?
‘우연이 아니었네.’
그렇다는 건 저것도 레온 보나드의 시체. 아마도 머리를 회수하려고 한다고 봐야 했다. 포기하고 가나? 아니면 붙어봐?
치이이이익-
이쪽은 엑소슈트로 무장해서 열기를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고, 저 백정은 열기에 부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굳이 싸운다고 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더 대치를 이어가면, 레온 보나드의 시체를 회수하지는 못하더라도 괴물도 쓸 수 없게 될 터.
신성 왕국이 레온 보나드 정도의 능력자 샘플을 가지지 못하게 막는 것도 성과라면 성과겠지. 여자는 조금 더 대치를 이어가기로 생각···.
저벅-저벅-저벅-
순식간에 세 걸음 성큼 다가서는 마루의 움직임에 여자가 핏방울을 뿌렸다. 둥글게 뿌려진 핏방울이 허공에서 길게 늘어지며 실뱀으로 변해 날아갔다.
스걱-
한 번 휘두름으로 흩뿌려진 실뱀을 통째로 쓸어버린 마루가 날숨을 뱉었다.
후으으으- 스으으읍-
그리고 긴 들숨.
‘온다.’
그러면 피해야지. 여자는 정면으로 붙을 생각이 없었다. 시간만 끌면 그만.
샤샤샤삭-
뱀처럼 미끄러지듯 반원을 그리며 재빨리 빠지는 여자. 여자의 움직임을 쫓으려 마루가 보폭을 넓히자, 칼끝이 흔들렸다.
뚝-뚝-
뉴클립스에 붙었던 핏방울이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며 치이익- 발자국을 대신했다.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성큼 거리를 좁히는 발걸음.
마루가 접근하지 못하게 뱀처럼 교묘히 움직이는 여자.
그리고 끓어오른 대지.
그 속에서 마루의 호흡이 거칠게 늘어졌다.
스으으읍- 후으으으-
힘겹게 긴 호흡을 내뱉는 것으로 지친 척 유인했지만, 속아 넘어가지 않는 여자였다.
[있잖아. 이쯤이면 다 익었을 거 같으니까 이만 가볼게.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마. 알잖아. 이 세상은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거. 그럼···.]그럼-이라며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 막 이제 떠난다고 마음을 놓은 그 찰나를 노린 마루의 급습이 이뤄졌다.
가득 들이쉰 숨을 참은 채, 무호흡으로 거리를 좁힌 마루.
슈아아악-
오른발을 굴러 공기를 찢은 발걸음이 한 번.
단숨에 15m를 줄였다.
그리고 속도가 떨어지기 전 바닥에 닿은 왼발로 한 번 가속.
스아아악-
[그럼···.]이라는 말을 마치기 전, 뉴클립스의 칼날이 여자의 목을 향해 뻗었다.
!!!
검은 실선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순간.
여자의 팔뚝에서 치솟은 핏방울이 겹겹이 장막을 만들었다.
다다다닥-
콰자자작—-
▬▬▬▬▬▬▬▬▬▬▬▬▬▬▬▬▬▬▬——
찢고 찢어지고 찢겨나가는 소리 끝.
여러 겹의 장막이 쪼개지며 쩍 벌어졌다.
후두둑-
두 조각이 난 피의 장막이 모양을 잃고 핏물로 변했다.
촤아악-
달궈진 대지에 뿌려진 핏방울이 수증기를 피워올린 공간에는 여자가 없었다.
쯧-
혀를 찬 마루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었군.’
그런데 왜 시간을 끈 거지? 주절주절 말은 왜 많았고. 어쨌거나 이곳에 있는 건 아니었다. 진통제에 급속 치료제까지 먹었음에도 계속되는 화상은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일단 열기에서 벗어나자.’
흡혈귀 년들 놓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추격할 상황이 아니었다. 슬슬 열기에 내성 있는 싱크홀 괴물들이 다시 모여들고 있었고.
가지고 있던 급속 치료제도 다 썼으니, 구명선이 착륙한 곳으로 돌아가 치료부터 해야 했다. 마루가 레온 보나드의 시체를 챙기자,
휘릭-
발밑에서 솟아난 넝쿨이 마루를 하늘 저편으로 집어 던졌다.
크우워어어어-
우우우우어어-
바글바글 폭심지(爆心地, the center of the explosion) 방향으로 밀려드는 불사의 괴물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얼룩덜룩 구워졌던 화상 흔적이 실시간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마루가 급속 치료제로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보조 인공지능이 상황을 보고했다.
[레온 보나드 황제의 시신은 샘플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힘들게 가져왔는데 어째서?’라는 듯한 마루의 표정을 읽었는지 보조 인공지능이 재빨리 설명했다.
[완전히 익어서 왔기 때문에 연구 목적으로 쓰기 어렵습니다.]“······.”
화상으로 뻣뻣했던 상처 부위가 다 치료됐는지 부드럽게 움직이는 등허리에 자리에서 일어난 마루. 거울에 비친 등판의 상처가 생각보다 넓었다.
기존의 피부와 새로 돋아난 피부의 색이 달라, 약간은 얼룩덜룩해진 등판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에 즉시 도망치지 않았다면, 축적해 놓은 죽음이 부족했다면 그리고 급속 치료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급속 치료제를 2개씩 가지고 다녔는데. 3개로 늘려야겠어.”
[돌아가면 준비하겠습니다.]“그리고 전용 비행선에도 네다섯 개 정도는 항상 비치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레온 보나드의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익어버려서 쓸데가 없다는데, 탈출선 무게 차지할 필요는 없겠지.
“폐기해.”
[네.]“돌아가자.”
[어디로 갈까요?]전용 비행선이 부서졌으니 새로 만들어야 하기도 했고, 레온 보나드 놈이 핵전쟁 운운했으니 상황을 보려면 신성 왕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지.
하지만 비상용 비행선으로 한 번에 갈 순 없었다. 제일 가까운 거점으로 가서, 수송선을 타고 돌아가야겠지.
“여기 벙커도 관리해야 하고, 추락한 전용 비행선도 다시 회수해야 하니까. 일단 제일 가까운 거점으로 가지.”
[제일 가까운 기지 확인합니다. 태국 기지로 출발합니다.]비상 벙커에서 떠오른 탈출용 비행선이 느릿하게 고도를 높였다.
‧
왕님이 돌아왔음에도 보상 이야기 없이 바로 태국 거점으로 가자, 까마귀 지휘관이 낮게 울었다.
까아악? (약속은?)
[기다리세요. 공적이 있으니까 분명 특식을 주실 거에요.]까마귀의 눈빛이 변했다.
까아아? (아니면?)
[만족할 만한 것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그분께서 혹시 잊으셨다면 제가 따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보조 인공지능의 CCTV 렌즈가, 폐기 처분받은 레온 보나드의 시체를 향했다.
‧
‧
‧
치안유지군 주둔지에 도착한 마루는 바로 상황을 알렸다.
[핵폭탄? 놈들이 핵을 터뜨렸음?]근데 어떻게 살았음? 김 양은 뒷말을 삼켰다. 정 단위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인가? 역시 인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최고 존엄. 핵이 터져도 살다니.
[하- 미치겠네. 살았으니 다행이다.]기순은 가슴이 철렁했다. 근거리에서 핵을 썼다는 건, 반쯤은 자폭이었을 텐데. 자폭이 아니라면 핵을 버틸 수 있는 뭔가가 있었겠지.
‘근거리 핵을 막을 정도의 특수 능력이 있다면, 그런 함정을 또 쓸 수 있다는 건데.’
기순의 가느다란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김 양은 기순이 생각한 걸 본능적으로 느낀 듯싶었다.
[제국 년들 뭐만 수틀렸다 하면 핵 쓰겠네.]한 번도 안 쓴 애들은 있어도, 한 번만 쓰는 애들은 없는 게 핵이라는 게 김 양의 지론이었다. 이미 제국에서 전략핵도 쓰고 전술핵도 썼으니 막 쓸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렇겠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마루가 레온 보나드의 유언을 알렸다.
“자기가 죽으면 핵전쟁이 터진다고 협박하더라.”
[미친년이었네. 응. 황제라는 새끼가 자기 목숨과 수천만 명을 같은 무게로 달아? 나름 괜찮은 새낀 줄 알았는데, 영 쌍놈이었네.]김 양은 분개했고 기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결국···. 죽인 거냐?]“살려둘 놈이 아니었어.”
치밀한 함정도 그렇고 마지막에는 핵폭탄까지 터트려 마루를 죽이려고 했다. 핵폭탄으로 죽이는 데 실패한 뒤에도 끝까지 계속 공격했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 당장 자기가 뒈질 상황이 된 뒤에야 핵전쟁 터진다며 목숨을 구걸한 놈이었다.
그쯤 되면 멋있게 뒈질 줄 알았는데,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던 모습이 마루는 어쩐지 소름 돋았다.
제국과 신성 왕국을 저울에 올려서라도 살아남으려는 모습. 추하다면 추할 수 있는 그 이면에 숨겨진 생존 욕구. 처절한 목소리 속에 숨겨진 살아만 남는다면 기회가 있다는 듯한 간절함.
감정을 읽은 능력은 없었지만, 영웅 소리를 듣는 황제가 제국을 볼모로 삼아 살아남겠다고 한 애원에 이질감까지 느꼈다.
마루가 살려줬다면 무슨 일이 기다렸을까? 함정을 파겠다고 데려온 제국의 최정예 병사가 전멸하고, 신성 왕국을 공략하려던 3개 군단까지 전멸한 상황.
이제껏 전쟁의 신, 승리의 신, 영웅 황제로 추앙받았던 모든 것이, 살아 돌아가는 순간 무너질 텐데.
그래도 레온 보나드는 살아남으려고 했다.
죽어서 영웅이 될 것인가?
살아서 오욕을 감내할 것인가?
레온 보나드는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루는 와신상담(臥薪嘗膽) 노릴 게 뻔한 놈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흐응- 잘 죽였음. 그런 거 살려두면 두고두고 골치 아파짐. 응]회사에서 작업했을 때도 그랬다. 뭣도 모르는 어린 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줬더니, 나중에 크고 우람한 똥을 싸질렀던 일이 떠오른 김 양이었다.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고 핵전쟁으로 협박한 놈이라 함량 미달로 생각했었는데, 마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서운 새끼였다.
그런데 기순의 반응이 미묘했다.
[하아- 그래서였나?]“왜?” [덴 아재가 처형됐다.]“뭐? 갑자기?”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다더라.]이미 전시상태인지라 흔적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해킹하고 있었던지라 덴 브라운의 처형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암살?”
[황제가 독단적으로 우리와 전쟁하려고 하는 걸 반대했다가, 가택 연금당했고. 그 뒤에 핵전쟁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덴 아재 세력을 동원해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었나 보더라.]실패해서 사형됐고.
[······.]“······.”
그 아재 갈 때는 예술처럼 가네. 덧없이.
[레온 보나드 황제와 덴 브라운 총리, 핵심인물 두 사람이 사라져서인지, 제국이 폭주하고 있다. 의회와 군부가 전략핵을 쓰려고 하고 있어.]“요격 준비는 완벽할 텐데?”
신성 왕국을 노리는 미사일이라면 완벽히 잡을 수 있었다. 극초음속 미사일 탄두에 달았다고 해도 신성 왕국 주요 도시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래. 그렇지.]기순이 아주 가늘어진 눈매로 해킹 자료를 올렸다.
[문제는···. 우리가 목표가 아니라. 불의 고리와 옐로우 스톤 화산이라는 거다.]미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