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40)
러스트 [RUST]-40
기순은 얼굴이 빨개졌다.
여긴 호텔이다. 그것도 나름 유명한 호텔.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말. 타인의 시선에 조금 예민한 사람들이 있는 곳.
뷔페라고 하면, 일반 뷔페야 먹을 수 있는 만큼, 먹고 싶은 만큼 다 드세요.- 개념이면, 호텔 뷔페는 오늘은 어떤 걸 드시고 싶으십니까? 입맛에 따라 골라서 드세요. 부족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라는 개념에 가깝다고 할까? 기순의 생각은 그랬다.
근데, 이것들은 뭐지?
“여기 양갈비 10대. 추가.”
“저도.”
마루가 양갈비를 굽고 있는 쉐프에게 주문했다. 그 뒤를 졸졸 따르던 김 양도 덧붙였다.
“랍스터 20마리. 미리 구워주시고.”
“전 10마리만.”
역시, 랍스터를 굽고 있는 쉐프에게도 오더를 넣는 마루, 자석처럼 붙어 주문하는 김 양.
그래 다 좋았다. 보통 양갈비는 2~3쪽 많이 먹는 사람도 4~5쪽 먹는다. 랍스터도 마찬가지 많이 먹어봐야 4~5마리 내외였다. 근데 저건 뭐지? 심지어 다른 육류 파트도 저런 식으로 돌았다는 것.
이게 사람 새끼들인가?
같은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코로나 시국이라서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전이라면 진짜 견디지 못했다.
덜컹-
마루가 끝내버린 트레이가 무대 뒤로 퇴장하는 소리.
덜컹-
김 양이라는 여자가 끝을 본 트레이가 전사하는 소리.
‘그··· 그만해 미친 것들아! 뱃속에서 세기말이라도 터진 거냐?“
기순은 참고 또 참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막판에는 베이커리와 디저트 코너까지 분쇄하는 두 사람을 피해, 간신이 몇 조각 건진 파이류와 케이크 그리고 햄과 치즈류 정도로 배를 채운 기순이었다.
“후- 여기 괜찮네.”
마루가 만족스러운 평을 했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는 김 양 또한 윤기가 살짝 도는 얼굴이었다.
참다못한 기순이 입을 열었다.
“야- 너 씨발 진짜 많이 변했다. 우리 중학교 때 호텔 뷔페 자주 갔었잖아. 거기서 접시에 가득 담는 아저씨를 까면서 혐오스럽다고 했던 거 기억나냐? 그게 자라서 지금 니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겠지?”
“······.”
“주변을 좀 봐. 제발 좀 봐가면서 먹어라. 아니, 다른 사람도 좀 먹게 적당히 남기면서 먹든지, 음식이 새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덜어 가든지, 그냥 메뚜기처럼 싹 쓸어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음식 새로 나올 때까지 숟가락만 빨고 있으라고?”
“······.”
너무 배고팠다. 그저 음식이 있다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거기에 곁에 있는 김 양이 스퍼트를 올리니까 무의식중에 경쟁심리가 발동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먹을 거면 민폐 끼치지 말고 일반 식당가서 5인분이든 10인분이든 시키면 될··· 아니, 씨발. 그냥 20인분씩 시켜서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 내가 보기에 너 지금 거의 20인분은 먹은 거 같아. 랍스터가 번데기냐? 후루룩 먹게? 그리고 거기 김 양? 아니 지금 그게 뭡니까? 음식으로 하노이의 탑 쌓아요? 테트리스 합니까? 테이블 예절 같은 거 학교에서 안 배웠어요?”
기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 양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야- 저 여자 뭐냐? 오른팔에 깁스한 거 보니까 길고양이 오른쪽 앞다리 어쩌고 그거 저 여자지? 병원에 안 가고 왜 동물병원으로 갔는데? 대체 뭐 하는 여자야? 음식을 담는 것부터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먹는 것도 그래. 복스럽게 먹는다. 그거 좋지. 근데 나이가 있잖아. 나이가. 애들이라면 맛있게만 먹어라. 그럴 수 있어. 그런데 20대면 좀 절제를 하면서 먹어야지, 누가 뺏어 먹냐? 누가 먹지 못하게 때려? 무슨 뒤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기순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마루는 살짝 반성하는 얼굴을 하고 귀를 열었다. 기순의 말이 시원하게 귓구멍을 훑고 날아갔다.
그러고 보니 먹는 양이 많이 늘기는 늘었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예전에도 성인 2~3인분 정도는 먹었다. 치킨으로 따진다면 혼자 한 마리 반에서 두 마리는 거뜬하게 먹었으니까. 근데 언제부터인가 식사량이 점점 늘어나더니 최근엔 폭증했다.
“내가 많이 먹는다고 타박하려는 게 아니야. 먹을 수 있지. 그래, 배고프다는 데 누가 말려? 깨양이라는 여자 뉴투버도 한 끼에 한 10인분씩 먹더라,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먹으면 좆 되는 거 알지? 3명이 일본 찍고 캐나다 가는 거랑. 30명이 일본 찍고 캐나다 가는 거랑 보급이 달라요. 보급이 달라. 근데 진짜 무서운 건 뭔지 알아? 너랑 저 여자랑 먹는 걸 보면 내가 몇 명분을 준비해야 할지 감이 안 와. 감이.”
“······.”
“방금 먹은 것처럼 둘이서 먹어대면, 요트에 있는 침실 들어내고 식량 챙겨야 할 판이야. 설마 세 끼 전부 지금처럼 먹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아니겠지?”
기순의 길고 긴 잔소리가 시작됐다. 마루는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다시 귀를 열었다. 기순이 떠드는 소리가 왼쪽 귀를 통해 들어왔다가, 오른쪽 귀를 통해 훨훨 날아갔다.
‘기순이 잔소리가 심하긴 하지.’
자기도 친구만 아니었으면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딱 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마찬가지로 기순도 마루가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런 소리를 하지 않았을 테니, 그런 마루와 이런 기순은 요런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말이야, 장거리 항해를 할 때는 최소 20% 정도는 여유분을 가지고 출발하는 게 좋단 말이지. 왜냐?···”
마루는 벌떡 일어나 버린 김 양이 좀 걸렸다. 마루가 처음 월드 축산에 입사했을 때도 김 양이 있었고, 월드 축산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 몇 년 전 글에도 김 양이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예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 사실이라면 김 양은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월드 축산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했다는 소리. 그럼 중학교는? 탈북민이 탈출하는 도중 잘못 걸리면 진짜 험한 삶을 산다던 뉴스가 떠올랐다.
쯧- 잘 먹고 이게 뭔.
“···그러니까 적재를 할 때··· 그런 것도 다 계산해서 해야 하지만, 최신 선박들은··· 그런 부분에서 좀 자유···.”
아- 졸리네. 마루는 기순의 말을 자장가 삼아 뜬눈으로 가수면 상태를 즐겼다.
======
======
카드키를 넣자 방 안이 환해졌다. 널찍하게 보이는 풍광.
김 양은 테이블에 앉아, 발터 P22를 뽑아 들었다.
탄창을 빼고 약실에 있는 탄환을 제거한 김 양이 발터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철컥- 탁- 철컥- 몇 번 소리가 나더니 프레임, 슬라이드, 리코일 스프링, 총열로 분해된 발터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분해 소지 도구를 꺼낸 김양이 총열부터 쑤시기 시작했다.
‘뭘 안다고 지랄이니.’
‘간나 새끼가.’
‘학교? 중국에서? 남한에서? 똥통에 밀어 처넣을 새끼.’
매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굶주림에는 장사 있을까? 길고 긴 굶주림에는 가족이고 나발이고 그냥 끝이었다.
옛말이라고? 옛일이라고? 그걸 겪은 자신은 무슨 고대 유물이라도 되는 건가? 굶어 본 사람은 안다. 그것도 돈이 없으면 돈이 없다고 굶고,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굶어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비참한지 안다.
더 비참한 건 나중에는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비참하다는 사실조차 잊는다는 것이다. 그저 먹을 것. 그것 하나가 진리이자 생명줄이 된다.
‘배가 불러 터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백정 놈 친구라서 뭔가 이상한 놈이겠거니 하긴 했었다. 백정이 정상인가? 그러니 그 옆에 있는 친구 놈도 정상은 아니겠지 했더니, 역시나 사람 속을 긁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놈이었다.
어느새 청소가 끝나고 조립까지 완료된 발터 P22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풀러 놨던 퉁퉁이 소음기를 장착하자, 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띠리리- 띠리리-
인터폰이 울렸다. 김 양은 탄창을 채워 넣고 인터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23층 2303호실 김 양 손님 맞으십니까?]“예. 맞는데요?”
[저희 사장님께서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으시다고,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김 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디 사장이요?”
[호텔 샬롯. 심은영 사장님이십니다.]회사에서 들었던 이름. 30대 초반, 여성. 친형제들과 이복형제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샬롯 그룹에서도 알토란 같은 호텔과 건설, 2분야를 거머쥔 대단한 여자였다.
회사 자료에서 본, 제거 리스트에서 무려 2순위. 어째서 그렇게 높은 순위를 갖게 됐는지 김 양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순위만 보더라도 거물 가운데 거물이었다.
‘거절하면 지랄 나겠지?’
이쪽엔 백정이 있었으니, 백정과 자신이 힘을 합치면, 저쪽이 뭘 하든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백정이 시원하게 칼질해서 싹 죽여버리면 모르겠는데, 호텔이라 민간인들이 많았다. 저쪽에서 백정의 민간인 어버리를 눈치채고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다거나 고기 방패로 사용해서 백정을 흔들면?
꼼짝 못 하는 직원을 앞에 두고 얼타고 있던 마루를 생각하니, 혈압이 춤추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민간인이라고 못 썰고 어버리- 타다가 뒈지겠지. 그리고 마지막엔 자기도 시밤 쾅 엔딩이었다.
‘종간나 새끼. 백정이면 백정답게 싹 썰어버리든가.’
애매한 백정에 딸린 잦 같은 친구 새끼까지, 셋이 탈출할 수 있을까? 김 양이 생각하기엔 힘들었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 했다.
“몇 시죠?”
[저녁 7시입니다.]“알겠어요. 아시죠, 전, 제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한다는 거. 몸수색이니 그럴 요량이면 초대 거절한다고 전해주세요.”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도 단 두 분이 식사하시자고 했습니다.]김 양의 가늘어진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건 또 뭐임? 대가리에 철판이라도 댔을까? 뻔히 자기 정보를 알면서 따로 둘이서만 밥을 먹자? 심지어 몸수색을 거부했으니, 이쪽이 무장하고 가겠다고 돌려 말했는데도? 배포가 큰 여자였다. 아니면···.
아- 몰라. 이런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일단 시간부터 끌고 보자.
“알겠어요.”
[초청장은 아래 넣어드리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편안히 쉬시길.]======
======
호텔 로비. 기순이 멍한 마루를 툭-쳤다.
“야. 시간 됐다. 배 보러 가자. 정신 차려 정신. 그렇게 처먹었으니 식곤증이 오지, 안 오고 배기냐?”
언제 잠들었지? 기순의 이야기를 듣다 깜박 잠들었나? 마루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안 졸았어.”
“존나. 안 졸긴. 눈만 뜨고 있으면 안 자는 거냐? 아- 좀. 졸리면 눈을 감고 자. 왜 눈을 히까닥 뜨고 그러는데, 진짜- 와. 씨발 깜짝 놀라서 욕도 못 하겠더라. 눈이라도 똑바로 뜨던지, 눈을 까뒤집고 우두커니 앉아서 뭐냐고.”
“알았어. 알았다고.”
“알긴. 가면서 옷도 좀 사고, 생필품은 미리 챙기고. 아- 그 여자 생필품은 알아서 챙겼겠지?”
마루가 김 양을 생각해봤다. 총 하나는 기깔라게 쐈지만, 나머지는 영.
“아닐 것 같은데.”
“아- 뭐야 그럼 그쪽 건 알아서 챙기라고 네가 말해.”
그러지 뭐. 하던 마루가 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저거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둬도 될까?
“그냥 우리 살 때 대충 구색만 갖춰서 사자.”
“아니 우리가 뭘 안다고 그 여자가 필요한 걸 사줘? 설마 쓰리 사이즈 알고 있는 사이냐?”
기순의 말에, 마루가 미쳤냐는? 표정을 지었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우!
대포폰이 몸을 떨었다. 김 양이었다.
[오늘 저녁 나 밥 약속 있음. 7시부터]흠. 밥 약속? 부산에서? 김 양이 알고 있던 인맥인가? 혹시 또 엮이는 건 아니겠지?
[엮이는 일?] [아직 모름]모른다. 모른다고?
마루는 허허- 웃음을 흘렸다.
모르면 엮일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이년을 어쩌나? 어째야 하나?
내일 출항인데. 흐흐흐.
엮이는지 아닌지 몰라?
그래? 그럼 늦게 들어오지 뭐. 그렇지 않아도 챙겨 와야 할 것도 있겠다.
[배 계약하러 가는 중. 많이 늦음] [ㅇㅇ]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