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159)
러스트 [RUST]-159
마루는 어슬렁어슬렁 아래로 내려갔다.
‘일본에 가달라는 요청일까?’
지난번 분명히 말했었는데, 똑같은 말 반복이라면 피곤할 따름이었다.
‘일단. 들어보고.’
슬며시 고개를 치켜드는 감각을 칼집으로 지긋하게 누른 마루가 로비로 들어섰다.
“이쪽입니다.”
국토안보국 과장 덴 브라운이 일어섰다. 옆에 앉은 사람들은 요원들인가?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제법 많은 사람의 기운이 날카롭게 날 서 있었다.
힐끗 보면 그냥 손님 같았지만, 저딴 기세를 숨긴 손님들이 갑자기 튀어나올 리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후- 마루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김 양에게는 착하게 잘하자고 해놓고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휙 급발진해 버릴 뻔했다. 피식- 감정을 웃음으로 바꾸자 여유가 생겼다.
“갑자기 찾아와 미안합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으셨을 텐데요. 중요한 일이신가 보죠?”
악수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바로 본론에 들어간 마루였다.
“사실 이야기가 좀 복잡하게 됐습니다.”
“어떤 이야기 말씀입니까? 군부에서 절 보내달라고 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우선 요청하신 슈퍼컴퓨터 이야기부터 하지요.”
후드가 주문한 슈퍼컴퓨터는 좋다는 최신 부품을 전부 때려 박아서 만들어야 할 판인 슈퍼컴퓨터인지라 상황이 좀 묘해졌다.
설명을 들어보니, 부품 사이에도 궁합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좋다는 부품을 다 때려 넣었는데, 기대했던 성능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주문한 대로 만들면 그렇다는 소리인가요?”
“알 수 없습니다. 그도 그렇지만 요청한 부품을 사용해서 만드는 건 사실 좀 곤란합니다.”
연구용으로 소량 생산한 부품까지 넣어서 만들어 달라는 것은 국토안보국도 버지니아도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였다. 그런 부품을 쓴다는 것. 그 자체가 보안상의 문제를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1nm 공정의 칩 생산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고 1nm 공정 칩이 들어간 슈퍼컴퓨터를 조립해 달라고 하는 격이라서 말입니다. 거기에 슈퍼컴퓨터에 대해서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아서 이야기하자면···.”
그러니까 대량생산, 기업용으로 만드는 슈퍼컴퓨터도 최근 4차 혁명 대비, 인공지능 연구, 메타버스 준비 등의 이유로 대기 물량이 쌓일 정도로 품귀 상황인데, 갑자기 국가기관이나 연구단지에서나 쓸 법한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요구한 것이다.
“그 정도였습니까?”
마루는 그쪽으로는 잘 몰랐다. 좀 사양이 높은가보다 그랬지, 국토안보국에서 직접 확인하러 올 정도의 사양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뭣보다 슈퍼컴퓨터 하나 산다고 안보와 관련된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렇습니다. 옛날 슈퍼컴퓨터도 중요한 자산이었지만, 현재 슈퍼컴퓨터는 전략물자나 다름없습니다. 무엇보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의 발달로 인해 연구개발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게 됐습니다. 위험하게 된 것이죠.”
슈퍼컴퓨터로 연구개발 시간을 단축하면 좋은 거 아닌가? 마루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해킹한다고 생각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시도하는 것은요?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강 인공지능을 활용하게 된다면? 단순히 슈퍼컴퓨터 1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거창한 것을 해보겠다고 슈퍼컴퓨터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국가 정보기관의 관점에서 보자면 좀 걱정스러운 상황이기는 했다.
게다가 최근 활약(?)하고 있는 후드는 해커 아닌가? 그것도 사법 거래를 이용해 얼마 전까지 목줄 채워놓고 굴리던 해커.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래도 원하는 것을 들어드린다고 해놓고 말로만 미안하다고 할 건 아니지 싶어서 다른 제안을 가져왔습니다.”
“?”
“일단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보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옆에 앉아있던 머리숱이 많이 없는 사람이 태블릿을 테이블에 올렸다. 태블릿 화면에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오닉스로 만든 비석 같은 것이 서 있었다.
매끈한 커다란 검은색 보석으로 만든 것과도 같은 모양. 잠시 뒤, 세로로 길게 문자열 같은 것이 빛나고 붉은 LED가 마치 흐르는 피처럼 아래로 흐르며 점멸했다.
심지어 한 개도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셋이나 되는 오닉스로 만든 비석처럼 생긴 것이 삼각형 꼭짓점에 하나씩 서 있는 모습.
“이게 뭡니까?”
“코드명 트리아라는 슈퍼컴퓨터입니다. 형이상학 연구소에서 사용하던 아이인데, 이번에 신형으로 교체하면서 분해 처분 판정이 나온 아이입니다.”
“형이상학 연구소? 분해 처분이요?”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내가 잘못 해석한 건가? 요새 메타 어쩌구가 넘치더니 메타피직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작동되는 컴퓨터를 왜 분해 처분을 한다는 거지? 중고로 파는 것도 아니고?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는 건가?’
중고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돌리느니, 분해해 버리는 걸 택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의문이었다. 물량이 부족하다고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어디든 쓸 곳이 있었을 텐데 분해 처분이라니. 꼭 없애겠다는 느낌이랄까?
“예. 가슴 아픈 일이죠. 당시 모든 기술을 집약해서 만든 아이인데 말입니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주름이 없었다. 그러니까 음- 안됐다. 마루의 안타까운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가 속에 감춰둔 감정을 표출했다.
“트리아는 우리 트리아는 그런 애가 아닌데.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우리 트리아를···.”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안타까운 머리카락을 국토안보국 과장이 진정시켰다. 잠시 진정하는가 싶더니 소용없었다. 길고도 긴 분노와 절규를 듣던 마루가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성능에 문제가 생긴 슈퍼컴퓨터가 분해 처분 결정을 받았는데, 일단 다른 곳에 옮겨놓고 안에 잠겨버린 자료를 시간을 두고 천천히 빼내고 싶다는 말입니까?”
국토안보국 과장이 약간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안에 자료가 잠기기도 했고, 계속 오류가 생겨서 말입니다.”
“우리 트리아는 잘못이 없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흉악한 짓을 했으면 트리아가 그랬겠습니까? 오류를 만들어 놓고 트리아 탓을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애물단지가 된 슈퍼컴퓨터를 이쪽으로 넘기고 싶다는 소린데··· 아마 경쟁 연구팀에서 트리아라는 슈퍼컴퓨터를 처분해 버리고 싶었나 보다. 나라가 크다 보니 경쟁도 심하고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더니. 이쪽은 이쪽대로 복잡한 것 같았다.
“··· 일단 칼린 씨가 공사하고 있는 빌딩은 비상 대책과 보안시설이 완벽하다고 생각해, 그쪽으로 옮기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흠- 마루는 머리카락이 안타까운 남자를 슬쩍 바라봤다. ‘제발.’ ‘제발 우리 트리아를 살려주십시오.’하는 얼굴이었다.
해커한테 슈퍼컴퓨터를 주기로 했으니까, 중고라도 던져 주는 게 좋기는 한데. 원하는 부품으로 만든 건 아니지만, 연구소에서 쓰던 거니··· 아. 고장 난 거라고 했던가?
“고장이 아닙니다! 절대 고장이 아니에요!”
“그럼 쓸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럼요. 당연합니다. 조금 오류가 생기는 상황이지만, 그건 전부 프로그램 충돌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지워 버리고 다시 깔면 되는 거 아닌가요?”
연구자료가 잠기면서 동시에 오류가 생겨, 포맷할 수 없다고 했다. 듣다 보면 뭔 이딴 컴퓨터가 있나 싶어질 정도로 비상식적인 컴퓨터였다.
어쨌든, 가끔 오류가 뜬다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사용하는데 별 탈 없다는 소리였다. 마루는 후드랑 한 약속을 대충 지키는 차원에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과장은 어쩐지 짐을 하나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머리카락 안타까운 분이 유능한 사람인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비상시 전력 수급 계획 부분에서···.”
전력 생산은 태양광 필름을 통한 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 팜에 필요한 전력과 기타 유지 전력을 맞추기에도 빠듯한 게 사실이었다.
“예? 슈퍼컴퓨터가 그렇게 전기를 많이 먹는다고요?”
“그렇습니다.”
무슨 전기를 그렇게 많이 먹어? 실화? 요즘 절전, 친환경 이런 거 아니었나? 그렇게 전기를 먹어대는 컴퓨터라면 쓸 수 없었다.
슈퍼컴퓨터는 장식용으로 보관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과장은 컴퓨터 전력 이야기에서, 비상사태 발생에 대비한 서버센터 이야기로 주제를 옮겼다.
“···그래서 미시간주에서도 비상 서버센터를 만들 계획입니다.”
전자전, 사이버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사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몰랐다. 따라서 이에 대비할 수 있는 서버센터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해졌다. 미시간주에서도 비상 서버센터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예산 문제로 뒤로 미뤄지고 있었다.
“슈퍼컴퓨터 들여오면서 서버센터도 같이 들어가자? 그 이야긴가요?”
“슈퍼컴퓨터도 그렇고 비상 서버센터도 그렇고 보안이 중요한데, 기준을 충족할 정도의 시설을 새로 건설하는 것은 재원 마련도 그렇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말입니다.”
상을 차린 김에 숟가락을 두 개 얹겠다는 소리였다. 근데 슈퍼컴퓨터도 전력 먹는 하마인데, 서버센터도 마찬가지 아닌가? 태양광 발전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거기까지 걱정할 건 아닌가?
“그러세요.”
마루는 흔쾌히 허락했다. 뒷일이야 터지고 나면 어쩔 건데?
“슈퍼컴퓨터와 서버센터 모두 중요한 자산이자 안보와도 직결되는 사안인데.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래 주고받기 아니었던가? 주거니 받거니 서로 선만 넘지 않으면 착하게, 좋게, 오래 갈 수 있었다. 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둔중한 과장의 목소리가 조금 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전력 공급 문제. SMR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SMR? 그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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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모듈 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 SMR)는 전기 출력 300MWe급 소형 원자로를 말한다. 주요 사용처는 핵추진 잠수함이나 항공모함에 사용되는 소형 원자로였다.
최신 기술을 사용한 소형원전은 한 번 연료 공급으로 무려 40년에 달하는 사용 기간을 가진다고 했다.
‘그런 걸 해주겠고?’
마루는 서류를 넘겼다. 지금 공사하고 있는 빌딩의 5개 층을 임대하는 형식으로, 1개 층은 슈퍼컴퓨터와 연구실. 1개 층은 서버센터, 1개 층은 숙소와 편의 시설.
그리고 지하 3층과 새로 공사하는 지하층에는 소형 원전 설비실과 실험실, 기계실, 공작실과 같은 실험 생산시설을 넣자는 계획서였다.
감이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국토안보국과 더 진하게 엮이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버지니아를 비롯해 연방수사국이나 마약단속국과 비벼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슈퍼컴퓨터도 중요했고 비상 서버센터도 중요한 시설이었다. 거기에 소형 모듈 원전이라니. 빌딩 잘 만들어 놓고 팽 당하는 거 아닌가? 국토안보국에서 추진하는 일이라 안보 드립으로 쫓겨날 가능성은 적겠지만···
“어떻게 생각해?”
“괜찮음.”
김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짜로 준다는 거 아닌가? 심지어 소형원전 들어오면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냉난방 빵빵하게 돌리고 난리를 쳐도 전력이 남아돌았다.
“할 수 있는 게 많아짐.”
“그건 그렇지.”
“여차하면. 생각해 보면 됨.”
“······.”
그것도 그랬다. ‘생각하고 쏘자.’라는 말. 마루도 동의했다. 그러니까 진짜 끈끈한 사이가 되자는 건데, 마지막에 생각해 보라는 소리가 좀 의미심장했다.
‘일본에 고립된 부대 말입니다. 군부에서는 소수만이라도 우선 탈출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정보만이라도 회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더군요.’
‘버지니아 쪽에서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가서 정보만이라도 빼내 달라는 소리였다. 군부와는 상관없이, 버지니아와도 상관없이.
“꼭 가야 함?”
“그건 아닌데.”
받기만 하고 그냥 입 닦는 건 적성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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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구덩이를 파서 만든 공간이 시끌벅적했다.
“총 얼지 않도록 관리해.”
“동상 걸리지 않게 양발 자주 갈아신고.”
“귀찮아도 땀 찼으면 갈아 신어!”
이곳은 백색의 지옥이었다. 영하 15도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에 육박했다. 해가 떨어지면 정말 미친 듯이 기온이 떨어졌다.
처음엔 쥐떼가 다음에는 개떼가 덮쳤다. 처리하는 건 문제 없었지만, 탄약이 문제였다. 신형 소총은 6.8mm 구경이었다. 5.56mm에 비해 저지력이 좋아졌지만, 휴대할 수 있는 탄약량은 줄었다.
“탄약 확인해. 잔탄 확인하고 탄약 재분배하고.”
소대장은 휴식 시간에도 사주경계 똑바로 하라고 잔소리를 덧붙였다.
“저거 뭐야. 왜 벗고 지랄이야? 애들 HUD 벗지 말라고 해.”
소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구덩이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크아아아아아!!!
양말을 갈아신겠다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병사에게 달려드는 무엇.
위이이이잉!
강력한 기계음과 함께.
병사를 향해 달려들던 무엇을 향해 육중한 철퇴가 휘둘러졌다.
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