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200)
러스트 [RUST]-200
마루가 칼을 뽑자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죽음의 냄새.
이가 듬성듬성 나간 칼날에는 채 떨어지지 않은 무언가가 엉켜 있었다. 섬유질, 지방질, 머리카락 같은 것들···.
심은영은 그런 흉흉한 칼날을 앞에 두고도 담담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당신이 갈 걸 알고 있었다니요?”
“나오진 회장이 왜 이렇게 늦었냐며 인사하더군요.”
눈매가 가늘어지는 심은영. 짚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KTX 테러에서 심 회장님 구하고, 바로 기순이 찾으러 오진 빌딩으로 갔습니다.”
“······.”
“오진 빌딩에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저, 김 양, 심 회장님, 경호원 둘, 해커. 이렇게 6명이죠. 저나 김 양, 해커가 정보를 흘렸을 리 없으니, 남은 사람은 회장님과 쌍둥이 경호원 2명인데···.”
“잠시만요. 단정 짓지 말고. 잠시만 생각을 해보죠.”
무슨 이야기가 됐든 입 밖으로 나오면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서로 말을 아끼는 게 좋았다.
그러시든가. 마루는 가만히 한 곳을 쳐다봤다. 한 명은 은신을 해제한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회장의 옆에 은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전부 정보를 흘렸을까? 아니면 하나만 흘렸을까? 심 회장이 뭐라고 할까?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슬슬 피어오르는 긴장감에 김 양은 목이 막혔다. 졸지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백정이 백정.’하는 거 같으니까, 뭐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우리 칼은 넣으셈. 넣고 하셈.’
‘왜?’
‘님아. 제발 좀.’
‘······.’
필사적인 김 양의 눈빛을 슬그머니 피하는 마루였다.
“일단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저나 경호원들이 마루 씨의 정보를 오진 그룹에 넘길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야 많지 않을까요? 돈이라든가. 억하심정이라든가. 버르장머리 좀 고쳐 보고 싶다거나, 그룹 간 이해관계 일치가 있을 수도 있겠고 말이죠.”
심은영은 마루가 갑자기 이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억지 부리는 것 같은 이야기 사이에 숨겨진 의미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경계해야 할 것들이었다.
“우선, 그룹 간 이해관계 일치는 아니라고 말씀드리죠. 아시다시피 부산과 일본에서 있었던 무력충돌 때문에 샬롯과 월드는 원수 관계가 됐어요. 오진 그룹은 월드 그룹과 사실상 하나나 마찬가지고요.”
“겪어보니.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게, 이 바닥이더라고요. 아닙니까?”
마루의 대답을 심은영은 알아들었다.
칼을 뽑은 순간,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그가 죽이기로 마음먹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럼 왜 칼을 뽑고 휘두르지 않았을까?
“원하는 게 뭐죠?”
“써보니까 앞으로 중화제가 많이 필요할 것 같더군요.”
인해전술을 깰 때도 그랬지만, 중화기에 대응하려면 오버 히트에 가깝게 움직여야 했다. 소규모 교전에서야 쉬엄쉬엄 적당히 싸울 수 있다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중화제는 필수라고 봐야 했다.
일본에서 능력자들인지 초인들인지 이상한 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중국이나 미국에서 그냥 보고 있을까? 러시아는? 한국은? 결국에는 시간문제지 능력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올 게 뻔했다.
거기에 약쟁이들까지 생각하면 중화제의 필요성은 더 커졌다. 미국에서 싸운 갱단과 카르텔에 놈들도 일반인보다 신체능력이 강화되긴 마찬가지. 심지어 이성을 잃지 않고 약물의 효과만 보는 놈들도 있었다. 소수였지만 있다는 게 중요했다.
‘카르텔 흰 양복 놈도 그렇고, 갱단 놈도 그렇고.’
이런 놈들의 숫자가 많아진다면? 쉬엄쉬엄 싸우기 어려워진다는 말. 지금까지는 중화제를 아끼면서 싸웠지만, 앞으로는 마냥 아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 KTX 테러에서 심 회장을 구하면서, 중화제를 확보했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많지 않은 수량이었다.
나중에라도 중화제가 필요하게 되면? 중화제를 택배로 받을 건가? 대가는 무엇으로 어떻게 하고? 택배로 보낸 중화제가 중간에서 사라지면? 그거 찾겠다고 또 뒤집고 다니고?
중화제를 언급하는 마루의 말에, 심은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생산분 중화제를 모두 드리기로 했는데도 중화제가 더 필요하다? 중화제 레시피를 달라는 건가요?”
“원료에서부터 합성과정까지 공정 전부가 필요합니다.”
기순이와 이야기했을 때는 레시피를 포기하기로 했었다. 만들지도 못하는 레시피 들고 있다가 위험만 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때는 버지니아나 국토안보국과 연결될 거라 상상도 못 했던 때였고. 지금은 국토안보국 뒷배에, 미 해병대 뒷배, 육군에도 좋은 이미지 쌓은 상황이었다. 레시피를 확보해 미국에서 생산한다고 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심은영이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요구한 건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레시피를 확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었으니까.
가질 수 있을 때는 안 가져가다가, 중화제 레시피를 달라고 한 것이니, 심 회장 생각으로는 미국과 연결하는 게 자연스럽겠지. 굳이 오해를 풀 필요가 없었다.
“······.”
마루의 침묵을 심은영은 긍정이라고 이해했다.
“그렇군요. 거절하면 정리하라고 하던가요?”
“······.”
어? 거기까지 가는 건 아니었는데 심 회장이 너무 나갔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도 이상한 분위기라서 마루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김 양이 ‘저게 무슨 소리임?’, ‘국토안보국 사람이랑 뭔 이야기 했음?’, ‘정리하라고 했음?’, ‘금은? 금도 안 받았는데 정리?’ 눈빛을 마구 보내기 시작했다.
정리까지 가는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예상 밖으로 튀었다.
“하- 그래요. 전술 무기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필요하겠죠.”
“?”
“그렇게 하죠. 중화제 레시피와 세부 공정. 드리도록 할게요.”
“회장님! 사실···.”
쫘아악-!
옆에 있던 경호원이 입을 열자마자, 심은영이 귀싸대기를 날렸다. 경호원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력한 따귀.
“어딜 끼어들어요! 나가세요!”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한 방에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줄줄 흘렀다. 경호원은 핏방울을 뚝뚝 흘리면서도 심 회장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심 회장 뒤에 있던 공간이 순간 일렁거렸다.
“하- 미안해요. 상황이 이러다 보니, 제가 감정이 좀 조절이 되지 않아서.”
“예. 뭐.”
끼-끼리리-끼릭
마루가 칼을 칼집에 꽂자, 녹슨 쇠 냄새가 점차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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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와의 협상은 간단했다.
주기로 한 거 주고 거기에 중화제 레시피와 세부공정까지 넘겨주면 되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심은영은 허리를 깊게 숙인 경호원, 미야코를 보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서 자기 책임이라는 둥, 자기가 말했다는 둥 입을 열었다가는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부산에서 봤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으니까. 기순이라는 친구가 곁에 있을 때와 지금은 전혀 달랐다. 칼을 뽑았을 때 풍기는 불길함은 착각이나 기우가 아니었다.
그건 확실히 죽음의 냄새였다. 죽음을 뿌리고 다니는 게 틀림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죠?”
경호원, 하츠네 미야코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병신 같은 오진 그룹. 병신 같은 여자 같으니. 정보를 줬으면 포획하든, 죽이든, 최소한 상처라도 입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그건 위험했다. 배제해야 했다. 샬롯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심 회장을 위해서라도,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검붉은 칼날을 떠올리자 파르르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는 손가락. 미야코는 가늘게 심호흡했다.
심은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경호원직 내려놓고 잠시 쉬도록 해요.”
미야코가 털썩 무릎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그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위험한 사람 맞아요. 근데 그걸 누가 판단해야 하죠?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결정해야 하죠?”
판단과 결정,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있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자신을 경호했던 이 오래된 경호원은 그걸 잊어버렸다.
방금 말한 것처럼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일본에서 대역을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나 복수와 연관됐을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미야코는 선을 넘었다. 따귀를 때리는 것으로 순간을 모면하기는 했지만,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랐다.
“그를 섣부르게 판단하려고 하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배제하자? 배제하려다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놈이 우리 그룹의 지적 재산을 강탈해갔다. 복수해야지? 그 사람이 어떤 건지 곁에서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든다면 문제 아닐까요?”
“······.”
“······.”
생으로 뺏겼으니까 억울하다. 손해 봤다. 그러니까 복수? 그런 일차원적인 생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가 없었으면 험한 꼴 보고 죽거나 뺏겼다. 억울해할 게 아니라, 그 정도에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기는 게 맞았다.
급속치료제를 요구했다면? 급속치료제 레시피와 버서커 폴의 레시피를 요구했다면? 일본에서 가져온 연구자료 전부를 요구했다면?
그가 미 정부에 정보를 넘겼다면, 미국에서 전부를 원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관계를 유지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중화제가 많이 필요하다는 말에 숨겨진 의미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가 중화제가 많이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험악해진다는 소리였다.
“직위 해제합니다. 머리 식히면서 인사이동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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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군기지로 향하는 자동차 안, 김 양은 아쉬웠다.
금 이야기를 꺼내기도 이상한 분위기, 마루에게 눈치를 줬는데 알아들었으면서도 모른척했다.
“왜 또?”
“일없음.”
그러고 보니 심은영 회장도 나빴다. 백정하고만 이야기하고 자기에게는 묻지도 않았다. 기순이놈 때문에 이게 무슨 영양가 없는 고생인지.
“콜트 파이슨 건졌으면 됐지, 뭐가 아쉬워서 그래.”
“······.”
김 양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풀렸다. 히죽- 주섬주섬 돌돌 꽁꽁 감싸둔 콜트 파이슨을 꺼내더니 슬슬 닦기 시작하는 모습에 마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콜트 파이슨으로 힐링을 했는지, 김 양이 툭 말했다.
“기순이는 어떻게?”
“탈출했다고 했으니까. 살아있다고 봐야겠지.”
“안 찾음?”
“그 녀석이 작심하고 숨었으면 못 찾지.”
작심했는지 사망신고까지 때려버린 녀석이었다. 김기순이라는 신분을 버렸다는 소리. 나루를 포기할 놈이 아니기는 한데, 신분까지 버리고 잠적해 버렸으니 하루 사이에 찾기는 불가능했다.
빌어먹을 놈. 이게 무슨 고생인가? 기순이 놈 찾는다고 하다가 나오진 회장과 은원 정리하게 됐으니까 잘된 일인가?
‘나주현이라.’
안타깝기는 했다.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 만든 약이 불행의 씨앗이 됐고, 사랑을 찾으려고 했던 약이 증오를 낳았다.
웅- 웅-
“네. 여보세요.”
[국토안보국 덴 브라운입니다.]“예. 말씀하세요.”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사촌을 구해주신 일. 잊지 않겠습니다.]길버트 브라운 중령과 해병대원들 구조, 이후 육군과 민간인들까지 구조한 것을 따지자면 사실 무공훈장을 받아도 될 정도의 공로였다.
뉴스와 신문을 도배할 정도의 업적이었지만, 국토안보국 하청 용병에 마루의 능력을 감춰야 할 필요성 때문에 덮어졌다.
“괜찮습니다. 따로 받기로 한 게 제법 많아서요.”
해병대도 그렇고 육군까지. 군부와 제법 연을 텄으니 마루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오늘 공군 수송기로 귀국하기로 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네.”
주저하던 덴 브라운이 작게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전진기지 하나가 전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