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21)
러스트 [RUST]-21
김 양은 오늘 하루가 매우, 아주, 정말 힘들었다. 사시미로 헤집어진 오른팔은 구멍이 숭숭 뚫린 플라스틱 깁스를 했다.
상처가 난 부분을 소독해야 해서 그 부분이 뻥 뚫려있는 깁스였다. 손가락은 점점 더 부어올라 권총 방아쇠를 당기기 힘들었다.
‘감각이 좋지 않아.’
총잡이 그것도 본능적인 총잡이인 김 양은 감각에 의존하는 사격을 했다. 지금처럼 감각이 어긋나면 그걸 빨리 잡아야 했다.
마루는 어쨌든 자신을 살려줬지만, 회사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불문곡직 죽이자고 할 테니까.
그러니까 왼손을 중심으로 감각을 다시 맞춰야 했다, 김 양은 꺼내 놓은 총들을 왼손으로 요리조리 만졌다.
퉁!
퉁!
거실 끝에 붙여놓은 과녁에 구멍이 송송 뚫렸다.
흐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왼손도 오른손 대비 80~90% 정도까지는 쓸 수 있지만 9mm 권총의 반동을 한 손으로 감당하기엔 약간 어설펐다.
김 양은 통통한 소음기를 단, 22구경 발터 P22로 총을 바꿔 들었다.
뚱!
뚱!
폭!
폭!
확실히 반동 제어가 쉬웠다. 구경이 22이라는 게 좀 그랬지만, 근거리에서 두 방이면 뭐.
쩝- 입맛을 다신 김 양이 왼팔을 살짝 움직여도 보고 회전도 시켜봤다.
좌우 OK. 상하는 조금. 빨리 흔들거나 움직이는 건 무리.
그래도 움직일 때 찢어지는 고통은 없었다. 역시 진통제 최고. 그녀는 진통제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최대한 빨리 거처를 옮겨야 해.’
이르면 새벽에라도.
늦어도 모레 정도면 회사가 움직일 것이다.
아주 운이 좋다면 회사가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튀긴, 튀어야 했다.
운만 생각하고 있다가 잡혀서 죽으면 억울해서 눈을 감지도 못할 테니까.
김 양은 커다란 캐리어를 하나 꺼낸 뒤, 아끼다 못 입은 옷들을 챙겨 넣었다. 그래도 한 번은 입었어야 했는데, 라벨도 뜯지 못한 아이들이 애처롭게 김 양을 부르는 것 같았다.
‘미안.’
도저히 냉정하게 고를 수 없어, 김 양은 미리 만들어 놓은 여권부터 확인했다.
김희영, 김희애, 김영영···.
‘뭔 생각으로 이딴 이름으로 했었지?’
증명사진 속 자신은··· 금색 단발머리, 아줌마 파마머리, 아프로 스타일에 레게머리까지 대체 과거의 난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건가? 이건 좀.
하긴 이걸 쓸 일이 있을 정도로 시급한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누가 예측했겠는가? 혹시나 해서 만들어 둔 건데.
대충 난감하게 터진 일은 회사에서 백업해줘, 신분 변경을 할 이유가 없었다. 부산에 있는 클럽인지 나이트인지에서 러시아 갱단과 총격전을 했을 때도 그랬다. 회사에서 알아서 뒤처리해줬기 때문에 신분 바꿀 일이 없었다.
야쿠자들이랑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오순도순 총질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체가 두 자리 단위로 쌓여도, 김 양이 신분 바꿀 일은 없었다.
근데 탈주해야 할 상대가 회사다 보니 일단 당장이라도 지금 신분을 바꿔야 했다.
“아- 이거 신분도 대부분 홍 과장이 해준 건데.”
홍 과장이라면 회사에 알리지 않은 신분도 몇 개 만들었겠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지금 가지고 있는 신분들도 한 번은 확인해야 한다는 건데, 무슨 방법으로 회사가 모르는 신분인지 아는 신분인지 구분하겠는가? 그냥 전부 오래 간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한 번에 북미나 남미로 튀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 신분으로 가면 북미나 남미로 갔다는 기록이 남을 테니까. 혹시라도 모르니 전혀 다른 신분이 필요했다.
그럼 어떻게?
[···그러니까 8월 말까지 쏟아졌던 집중호우가 지진피해를 더 키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일본은 8월 말까지 대기의 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상 강수대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는데요. 이 선상 강수대의 영향으로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지반이 약해졌습니다. 물을 머금고 약해진 지반인데 여기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피해가 더 커진 것으로···] [사상자는 추정 가능한 상황인가요?] [현재 일본 임시재난 정부에서는 공식적인 집계를 내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외신보도에 따르면 도쿄에서만 최소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명 구조는 어떻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도로와 철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전기와 가스마저 끊겨 생존자 수색과 부상자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도쿄 도심도 그런가요? 일본의 건축물들은 내진 설계가 잘됐다는 평가가 많았는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집중호우로 약해진 지반에 대지진이 겹쳐, 지반 자체가 붕괴하는 곳이 많아서 피해가 컸습니다.]김 양은 틀어 놓은 TV를 배경음 삼아 짐을 챙기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슬쩍 지나갔던 화면에 나온 장소가 낯익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파괴된 도쿄 중심가를 드론이 촬영하며 지나가는 가운데 야쿠자 빌딩이 있던 곳을 슬쩍 지나갔다. 반파된 건물.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유리창이 모조리 깨지고 빌딩 여기저기에 금이 쫙쫙 간 모습이었다.
[이웃 나라 일본이 미증유의 재난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해야···] [10년 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우리 국민의 성금과 도움을 쏙 빼고, 혐한만 일삼았던 일본에 무슨 지원을 하겠다는 건지···] [우리 국회에서도 일본에 대한 지원 규모를 결정하는데 많은 논쟁이 오고 갔다지요?] [예 그렇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얽혀있는 만큼, 과거사는 묻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대규모 지원을 해야 한다는 측과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돕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강경한 주장으로는 한국 경제를 죽이겠다고 경제 규제를 한 일본이 혐한을 일삼고 있는데 대규모 지원을 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어, 각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가운데···]김양은 TV 영상을 되감기 했다.
완전히 폐허가 됐지만, 금이 쫙쫙 간 저 건물은 기억이 났다. 회사와 협약을 맺은 야쿠자의 본사 건물이었다. 그 건물에는 다양한 업장이 있었는데, 대부업체를 비롯해, 신분 위변조 업무를 담당하는 업체도 있었다.
김 양이 기억하기로, 일본은 여권 발급이나 호적 같은 것도 한국과는 달리 좀 레트로? 아날로그? 그런 느낌이었다. 대부분 직접 대면이 필요한 방식이었다. 신상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할 때도 본인이 작성한 서류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람이 손으로 적고 입력하고 그러니 어떤 의미로 보자면 보안에 강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담당 직원만 구워삶으면 역으로 신분 위변조를 하기 쉬운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야쿠자나 공무원을 낀 신분 위변조 전문으로 하는 업장이 제법 발달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김 양은 야반도주 지원 상품 같은 것을 떠올렸다. 야반도주를 지원하면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새 출발을 돕는 상품을 보곤 재밌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당시라면 나름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최대 규모 8.0에 해당하는 여진이 적게는 3~4차례 많게는 6~7차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여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강진이 계속된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진도규모 최대 9.1에 해당하는 대지진이 단층대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1995년 고베 대지진을 통해 살펴보면, 여진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규모가 큰 이번 도쿄 대지진 또한 여진이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습니다.]지진으로 동사무소? 행정센터? 여튼 그런 곳도 전부 박살 났다. 일본 특유의 문서보관소 같은 곳도 전부 날아갔을 것이다.
상황을 보아하니 사망자, 실종자 집계가 가까운 시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쓰나미로 사망자 실종자 집계하는데, 한 세월 걸렸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김 양이었다.
동일본 대지진보다 더 막장인 상황에 일본 행정부도 갈려 나갔고, 임시재난 정부를 설치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분 위변조를 하기엔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
김 양은 TV를 보면서 회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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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은 세상 힘들었다.
진통제를 먹고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역시 탈주 이사(?)를 아픈 팔로 혼자 한다는 건, 쓸쓸하고 외롭고 어쩐지 우울했던 지난날이 떠오르고··· 슬펐다.
일단 다른 신분으로 여성 전용 고시텔(?)이라는 업소에 제일 큰 방을 계약했다. 코로나 시국이라서 그런지 비대면으로도 계약이 가능한 점이 좋았다.
제일 큰 방이 5평, 심지어 샤워 시설과 화장실 면적도 그 안에 포함됐다고 하니, 실제 쓸 수 있는 면적은 3.5평 내외라고 했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면 넓어 보였지만, 김 양의 눈썰미를 속일 수는 없었다.
‘개좁아.’
어쨌든 택배는 관리실? 총무실?에서 받아준다고 하고, 따로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 내는 것도 아니고 TV와 기본 컴퓨터 제공에, 냉난방은 중앙집중식 냉난방으로 냉난방 요금도 월세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코인 세탁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거 빼고는 단기간 머물기에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회사가 추적하면 좋고 아니어도 좋아.`
여러 상황을 다양하게 대응하는 게 생존전략에 맞으니까.
김 양은 그렇게 장소를 하나 잡았고, 또 다른 명의로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짜리 숙소를 계약했다.
코로나 때문에 공실이 많아 1년 계약하면 3개월 무료로 해준다는 오피스텔, 재개발이 확정되어 길어야 1년 6개월 안에 나가야 하는 단독주택, 경매가 들어가 상태 좋지 못한 빌라. 숙박객이 대폭 감소해 장기 숙박 특별 할인하는 곳까지 김 양은 가지고 있는 신분 전부를 활용해 여기저기 계약했다.
‘비대면 개좋아.’
중계사이트와 비대면 계약이 아니었으면 하루를 통으로 날릴 뻔했다.
힐끗 시계를 본 김 양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화들짝 이주 준비를 계속했다. 역시 제일 중요한 건 총이랑 총알이었다. 첼로 케이스를 개조한 총기 케이스에 저격총, 권총, 종기부품과 스코프, 레이저 포인터와 같은 파츠 무엇보다 중요한 총알.
바리바리 챙겨 넣고 가방을 들자니 18~20kg에 육박했다. 정상이었다면 들 수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18~20kg 왔다 갔다 하는 무게를 들고 거기에 대형 캐리어까지 들고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넣지 못하고 깔린 총과 총알을 보니 김 양의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본격적으로 회사에게 쫓기기 시작하면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게 총과 총알이었다. 북미나 남미로 넘어가는 게 성공한다면야 구하겠지만, 그전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베스트는 쫓기기 전에 탈주하는 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무장은 충실해야 해.’
다수의 적과 교전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중요한 건 보급이었다. 물론 현장 보급이라고 회사 애들 잡아서 총알 보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럴 시간이 없이 계속 도주해야 할 상황이라면 반드시 보급 문제가 터질 게 분명했다.
‘총도 총이지만, 총알을 최대한 많이 챙겨야 하는데.’
이 몸으로는 18~20kg도 한계였다. 김 양은 무거운 가방을 내려놨다. 넣지 못한 총과 총알, 집안 이곳저곳에 숨겨둔 폭탄이며 신관들이 너무나 아까웠다.
방법이 없을까?
‘아! 택배!’
‘퀵서비스’
김 양은 재빨리 고시텔과 호텔에 전화를 걸어 퀵서비스를 받아달라 요청했다. 두 곳 모두 OK. 다음은 오피스텔. 오피스텔에도 관리실이 있지만, 퀵서비스 요금 때문에 원칙상 받지 않는다는 걸 바로 입금한다고 해서 통과. 나머지는 재개발 예정 주택에는 택배를 보내는 거로.
김 양은 바로 택배와 퀵서비스로 보낼 총기와 총알, 관련 부품들을 챙겼다.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는 많이 있었다. 김 양은 비닐과 랩으로 꼼꼼하게 싼 총과 총알을 다시 종이박스에 넣고 또 포장한 뒤 위에 김치 국물과 까나리 액젓으로 데코를 했다.
그렇게 포장한 박스에서는 묵은지 냄새와 까나리 액젓의 풍미가 스믈스믈 흘러나왔다.
큼.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지는 향취.
김 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오피스텔이고 고시텔이고 호텔이고 열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검은색 커다란 비닐봉지로 꽁꽁 감쌌지만, 일부러 살짝 흘린 국물이 배어 나오게 했으니 누가 봐도 ‘나 건드리지 마.’ 상태였다.
“좋아. 좋아.”
한시름 놓였다.
‘일본에서 신분을 만들고 그 신분으로 한국 부동산을 취득하고, 영주권을 딴 다음. 북미나 남미로 가서 다시 신분을 만들면 탈주 성공이다.’
그렇게 신분을 이중삼중으로 바꾸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살든, 북미 캐나다 같은 곳에서 살든 그러면 어쩔 건가?
김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생한 김 양은 바로 특삼계전복죽을 개봉했다. 복스럽게 한 숟가락을 퍼서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농후하면서 고소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꼬들꼬들한 닭과 전복의 조화. 김 양은 눈을 감고 화음처럼 이어지는 맛의 연주를 감상했다.
띠리리리릭
띠리리리릭
아-
대포폰이 분위기를 깼다. 이 대포폰 번호를 아는 건 백정 마루 하나였다. 김 양은 행복한 시간을 방해받은 분노를 아낌없이 표출했다.
“왜?”
[나와.]‘나와.’ 단 한마디에 마루의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김 양의 분노가 팍 조절됐다. 분노 조절 잘하는 김 양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나긋하게 대답했다.
“지금 밥 먹는 중인데, 먹고 가면 안 될까? 많이 급해?”
[나와.]아니 이 종간나 셋키가.
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