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400)
러스트 [RUST]-400
손목이 잘린 여자의 목에 구멍이 뚫렸다.
켁-켁-컥-
총탄이 경동맥을 찢고 지나간 충격에 새는 숨소리.
마치 손목이 잘리지 않은 것처럼 에리카의 목과 얼굴에 팔을 들이미는 여자.
치덕치덕 힘없는 손짓에 사방에 피가 튀었다.
꺄아아아아악!!!
발작하는 사이코메트리를 간호사가 밖으로 데려갔다.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경찰국 소속이라는 남자는 어느새 두 손을 들고 말했다.
그 말에 마루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랑 뜨거운 시간을 보냈고. 좁은 상자 속에서 민달팽이들처럼 농후하게 엉켜있었다고?
“민달팽이? 농후? 엉켜?”
김 양이 사내를 겨눈 채 물었다.
남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송 솟았다.
“오해입니다. 정말입니다.”
무슨 오해인지 모르겠지만, 가둬 놓고 볼 일이었다.
“진짜입니다.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닙니다. 모르는 여자라고요!”
꽁꽁 묶여 끌려가는 사내의 외침이 조금씩 작아졌다.
바닥에 떨어졌어도 볼펜을 꼭 쥐고 있는 손. 깨끗하게 잘린 여자의 팔을 한쪽으로 치운 PD가 입을 열었다.
“손이 부드럽군요.”
“움직임도 어설펐음.”
갑작스럽게 공격해서 그렇지, 전문가 느낌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사이코메트리를 죽일만한 동기가 있을까?
마루는 위화감을 느꼈다.
고작 정신계 능력자일 뿐이었다. 유력한 정치인도 아니고 거부도 아닌, 그저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그런데 목숨을 걸고 죽이려고 했다? 무엇 때문에? 제정신인가?
“능력이 능력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원한을 맺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감추고 싶은 정보를 까발리거나, 스파이 색출, 추적 같은 경우에 능력을 썼다면 복수하겠다는 사람이 나올 수 있지요.”
PD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직전까지 살기가 없다는 건 이상했다. 사이코메트리와 악수하는 순간 없었던 살기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후드의 반쪽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 거 같네요.”
다들 후드의 말에 동의했다.
국토안보국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저런 여자를 비행선에 태우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저런 여자가 비행선에 탔다는 건, 국토안보국에 문제가 생겼다고 봐야겠지.
“이상해. 바로 직전까지 살기가 없었어.”
마루의 중얼거림에 김 양이 반응했다.
“그거 사람 약으로 조종한다는 거.”
월드에서 약쟁이 때려잡을 때 들었던 이야기. 중국 애들이랑 일본 애들 음지에서 그런 약 쓴다고 했었다고. 조직끼리 항쟁할 때, 여자와 아이, 노인을 이용해서 상대방 머리 칠 때 그런 거 쓴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게 있으면 미국에도 있지 않을까?”
“약도 문제지만, 만에 하나 정신계 능력자가 능력을 쓴 것이라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PD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세뇌능력자라니. 텔레파시도 위험했는데 대놓고 세뇌능력이 있으면 피곤했다.
“정보부터 확인하죠.”
따로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던 뇌둥둥 박사를 쓸 때였다.
위이잉- 기계음과 뽀그르르르륵- 거품 소리가 요란했다.
마루를 보자마자 뽀글뽀글 맹렬하게 치솟는 거품.
높은 기계음을 내는 뇌둥둥 생체단말기에 붙은 모니터가 깜빡깜빡 난리가 났다.
“트리아와 만나게 해준다는 조건이 뭐였는지 까먹었습니까?”
예상대로 단순히 정보추출 변환 능력만 남은 게 아니었다. 자체적으로 연산, 사고 할 수 있는 기능이 살아있어야 저런 반응이 나올 테니까.
“솔직히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몇 년 푹 묵히려고 했는데 말이죠.”
몇 년을 묵히려고 했었다는 말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물방울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일부터 합시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정보추출과 정리는 뇌둥둥 박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쓸 수 있는 기능인지라 사용에 문제가 없었다.
마루는 팔 잘린 여자의 머리통에 정보추출장치를 박아 넣었다. 차갑게 식어가고 있던 여자의 시신이 전신을 배배꼬는 것과 동시에 정보가 뽑히기 시작했다.
뽀그르르르르-
모니터에 떠오른 자료를 보던 마루가 인상을 썼다. 영상 속에서는 학대에 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약과 정신적 학대를 통해 세뇌하는 방식에 PD가 눈살을 찌푸렸다.
“MK 울트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맞네요.”
후드의 단언에 마루가 물었다.
“그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해킹했었거든요. 저쪽 자료.”
MK 울트라 프로젝트(MK-ULTRA Project)는 단물이 다 빠진 소재였다.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던 소재.
그러나 진정한 어둠에 닿은 사람은 얼마 없었다. 제니아 로든이 후드를 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을 정도.
“···2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특수실험부대의 자료를 입수해 그것을 바탕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죠.”
“일본의 특수실험부대?”
“코드 네임 731부대. 그렇게 알려진 부대의 자료였어요.”
“예? 미국이 일본군의 생체실험부대의 자료를 사용했다고요?”
“네. 관련 프로젝트 이름에 MK 나오미(MK-NAOMI)를 붙였을 정도니까요.”
“······.”
PD가 추가로 덧붙였다.
“2001년 기밀을 해제했다고 하지만, 다들 믿지 않았습니다. 내용에 이가 빠진 부분이 많았거든요.”
영화나 소설에서는 세뇌를 통해 완벽한 인간병기를 만든다거나, 세뇌를 통해 암살자를 만드는 그런 극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건 일반인들에게 MK울트라 프로젝트는 세뇌 프로그램이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저도 세뇌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세뇌라는 강렬한 주제로 다른 향정신성 약물에 대한 광범위한 실험을 자연스럽게 은폐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을 흥분시켜 비논리적인 생각을 유도하는 약물, 신뢰감을 떨어뜨려 평판을 낮추는 약품. 특정 질병의 징후를 일으켜 가역적으로 실제 질병을 유도하는 물질, 급속으로 장애를 유발하는 성분. 의존성을 강화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도록 하는 약물 등 다양한 실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실험들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정보만 남았습니다.”
동성애자가 폭증하는 이유에 대해 MK 울트라 프로젝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라 주장하는 음모론자가 있을 정도.
“동성애 촉발 물질도 있었으니 어쩔 수 없죠. 단순한 세뇌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이나 생각을 화학물질이나 약품, 특정한 영상이나 정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이용해 성격변화 유도를 연구했었다고 알려졌으니까요.”
“······.”
특정 약품이나 물질에서, 비물질적인 영상이나 정보를 이용한 방법까지 연구했다는 소리. 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MK 나오미는 미생물, 세균, 기생충을 이용한 프로젝트였고요.”
마루는 미국의 어둠을 엿본 것 같았다. 바이러스 사태 초기 여러 음모론이 미국에서 횡행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일까?
대답 대신 마루는 조용히 영상을 지켜봤다.
뇌둥둥 단말기로 추출한 정보에는 한 사람의 인격이 지워지고, 새로 조립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사이코메트리를 죽이려고 했던 암살자의 정체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가 선 특수요원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을 뿐.
“더 볼 필요 없겠네요.”
동영상 재생이 멈췄다. 기분이 더러웠기에 오히려 냉정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함정이네.’
꼬아 놓은 함정이었다. 사이코메트리를 죽여도 좋고 실패해도 좋다. 자신들이 국토안보국 비행선에 암살자를 태울 수 있다는 걸 과시하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
“이런 놈들이라면···. 국장도 방법이 없었겠군요.”
“상대방은 윤리, 도덕, 명분 신경 쓰지 않고 있는데 덴 브라운 국장은 그럴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마루와 김 양을 부르는 데 성공한다면, 일을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지.
‘놈들은 덴 브라운 국장의 행동을 알고 있었고.’
이건 국토안보국 요원 가운데 세뇌된 자들이 있거나, 최소한 그쪽에 붙은 자가 있다는 의미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함정인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해요.”
PD와 후드도 마루와 같은 결론을 냈다.
“놈들은 사이코메트리를 데리고 뉴욕으로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루가 도우러 오지 않아도 좋았다. 그걸 핑계로 국토안보국의 위기에도 도우러 오지 않는 블라디마루 칼린이라는 이미지를 씌울 테니까.
돕겠다고 온다면? 세뇌한 일반인들을 간간이 밀어 넣으면서 간을 보겠지. 되겠다 싶으면 포획해서 세뇌하려고 들 테고.
“이런 능력이 있다면 왜 처음부터 쓰지 않았을까요? 사태 직후에 바로 뉴욕을 장악하면 됐을 텐데.”
“그때는 식인귀들이 있었으니까요.”
식인귀도 세뇌하려고 해봤을 거다. 안 통하는 걸 알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테고.
“식인귀를 잡는 것까지는 조용히 동참했을 겁니다. 세뇌 불가능한 식인귀들을 뿌리 뽑고 나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겠죠. 그러다 이상기후로 여기저기 고립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세력을 확장하는데 최고의 조건이었겠군요.”
마루는 생각에 잠겼다.
뉴욕에 갔을 때와 가지 않았을 때.
뉴욕에 간다면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해야 했지만 확실한 건. 국토안보국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고 봐야 했다. 세뇌된 자들의 자폭 공격에 시달리면서 괴물 쥐떼의 공격까지 막아야겠지. 그걸 막고 정상화를 한다고 해도, 뒷말이 나올 게 뻔했다.
“놈들에게 뉴욕을 넘겨주실 생각입니까?”
“제 뉴욕도 아닌데 넘기고 말고 할 게 없죠.”
놈들이 능력이 좋아서 뉴욕을 장악한 건데, 이래라저래라 할 건 아니지 않은가?
“동부를 장악한 뒤에는 디트로이트를 노릴 수 있습니다.”
“핵으로 평등사회 이룩하고 싶으면 그러라고 하지요. 뭐.”
핵을 왜 챙겼겠는가? 핵을 슬쩍 보여주면 알아서 피해갈 것이다. 세뇌까지 해가면서 권력을 잡으려는 놈들인데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핵 죽창으로 평등해지자는 걸 좋아할까?
김 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놈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는데, 괴물 쥐떼를 막지 못하면 뉴욕은 끝장이 날 겁니다. 국토안보국을 견제하면서 자기들 세력 넓히겠다고 쥐떼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글쎄요···.”
먹이만 있으면 무한히 증식이 가능한 게 쥐였다. 쥐 한 쌍에서 시작해 일 년이면 1천 마리 넘게 불어나는 것도 가능한 괴이한 번식력.
여차하면 자기들끼리 잡아먹기도 하는 데다, 계급사회까지 만드는 놈들인데 그게 변이까지 됐다. 근데 그걸 먼저 잡지 않고 권력 투쟁에 이용하고 있다고?
뉴욕에 있는 쥐새끼 수는 대략 250만 마리에서 300만 마리를 추산하고 있었다. 그게 변이를 일으키고 서로 잡아먹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해도 120만에서 150만 마리.
뉴욕 시민이 900만이라 인당 한 마리씩만 잡아도 승리인데. 지금처럼 고립된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쥐새끼들이 900만을 먹어대고 번식하면?
“우리는 뉴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추락한 비행선에 실린 물자를 회수하고, 비행선을 가져오는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덴 브라운 국장은 포기하시렵니까?”
“포기하고 말고 할 게 아니지요. 그 양반이 쉽게 당할 사람입니까? 그리고 놈들이 뻔하게 노리고 있는 걸 알면서 제 발로 기어들어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도움 요청한 적도 없고요.”
비행선은 추락했고, 비행선 승무원들은 전원 쥐똥이 됐다. 그러니 지금까지 생각한 건 전부 예상일 뿐.
냉정하게 사실만 따지자면 국토안보국 소속 비행선이 추락했고, 생존자는 2명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1명이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를 암살하러 온 암살자였다는 이야기.
찝찝한 건 암살자가 세뇌당한 일반인이었다는 건데. 그것만 넘기면 그만. 누구를 버리니 마니 할 것도 없고, 뉴욕의 운명이 달렸니 말았니 할 것도 없었다.
그런 마루의 말에 김 양이 격하게 동의했다.
잘한다. 우리 백정. 그렇지 추운데 뉴욕까지 기어가서 고생할 필요 없지. 암. 이게 다 핵이 있어서 할 수 있는 주체적인 대응이었다. 응.
“세뇌됐을 수도 있으니까 생존자는 일단 독방에 가둡니다. 그리고 뇌둥둥 박사는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죠.”
뽀그르르르-
뽀그르르르-
약속과 다르지 않냐는 듯 거품이 올라왔지만, 마루의 눈빛은 차가웠다.
“단순한 기계인 것처럼 속이다가 걸려 놓고 한 건 했다고 뻗대지 맙시다. 트리아와 약속을 해서 그냥 두는 거니까. 그냥 조용히 구석에서 반성하고 있어요. 알겠습니까?”
(······.)
뽀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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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 브라운 국장이 고함량 카페인 음료를 거칠게 들이켰다. 아무리 에너지 음료를 마셔도 정신이 빠릿빠릿해지지 않았다.
‘어떤 놈들이지?’
식인귀들을 정리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분배하면서 조금씩 갈등이 생긴 뒤로, 미세한 균열이 커지기 시작했다.
연방수사국과 함께 대규모 실종 사건이 벌어진 구역에서 괴물 쥐떼와 마주쳤다. 큰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200~300마리는 될 법한 쥐떼가 빌라를 덮치고 있었다.
눈 때문에 추가 지원은 불가능한 상황. 국토안보국과 연방수사국 요원들은 처절한 사투 끝에 쥐떼를 물리쳤지만, 일반인 생존자는 없었다.
당장 중요한 건 쥐떼를 잡는 일이라고,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쥐떼를 잡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문제만 더 커질 뿐이었다.
‘전멸한 추격대. 지휘는 누가 했었나?’
‘전멸해 놓고 또 총력을 다하자고? 지휘는 어디서 하고?’
‘국토안보국이 불안을 확산시켜 권력을 독점하려고 한다.’
‘견제와 균형에서 벗어난 국토안보국의 행보를 규탄한다.’
‘엑소슈트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국토안보국. 저의는 무엇인가?’
‘군부와 결탁한 국토안보국. 외곽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 사령관 길버트 브라운과 국토안보국 국장 덴 브라운은 친척 관계.’
별의별 소리가 사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몇몇 요원들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이상해졌다. 함정으로 파둔 비밀자료실에 접근한 요원들이 생긴 것.
[국장님. 세뇌가 맞습니다.]“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