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264)
러스트 [RUST]-264
핵 보안 코드 폐기를 최우선으로 해달라는 말에 마루는 일단 주억거렸다.
‘확보 여의치 않으면 폐기.’에서 무조건 ‘폐기’로 간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거 알자고 피곤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확실하게 해야 할 건 하나 있었다. 탈출 루트.
“신형 전략기는 요청하면 바로 오는 겁니까?”
[주한 미군 기지에 대기하고 있으니, 30분이면 충분히 도착합니다.]미국 중부지역에서 베이징 공항까지 4시간대에 찍은 비행기. 이게 없으면 돌아가는 길이 매우 피곤해졌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미로 가서, 남미에서 배나 육로로 미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쓰거나. 배를 타고 가는 방법. 유럽과 중앙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는 아직 변이 괴수가 없다고 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였다.
배를 타고 가는 것도 가능했지만,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미국 서부지역 주요 항구가 EMP로 날아 가버려, 선적과 하역이 3개월 가까이 밀린 상황이라고 했다. 당연히 배편을 구하기 힘들었다.
‘유럽을 통해 가야 하나?’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돌아. 유럽으로 가서,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보스턴이나 뉴욕, 캐나다 쪽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타고 왔던 걸 타고 돌아가는 것이 최고.
“제가 요청하면 무조건 오는 겁니까?”
[···작전에 무조건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어렵겠지만, 블라디마루 칼린 씨를 위해 주한미군 기지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덴 브라운 과장이라면 주고받기가 확실했으니 신뢰가 있지만, 군부는 영 복잡하다고 할까? 과장의 사촌인 길버트 브라운 대령이라든지 저번에 일본에서 같이 구른 사령관, 탈출 작전 같이 뛴 지휘관은 믿음직했지만, 다른 놈들은 영 아니었다.
“현장 상황이 복잡해서. 통신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앞으로 통신은 자동응답으로 돌려놓을 테니, 오해하지 않도록 전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대놓고 명령할 것처럼 하더니, 덴 브라운 과장을 통해서 전달한 건 이쪽을 배려했다는 건가? 내용 전달 방식은 배려하면서 정작 내용은 전혀 배려가 아니었다.
‘핵 보안 코드를 폐기하라는 건데.’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중국 정부에서 ‘핵 보안 코드 폐기하세요.’ 하고 넙죽 건네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디아나. 핵 보안 코드 없으면 핵 못 쓰나?”
[발사 가능합니다.]예를 들면 전략핵 잠수함 같은 경우가 그랬다. 본토가 선제공격을 받아 멸망했다고 치자. 백악관이고 대통령이고 증발했는데 누가 핵 보안 코드 어쩌고 확인해 주겠나?
본토 공격받은 순간, 전략핵 잠수함이 핵미사일로 보복하는 건데. 핵 보안 코드가 없으면 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
마루도 대충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핵 보안 코드로 민감하게 이럴 필요가 있나 싶은데···.”
[핵전쟁 촉발 시나리오 가운데, 테러리스트가 핵 보안 코드를 탈취해 핵을 사용한다는 것이 있습니다.]“영화 같네. 그래서.”
[테러리스트에게 핵 보안 코드가 탈취되어 핵이 발사됐는데, 그걸 무조건 핵으로 보복해 인류 멸망의 시작이 될지 모르는 핵전쟁을 해야 할까? 라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그러니까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겠네? 핵으로 엿을 먹이고 싶으면, 테러리스트가 핵 보안 코드를 뺏어갔어요. 그러니까 나도 피해자다. 난 책임 없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었느냐? 이렇게 이용할 수도 있겠다.”
[그렇습니다.]그런데 핵 보안 코드를 그냥 없애 버리면? 테러리스트 핑계 댈 수 없어지겠네. 탈취당했다고 핑계도 댈 수 없게 되고.
마루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이것저것 이상했다. 특히 중국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는 부분이 그랬다.
중국이 어떤 나라던가?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났는데도 자존심 찾으면서 도움 요청하지 않던 나라 아니던가?
비공식적으로 도와달라고 해서 미국 특수부대가 베이징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는 부분도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핵 보안 코드 탈취 문제라 미국이 무시하는 건 힘들었을 거다. 말 그대로 테러리스트 핵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위험이 있는데, 이걸 그냥 둘 순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미국 특수부대가 중국으로 온다면,
‘증인이 온 격인가? 핵 보안 코드를 뺏기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 거기에 잘하면 미국의 최정예 부대를 제거할 기회이자, 최신 장비를 확보할 기회로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북부전구에서 보낸 초인들과 미국 특수부대가 양패구상하는 것을 노릴 수도 있고.
정말 만약. 북부전구에서 보냈다는 초인들, 일본 능력자들이 중국 정부와도 연결됐다면? 베이징은 복마전이자, 거대한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루가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까진 너무 나간 것 같았다.
확실한 것은 ‘핵 보안 코드 확보 또는 폐기.’에서 ‘무조건 폐기.’로 갔다는 건. 미국 정부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디아나, 이쪽 흩어진 애들 말고, 다른 쪽 있었지? 칼질하는 여자가 있는 쪽. 거기로 가자.”
사방으로 흩어져 시간 끌기 시작하는 잔챙이들 잡아 죽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치매 영감이 우두머리였다면, 치매 영감이 죽은 지금. 다음 대표는 그 여자가 되겠지.
핵 보안 코드를 노린다면, 그 여자가 있는 쪽으로 가는 게 맞았다. 치매 영감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그 여자가 움직일 테니까.
HUD에 표시된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하는 마루였다.
부우우웅-
10m 넘게 떠오른 몸이 그대로 옥상에 착지했다.
데굴데굴 굴러 충격을 흡수한 뒤, 남은 에너지를 이용해 벌떡 일어선 마루가 쭉쭉 내달렸다.
[CCTV가 이상합니다. 전부 작동이 중지된 상태입니다.]거리엔 인기척이 하나도 없었다.
“이쪽 봉쇄구역인가? 여기 근처 정보 없어?”
[서버 폐쇄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중국 애들이 자발적으로 CCTV 작동을 멈추고, 서버까지 정지시켰다고? 봉쇄했으면 군대나 공안이라도 돌아다니는 게 일반적인데 좀 이상했다.
“놈들의 현재 위치는? 자동차 블랙박스 해킹으로도 찾기 힘들어?”
[확인하고 있습니다.]놓쳤다.
치매 할아범 있는 쪽과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징 방어군과 교전한 흔적은 초반에만 있었고, 뒤로 갈수록 방어군은 알아서 후퇴했고 이쪽은 무혈입성하듯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다.
[아군식별 장치가 반응합니다.]“올려봐.”
지도에 떠오른 숫자는 모두 5.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을 보니 이쪽도 전부 시체 같았다. 살아서 작전 중이라면 저렇게 서로 붙어있을 리 없을 테니.
“근처에 또 다른 신호는 없고?”
[···회선이 불안정합니다.] [베이징의 인터넷과 통신망이 끊기고 있습니다.] [우회 회선을 확인—-] [———]“디아나?”
[———]마루가 위성통신 장비를 꺼내 연결하자 디아나의 반응이 돌아왔다.
[—위성 연결 확인됐습니다. 딜레이가 있습니다.]“놈들 마지막 위치 표시하고, 거기서 최단 거리에 있는 공산당 관련 대형 건물 연결해줘.”
핵 방공호가 됐든 방어선이 됐든 그쪽에 있겠지.
마루는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내듯 달렸다.
[인민대회당이 제일 큰 건물입니다.]전국 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1959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
“이쪽은 천안문 광장 방향인 거 같은데.”
[천안문 근처에 있습니다.]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군인들이 천안문 광장 근처로 갈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이렇게 무턱대고 가긴 어려웠다.
“지금 바로 실시간 위성 자료를 구하기는 힘들겠지?”
[시간이 걸립니다.]일단 어떤 상황인지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CCTV가 전부 먹통인지라 상황을 살피려면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조금 떨어진 빌딩 옥상으로 가려고 했더니, 인근 높은 건물들은 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젠장.’
은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문으로 가는 건 위험했다. 마루는 다른 건물을 골랐다. 외벽이 강화유리로 된 건물이었다.
스윽-
아파트 거실 창을 자르면서 느꼈지만, 이클립스로 유리를 자를 때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잘렸다.
빌딩 옥상으로 올라가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끊었어?’
옥상으로 향하는 문도 잠겨있었다. 전부 제대로 인터넷이 돌아갔으면 미리 확인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크르르르르- 낮은 소리와 함께 거칠게 잘리는 두툼한 비상문. 옥상에 올라서자, 군인들이 있었다. 대공포를 비롯해 소형 지대공 미사일에 저격병까지. 최소한 소대 병력을 되는 병력이 옥상에 포진하고 있는 모습.
은신 기능이 100%가 아니어서 조심스러웠지만, 천안문 광장 쪽을 봐야 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광경. 천안문 광장과 인근은 완벽하게 진지로 구축된 상태였다.
전차와 자주포, 장갑차를 비롯해 대공 방어체계까지 빽빽하게 인근을 채우고 있었다. 여기를 뚫고 들어가서 핵 보안 카드를 가져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일본 초인들은 이걸 뚫고 들어가겠다는 소린데.’
마루는 놈들이 들어갔다 나오면, 그때 족칠 생각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군식별 신호 천안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저기에 저렇게 몰려있는데?’
투다다다탕!
조금씩 커지는 총성. 마치 게임에 나오는 야만 용사처럼 전신에 털가죽 옷을 입은 자들이 쐐기 진형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예광탄 불꽃을 따라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졌지만, 괴수 가죽을 뚫지 못했다. 그런 그들도 40mm 기관포와 대전차 미사일은 피하고 싶었는지, 쐐기 진형을 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쏴. 막아!”
“저격! 쏘라고!”
공습사이렌이 천안문 광장을 가득 채우자, 대기하고 있던 전투 헬기가 하늘로 떠올랐다. 전차를 비롯한 기갑 전력도. 초인들이 몰려오는 방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초인들의 평균적인 신체능력은 성인 남성의 3~4배였다. 특수능력이 있다고 하고 괴수 가죽이 대단하다고 해도, 천안문 인근 중국군을 뚫고 들어가긴 역부족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요란하게 간다고?
‘성동격서?’
그건 중국 애들도 알 텐데. 그 증거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갑부대와 군인들이 있었다.
그런 마루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본 초인들 몇몇이 총을 꺼내 들었다. 그들이 뽑은 총 가운데는 커다란 BB탄 탄창이 달린 장난감 총도 있었다. 사방으로 총을 쏴대는 초인들.
타다다닥
총알과 형형색색의 형광페인트 탄이 사방을 두들겨 댔다. 그리고 그렇게 터지기 시작한 BB탄은 그들을 추격하고 있던 미국 특수부대원들에게도 쏟아졌다.
파파파팍
타파파팍
BB탄이 터지며 리퍼 슈트에 알록달록 형광페인트 자국을 남겼다. 은신 기능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중국군이 그것을 보곤 외쳤다.
“뒤다. 뒤에도 놈들이 있다.”
“적들이 은신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을 추격하던 특수부대도 고스란히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쪽 구역이 점점 더 혼돈으로 물들어갈 무렵. 인민대회당 근처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왔다.
저곳이었다.
마루는 그대로 옥상에서 몸을 날리곤 빌딩 외벽에 칼날을 박아 넣고 내려갔다. 크르르르르르- 낮은 소리를 내며 거칠게 철근 콘크리트를 물어뜯기 시작하는 이클립스.
서서히 땅바닥에 닿을 무렵. 벽을 박차고 날아오른 마루가 폭발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쾅! 콰쾅!
투다다다닥
“끄으윽”
“살려줘!”
“아아악 눈이!”
“가스! 가스!”
천안문 광장은 총성과 폭음으로 가득했다.
하얗게 피어오른 연기와 불꽃을 뚫고 절규와 비명으로 치솟는 광경.
[생명유지장치를 작동합니다.]HUD 화면에 떠오른 정보. 연막탄이 아니라 백린탄.
거기에 누가 언제 터트렸는지 모를 신경가스까지 뒤섞여 있었다.
그 죽음의 연기를 뚫고 움직이는 무엇.
마루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진득한 살기가 동그란 파문처럼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