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199)
러스트 [RUST]-199
위이이이잉-
환풍기를 통해 마취 가스가 빠진 자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깨진 유리조각과 바닥에 흥건한 핏방울을 거침없이 밟고 다니는 작은 고양이 슬리퍼.
붉은 바닥을 긁어낼 듯한 여자의 목소리는 톤이 어딘가 이상했다. 짜증 난 것 같기도 하고 흥분한 것 같기도 한 소리.
“외곽 경비하는 보안 요원들은 어떻게 된 거죠?”
“월드에서 보안 담당한다고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에요!”
감염방지복을 입은 자들이 조각난 나오진 회장을 조심스럽게 보존 케이스에 넣었다. 그걸 본 여자가 또 한마디 했다.
“바로 처리 시작하고 보고하세요!”
“알겠습니다.”
갑자기 바르르 손끝을 떨기 시작한 그녀가 자기 목덜미에 권총주사기를 꽂았다.
칙- 파르르 떨리던 손이 조금씩 진정됐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숨을 길게 늘여 쉰 뒤, 깨진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여자.
복합방탄유리였다. 7.62mm 이하는 완벽하게 막을 수 있고 12.7mm 탄도 부분적으로 막을 수 있는 최고등급의 방탄유리. 저격용 총탄까지 막을 수 있는 신형 복합방탄유리가 칼질 몇 번에 뚫렸다.
“······하- 정말.”
신체능력이 강화됐으리라 예상했지만, 이건 예측에서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언제나 계산 밖으로 움직였다.
‘집안이 망했으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대에 들어가려고 하겠지?’
4년 장학금 받는 아무 대학으로 가버렸다. 좋은 대학교 가서 과외를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렇게 과외 선생님으로 초빙하겠다는 계획은 무산. 한국대 선후배 캠퍼스 라이프도 무산.
‘4년 장학금 나오는 대학으로 갔으니까, 자격증 공부를 하겠지? 군대는 통계적으로 대부분 1학년 겨울이나, 2학년에 간다고 했으니까 시간에 여유가 있겠네. 어학 실력이 괜찮으니까 카투사로 가려나?’
이렇게 저렇게 미리 손을 써뒀더니, 그냥 대학교 휴학하고 바로 군대.
아니 왜? 어째서?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래도 기회를 살려서 접근했다. 남자들이 여자에 빠지기 쉽다는 입대 직전에도,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도 회피와 철벽. 대체 왜? 이거 설마 펜스룰?
‘한 집사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남자들 보기에 매력 없게 생긴 건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천재 미소녀가 어떻다는 기사와 거기 빼곡하게 달린 댓글을 가져와 보이면서, 아니라고 아가씨 미인으로 소문났다고 항변하는 집사의 말을 들어보면, 생긴 건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기는 한 것 같고. 그럼 취향의 문제일까?
어떤 정신세계인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집안 풍비박산 났는데 그걸 꾸역꾸역 어떻게 끌고 가는 것도 상정 밖. 그걸 어떻게 견디지?
암 걸린 아버지는 다시 사업하겠다고 하다 연착으로 말아먹고, 그렇지 않아도 살짝 이상한 어머니는 더 이상해졌고, 여동생은 예체능 특유의 히스테리까지. 그걸 다 받아 가면서 버텨?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는 콘셉트도 무산. 여동생은 후원도 넙죽넙죽 받던데, 대학교 자퇴해 버렸으니, 그쪽도 무산.
‘그런 타입은 자기 힘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획을 월드 홍 과장에게 맡겼다. 시작은 좋았다. 현금에 집착하는 모습이라 조금 안타까웠지만,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은 확실히 변하지 않았다.
‘신약 적합성도 적합성이지만, 무엇보다 확실히 이쪽 재능이 있습니다.’
월드에서도 관심 두고 볼 정도로 재능도 출중하다고 했다.
그렇게 무럭무럭 좋은 일이 생기나 싶었는데 일본에서 사고 치더니, 월드 그룹을 뒤집고 샬롯이랑 붙어서 갑자기 어디론가 런을 해 버렸다.
‘가족이든 친구든 만나러 언젠가 한 번은 오지 않겠습니까?’
한 집사의 말이 맞았다. 그의 절친 기순이가 그의 여동생 나루를 본다고 왔으니까.
기순이를 붙잡아 그를 유인한다는 계획은 시작이 좋았다. 나루에게 푹 빠진 덜떨어진 인간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기존에 알던 순했던 기순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일반인이 폭탄과 최루탄, 총화기로 무장하고 있을 거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심지어 모르던 사람도 아니고 알던 사람이었다. 나루에게 빠져 헤헤헤- 헤실헤실 웃고 다니던 아는 오빠 포지션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폭탄마?
심지어 눈치도 너무 좋았다. 지하로 평안히 [안내]하려고 했더니, 바로 폭탄부터 뿌리고 맹렬하게 저항하는 기순. 무슨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능숙한 용병이나 할 짓을 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총격전이 시작됐다. 그 끝에 기순이 탈출했다. 최루탄에 대비하지 못한 보안 요원들의 실착이 제일 컸다.
‘월드 시큐리티도 한물갔군요.’
그렇게 기순이를 놓쳤고 계속 추적을 이어가던 중, 사망신고 처리가 돼버려 추적이 어렵다는 보고를 받고서는 어이가 없었다. 기순 명의의 휴대폰, 카드, 계좌 전부 사망신고로 사라졌으니 추적할 근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외부에서 해킹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디죠? 중국? 일본?’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빌딩 제어권을 노리고 있습니다.’
‘실험실 서버도 아니고 빌딩 제어권을 노린다고요?’
‘네. CCTV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워낙 교묘해서.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요즘 괴로워하는 것 같아, 좋은 약을 보내준 귀여운 경호원에게서 신호가 왔다.
‘···왔어요. 그가 옵니다.’
귀여운 경호원의 신호도 그렇지만,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그’였다.
기순의 흔적으로 쫓아 그 사람이 왔다.
급하게 나오진 회장을 미끼 삼아 정예 요원을 투입할 시간을 벌고, 회장실에서 포획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는 예상을 벗어났다.
수십 명이나 되는 중무장한 정예 요원을 칼 한 자루로 토막 냈다. 일방적인 학살. 신형 약물로 강화한 요원들이었는데도 그랬다.
가족을 볼모로 목줄을 채우려고 한 것도 소용없었다.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고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인데, 그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무시해 버렸다.
마취 가스를 사용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이미 방독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방탄유리를 자르더니, 빌딩에 칼을 꽂아 넣고 낙하해서 탈출했다.
칼질로 방탄유리를 잘라?
빌딩에 칼을 꽂아 넣고 뛰어내려?
이걸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나?
6개월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홍 과장이 마지막으로 했던 보고에서도 ‘재능이 있다. 신체능력이 좋아지고 있고 신약에 대한 부작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였을 뿐이었다.
월드와 드잡이질한 사람이 ‘그’였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지만, ‘탈출에 성공했구나.’, ‘어떻게 도망쳤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역시 ‘그’다웠다.
언제나 예상 밖이었다.
흐흐흐흐흣.
그녀가 허리를 숙이곤 웃었다.
늘 새로워.
항상 짜릿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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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총을 들고 혹시나 싶은 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김 양은 작게 감탄했다.
오—
스코프를 통해 본 장면. 백정이 창문을 뚫고 나오더니, 빌딩에 칼을 박아 넣고 내려왔다. 역시 답이 없었다.
‘근데 저거 가능한 건가?’
백정이니까.
끄덕.
마법의 단어 ‘백정’이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해가 아니라 그렇다고 인정. 응.
그나저나 오진 애들 대응이 좀 굼떴다.
백정이 안에서 신 나게 칼춤 췄나?
‘월드 그룹이랑 조인했다고 했는데.’
오진 애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월드 그룹에서 보안을 맡았는데 이런 대응이라면 너무 엉성한 느낌이었다.
확실히 요즘 애들은 빠진 게 맞았다. 자기가 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5분 대응. 아니, 3분 카레 대응으로 해결 봤을 거다.
‘응?’
스코프에 잡힌 드론. 2기의 드론이 살포시 마루의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역시. 그냥 넋 놓고 있을 리가 없지.’
투쿵- 투확-
오래간만에 다시 잡은 12.7mm 저격총이 연속으로 불을 뿜었다.
묵직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꼬리 잘랐음. 추격 없음.”
[생큐. 잘했어.]백정의 칭찬.
응.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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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역시.’
오진 빌딩에서 태연하게 빠져나온 마루를 보고 든 생각.
‘괴물 같은 놈.’
경호원 하츠케 미야코는 가늘게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꽉 맞잡았다. 파르르 떨리던 손끝이 진폭이 커지는 것처럼 팔에서 전신으로 퍼졌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덜덜 떠는 팔로 권총주사기를 꺼내 목덜미에 꽂았다. 칙- 시원하면서 후끈한 모순된 감각.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하자 바르르 떨리던 전신이 진정됐다.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징후.
어릴 적부터 경호원으로 훈련받았고 관련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 다양한 상황에서의 대응 능력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여러 차례의 암살시도를 훌륭하게 막았고, 다양한 테러를 사전에 차단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일본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그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대응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됐다. 거대한 쥐와의 사투, 자신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괴물로 변해버린 친한 언니 그리고 마루의 칼질로 끝나버린 생명.
그리 덧없이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괴물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조금의 여지도 없이 그렇게 바로 죽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놈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죽였다. 죽여버렸다. 그 칼질을 막을 수도 없었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무기력감 우울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항거할 수 없는 죽음 앞에 그녀는 자신의 바닥을 매일 곱씹는 것 같았다.
누군가 함께 있거나, 일하고 있을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잠이 들 때마다. 찾아오는 죽음의 기억. 짙은 그림자.
무력감과 우울증은 잠자리 악몽을 넘어서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고 싶고, 지우고 싶었던 일본에서의 일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고야 말았다. 미국으로 갔던 그것이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했던 그것이 대놓고 뿌리는 살기에 꼼짝할 수 없었다. 굳어 버린 몸이 야속했다.
그게 심은영 회장님을 노린다면 막을 수 있을까? 아주 잠시라도?
불가능했다.
광학 은신 로브로 몸을 숨겼음에도 그것은 알아챘다.
기습도 불가능
감시도 불가능
제지도 불가능
도주도 불가능
경호도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파르르르- 손가락 끝이 다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노려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
‘어째서입니까?’
변수는 제거해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심은영 회장님의 생각은 달랐다.
‘새우로 도미를 잡을 수 있는데, 새우를 아까워하면 되겠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새우라고? 심은영 회장님은 착각하고 있었다. 그건 새우 따위가 아니었다. ‘독’ 그 자체였다. 한 방울로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있는 독.
월드도, 오진도, 일본에 있는 괴물들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오진 빌딩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온 그것이 샬롯 본사로 찾아왔다.
“거기 멈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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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이는 공간이 마루를 제지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죠?”
“회장님이랑 할 이야기가 생겨서.”
“지금은 업무 중이십니다. 전화로 하시면 안 될 일인가요?”
경호원의 반응에 마루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이라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중요한 이야기라서 말입니다만. 일단 회장님에게 기별을 먼저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뒤, 은신을 해제한 경호원이 마루를 회장실로 안내했다.
“어떻게 가신 일은 잘 해결됐나요?”
“기순이는 오진 빌딩에서 탈출한 것 같습니다.”
마루의 말에 심 회장이 반색했다.
“역시. 기순 씨가 그렇게 쉽게 잡힐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행이네요.”
“오진 빌딩에서 탈출했다는 것만 확인됐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어디서 굶어 죽을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급히 만나자고 하셨다면서 무슨 일인지요?”
마루가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진 쪽에서 제가 올 걸 알고 있더군요.”
“예?”
마루가 놀란 토끼 눈이 된 심은영 회장을 보면서 고개를 좌우로 스트레칭 한 마루가 말했다.
“누군가 개 같은 짓거리를 했다는 소립니다.”
스르르르릉-
이가 군데군데 빠진 칼날이 녹슨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