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455)
러스트 [RUST]-455
무미건조한 덴 브라운 총통의 표정과 대비되듯 흑과 백으로 뚜렷하게 나뉜 후드의 표정은 생동감 넘쳤다. 비록 하얀 반쪽만 그랬지만.
“저희는 국경을 확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외교적 수사 따윈 없는 직설적 화법에 덴 브라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교관으로는 빵점이지만, 시간 낭비를 줄여준 것은 만점이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떨까?
처음 시작부터 이렇게 말한다면?
덴 브라운은 신성 아크 왕국의 전권대사로 온 여자의 반응을 기대하며 입을 뗐다.
“아메리카 대륙 전부 제국의 영토입니다.”
“······.”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지?
후드는 순간 당황했다. 하얀 반쪽 얼굴이 창백하게 변할 지경.
이게 그 덴 브라운이라고?
그냥 어딘가 세기말 패왕이잖아.
아메리카 대륙 전부가 제국의 영토?
북미 남미 할 거 없이 전부?
총통이 되더니 미쳤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덴 브라운 총통을 바라봤다.
터무니없는 말을 해놓고는 당연하다는 듯 표정변화 없는 모습.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가?
미친 게 아니라 제정신으로 말한 것이라면, 지금 한 말은 향후 제국의 행보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전부가 제국 영토라는 선언. 그러니까 싸우자는 소리였다.
덴 브라운과 블라디마루 칼린 사이에는 그간 쌓인 신뢰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이딴 소리를 듣다니.
“죽···. 아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국경협상은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반쪽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과는 달리, 할 말은 하는 후드였다.
이번에는 덴 브라운이 황당했다.
전권대사고 외교관이면 강한 발언에 뭔가 대응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한 말이 무슨 의미냐?
어째서 전부 제국의 땅이냐?
왕국과 척을 지겠다는 거냐?
전권대사라면 항의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물고 늘어지는 것도 할법했다. 그런데 그냥 ‘알겠습니다.’하고 끝이라고?
덴 브라운은 다시 한 번 찔러봤다.
“이지스 구축함 2척이라면, 세인트로렌스 강을 임시 경계로 해줄 수 있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덴 브라운의 미간에 미미하게 주름이 잡혔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계 조건이 무엇인지 조율하려고도 하지 않다니.
시간을 아꼈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이건, 그래.
이 여자는 전권대사가 아니라 폭탄이었다.
덴 브라운 총통은 미리 확인한 파일을 떠올렸다.
전권대사.
블라디마루 칼린 측에서 사용하는 코드네임은 후드.
본명. 제니아 로든, 해커.
전신화상. 안면 인식 불가능할 정도의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성격적, 정신적 결함이 있을 것으로 추정···. 등의 자료는 일단 폐기.
당장 안면 화상이니 전신화상이니 하는 정보도 맞지 않고 있었다. 얼굴은 깔끔하게 세로 화상이었고 두 손도 화상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이었다.
‘해커고 성격적 결함이 있다고 해서 여러모로 반응을 살폈는데.’
그게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파고드는 것도 없었고 반발도 없다니.
살짝 주름졌던 덴 브라운의 얼굴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밋밋하게 변했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후드를 향한 나지막한 목소리.
“전권대사라고 하더니 전권이 없었는가?”
“아니요. 가이드라인(guideline) 밖의 이야기인지라, 제 권한으로는 따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럼 무엇에 대한 전권일까?
후드의 대답 속에 무언가 의미가 있다 생각한 덴 브라운이었다.
“좋습니다. 왕국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제국에 이익이 되는 건 무엇입니까?”
“향후 제국이 왕국을 제외한 지역을 장악할 경우, 왕국은 전쟁 없이 제국에 편입되는 조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면 왕국을 제외한 전 아메리카 대륙을 통일하는 것이 되겠군요.”
무심했던 덴 브라운에게 다시 표정이랄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무슨.’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언급한 자신의 발언도 실책이지만, 왕국을 그냥 넘기겠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블라디마루 칼린.
권력이 필요 없다는 건가?
그럼 왜 독립 왕국을 선언한 거지?
미친 건가?
서로서로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대담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신성 아크 왕국은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통일할 때까지만 유지하겠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권대사로 온 여자가 예상보다 이상하다는 것을 빼면,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덴 브라운은 생각했다.
어차피 그쪽 동네는 블라디마루 칼린이 재건하도록 뒀었다. 왕국을 선포했다고 한들 굳이 건드릴 필요 없었고.
칼잡이가 왕이 됐으니 현장에서 뛰는 건 어렵겠지만, 그건 디트로이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을 때도 그랬다.
이제 각자 제국을 다스리는 총통과 일국을 지배하는 왕이 됐으니, 관계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왕국은 제국과의 동맹을 원합니까?”
“조건과 약속은 하나,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통일하면 전쟁 없이 평화를 완성한다.’ 이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아쉬우면 먼저 동맹 이야기를 꺼내라. 왕국은 아쉬울 것 없다.
가만히 있는 작은 왕국을 건드려서 적을 만들거나 아니면 좋게 영토 문제 해결하고 통일한 뒤 챙겨가거나. 그것부터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동맹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데 일치한 두 사람은 바로 국경 문제를 살폈다.
“좋습니다. 지도를 봅시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국경을 정하고, 강의 북부를 왕국 영토로 하는 지도입니다.”
세인트로렌스 강 북부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퀘벡, 몬트리올, 오타와, 토론토 같은 캐나다 주요 도시를 전부 흡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캐나다의 대도시를 전부 왕국의 영역으로 하겠다는 겁니까?”
“네.”
왕국에 편입되는 인구만 하더라도 1천만이 넘었다. 혹한과 감염자 웨이브, 혹한과 식인귀 창궐을 고려해도 최소 300만, 많게 잡으면 400만 이상 남았을 것.
미시간주의 인구는 대략 1천만, 이쪽도 300~400만은 남았을 터. 합하면 600~800만 인구라고 잡아야 했다.
‘거의 같은 규모의 인구를 편입하겠다?’
글쎄. 그게 쉬운 일일까?
캐나다가 영어를 쓴다고 영어권이 강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기실 경제력 부분은 프랑스어권 도시들도 만만치 않았다.
캐나다 연방 정부가 무너져 왕국 영토 편입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세인트로렌스 강을 낀 도시들이 순순히 왕국에 편입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계산을 마친 덴 브라운이 깔끔하게 국경선을 인정했다. 서로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문제 될 게 없는 사이였다.
“그럼 왕국은 현재 영토에서 더 확장할 생각이 없다는 겁니까?”
“···제국과의 국경 지역이 정해졌을 뿐. 왕국 서부나 남부로의 진출은 왕국 고유의 권한입니다.”
덴 브라운이 생각하기에도 왕국이 방어선을 만들려고 한다면 최소한 오대호와 인근 지역은 확실하게 장악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제국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오대호에 장난치는 놈들이 생긴다면 제국의 수자원에도 문제가 생기는 거였으니까.
“좋습니다. 왕국이 제국의 확장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중북부나 중서부를 왕국이 장악한다면 제국은 그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이지스 구축함에 관해서 이야기합시다.”
“이지스함 1척에 잠수함 3척, 2척은 신형으로 교환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셨습니다.”
“현재 제국에서 중요한 도시는 뉴욕과 보스턴입니다.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이지스함이 2척 필요합니다.”
“이지스함 1척에 잠수함 3척. 3척 가운데 2척은 신형으로 교환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제가 받은 기준입니다.”
덴 브라운의 담담했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게 전권대사?
미친 새끼들 협상이 아니라 가이드라인 박아 넣고 자기들이 결정해 놓은 대로 하거나 말거나 그러고 있었다.
“제국은 이지스함을 건조하고 있습니다. 빠르면 1년, 늦어도 1년 6개월 뒤에는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2년 뒤에 제국에서 새로 건조한 이지스함을 팔 테니, 지금은 이지스함 2척에 잠수함 4척, 2척 신형으로 거래합시다.”
“이지스함 1척과 교환하는 잠수함 3척 가운데 2척은 신형으로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왕국은 내륙이지 않습니까? 이지스함이 2척이나 필요할 이유가 있습니까? 디트로이트를 지키는 것이라면 1척도 충분할 텐데.”
덴 브라운의 말에 후드가 진지하게 답했다.
“디트로이트가 미사일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공격했는지 찾았습니까?”
후드는 정보 일부를 공개했다. 피츠버그 지배능력자 연구소 파괴, 시애틀 식인귀 여왕과 귀족(블러드 서커) 실증 실험 박살, 윌밍턴 귀족 연구소 공격까지.
덴 브라운은 블라디마루 칼린이 돌아다니며 파괴한 기록을 보며 헛웃음 지었다. 저기에 더해 그쪽에서 서부 LA, 샌프란시스코와 동부 뉴욕에서 작업하던 것도 훼방 놨으니 저쪽에서는 블라디마루 칼린이라면 이를 갈 듯싶었다.
‘식인귀의 단점을 극복한 귀족이라.’
덴 브라운 총통의 눈동자가 후드가 남기고 간 파일을 향했다.
역시 버지니아 랭리 놈들이었다. 제국을 선포하고 싹 갈아치우지 않았다면 저쪽에 넘어가 허우적거리는 것들로 넘쳤을 게 분명했다.
‘이 정보대로라면 아무리 막아도 저쪽으로 넘어가는 놈들이 나올 수밖에 없어.’
제국이 유지되기 위해서라면 향후 허리를 맡은 자들이 충성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했다.
“빌어먹을 남부 놈들. 버지니아 랭리와 군부가 저딴 실험을 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는 거지?”
텍사스를 중심으로 한 남부는, 사태 초기에 감염자와 식인귀를 싹 쓸었었다. 그랬던 놈들이 귀족이니 완벽한 신인류니 그런 것에는 찍소리하지 않고 있었다.
식인귀의 단점을 극복했다고 해도 결국 흡혈귀 짝퉁 아니던가? 어쨌든 제국도 짝퉁 흡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대비해야 했다.
단순히 막는 걸 넘어서 눈에 보이는 이익이 있어야 했다.
“능력자 연구는 어떻게 됐나?”
[예. 인공 발현 비율을 10%대까지 끌어올렸습니다.]“최대한 빨리 연구를 진행해. 최소한 50% 확률로 성공해야 한다.”
능력 각성 연구.
제국의 근간이 될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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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블라디 아크 타워.
후드는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초소형 카메라로 찍은 회담 영상이 떠올랐다.
후드의 대응에 PD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외교라고 해야 할까? 방송 PD라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있던지라 외교 쪽이 얼마나 피 말리는 현장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인재를 찾아야 해.’
왕국에는 인재가 부족했다. 설령 인재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신뢰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블라디 아크 타운과 HOLLY 교도 가운데 행정이나 경제 전문가를 뽑아 굴리고 있었지만, 지금 같이 중요 회의에 참석시킬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외교라고 해봐야 제국과 소통하는 것이겠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대응할 만한 인재를 찾기 어려웠다.
PD의 걱정스러운 기색을 모르는지, 마루는 후드를 크게 칭찬했다.
“수고했어. 아주 잘했어.”
“아-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참상이라고 생각한 협상에 대해 마루는 대성공이라고 판단했다. 외교적인 문맥을 만들었어야 했니, 향후 지속적인 교류 협력과 미래 이익이니,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당장 원하는 걸 얻었으면 성공 아니던가?
“그리고 제국에서 확보한 정보입니다.”
마루가 후드를 협상대표로 보낸 이유. 뽑아올 수 있는 건 뽑아오라는 뜻이었다. 후드는 마루의 생각대로 정보를 챙겨왔다.
[U+ 프로그램 2] [인공 각성 프로그램] [동물 통제 프로그램] [제국군 편제]···
···
자세한 내용은 폐쇄서버에 들어있어 확인하지 못했지만, 제국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의 목록과 내용을 알 수 있었다.
“U+ 프로그램은 연구소 날아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들었습니다.”
“예.”
국토안보국 비밀 실험실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백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하긴 회춘이라는 큰 덩어리를 한 곳에만 모아두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지금 무럭무럭 똥을 생산하는 유 이사 마크Ⅱ와 능력자 뱃속에서 크고 있는 마크Ⅲ에 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데도 U+ 프로그램을 떡하니 제일 먼저 올려놨다. 내용은 볼 수 없고? 마루는 피식 웃었다.
“U+ 프로그램이 아직 진행 중이라고 보라고 올린 겁니다. 제국은 회춘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걸 알리는 거죠.”
식인귀나 흡혈귀 따위 유혹에 넘어갈 거냐? 이쪽은 회춘인데? 이렇게. 아마도 주력은 능력 각성 연구일 터.
“시민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귀족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유혹이나, 능력자로 만들어주겠다는 유혹을 견디기 힘든 자들이 생길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신성 아크 왕국은 믿음을 중요시했다.
믿음과 신앙으로 유혹을 물리치는 왕국. 신성 왕국이 아니었다면 유혹에 빠져 나라의 기틀이 무너졌을 것이다.
PD의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왕국도 대응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강력한 연구 능력이 있는 인재가 필요합니다.”
침을 살짝 삼킨 PD가 어렵게 입을 뗐다.
“약혼녀께서 제약 관련해 천재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디 왕국을 위해 그분을 모셔오는 것은 어떠신지요.”
PD가 폭탄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