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23)
러스트 [RUST]-523
기순은 말이 없었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을 뿐.
“······.”
“어이 브로. 제정신이냐?”
이클립스를 좌중단으로 살짝 기울인 마루가 살며시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그 움직임에 기순의 머리에 달린 촉수들이 휘리리릭- 꿈틀거리며 위협하는 모습.
“거기 ㅈ-같은 촉수 좀 치워봐. 얘기 좀 하자.”
“······.”
마치 기순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것처럼 흔들리는 촉수들. 영상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탁-탁-
기분이 나쁘다는 듯 바닥을 내리치는 기다란 촉수 몇 가닥을 시작으로, 중간중간 용수철처럼 빙글빙글 꼬인 촉수까지 아주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야- 그거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냐?”
“······.”
기순의 침묵에 마루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위로 올라갔다.
‘촉수가 지랄이라면 촉수부터 치워야지.’
마루가 마음먹은 것과 동시에, 분위기 변화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촉수들이 먼저 반응했다. 스프링처럼 몸체를 꼬았던 촉수가 쏘아졌다.
추아아악-
미간을 노린 날카로운 공격을 이클립스로 톡 밀어친 마루가 한 걸음 내디뎠다. 단숨에 12m 이상을 압축해버린 발걸음에 촉수들이 반응했다.
인간이라면 반응하지 못했을 움직임에 촉수들이 그대로 반격하려는 찰나, 마루가 살기를 뿌렸다. 검붉은 살기가 흘러내리는 숯불처럼 주변을 잠식했다.
공간 자체가 일그러져 토막 날 것 같은 압박.
살아있는 게 무엇이든 죽어버릴 것만 같은 살기.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끔찍한 무엇에 마루를 향해 휘둘러지던 촉수들이 움찔- 잠시 굳어버렸다. 그 미약한 멈칫거림은 마루의 칼날이 기순의 이마에 닿기 충분한 틈이었다.
!이클립스의 날이 면도칼처럼 기순의 두피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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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서걱 대파 썰리는 소리와 함께 기순의 머리통 중앙에 2차선 도로가 생겼다. 팔팔하게 흔들리던 촉수들이 잘린 머리카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촉수들이 가스버너 위에 떨어진 오징어처럼 오그라드는 모습. 거기까지가 눈 한 번 깜빡할 정도의 시간.
수평으로 휘둘러진 마루의 칼날이 제비처럼 방향을 전환했다. 검은색 꼬리를 달고 있는 혜성처럼 움직인 이클립스가 이번에는 양옆 머리를 노리자.
휘리리리릭-
양쪽 옆머리에 붙은 촉수들이 기순의 머리통에 헬멧처럼 달라붙었다.
쯧-
이대로 썬다면 촉수랑 같이 기순의 머리통도 같이 썰릴 판.
촉수들의 영악한 움직임에 마루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정신 좀 차려라- 새끼야.’
마루는 그대로 이클립스를 휘둘렀다.
!!!!
기순의 머리를 감싼 촉수들이 당황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칼날이 뭉친 촉수를 절단하기 직전, 마루가 손목을 살짝 틀었다.
떠어어어업!
절단되는 소리 대신 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붕 떠올랐다 떨어진 기순이가 축 늘어졌다.
이참에 삭발(?)해버릴 요량으로 널브러진 기순의 머리통을 향해 다가서자, 기순의 뒤통수에 붙은 촉수가 반격을 시작했다.
취릭!
질컥!
발목을 노린 촉수를 쳐내는 순간, 물컹한 느낌. 반투명한 국물이 촉수 끝에서 찍 튀었다.
“개- 씹-”
마루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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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군은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W+ 실험체에 눈이 돌아갔다.
“우회해서 들어가.”
“저격조! 뭘 기다려? 다리라도 쏴!”
“몰아! 몰라고!”
유 이사 마크 2는 필사적으로 추격하는 제국군을 보곤 김 양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쪽은 어때? 아직 멀었어?] [···상황이 좀 지저분해지는 것 같아.]김 양이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순의 머리에 기생하고 있는 따개비 거기를 썰고 있는데, 걔들이 썰리면서 여기저기 국물을 뿌리고 있다고 말하기는 좀 곤란했다.
[언제까지 돌아야 하는데?]어그로를 끄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죽이지 않고 가기가 쉽지 않았다. 거시기를 자르든, 머시기를 뽑든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할 문제 아니던가?
제국군 죽이지 말라면서? 그래놓고 이렇게 시간 걸리면 어쩌란 말인가? 유 이사 마크 2가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기며 말했다.
[제국 애들 저격병까지 동원했어. 이대로 가면 잡힌다고.] [저격병은 이쪽에서 처리하겠음.]수풀을 헤집으며 수색하던 제국군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포위망이 뚫렸다고 합니다!”
“촉수 괴물과 블라디마루 칼린으로 보이는 인물이 교전 중!”
“블라디마루 칼린이 직접 왔다는 건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W+ 실험체를 포기할 순 없다. 남부 놈들에게 실험체가 넘어가면 클론 기술이 위험해져. 반드시 포획한다.”
“옛!”
“저격병! 놓칠 것 같으면 사살하라!”
까마귀 정찰대가 그대로 찍어 올린 영상을 본 김 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부군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음?] [그쪽도 날 못 잡아서 안달인데? 꼭 그쪽으로 가야겠냐?] [지금 제국군이 포획 어려우면 사살로 방향을 틀었음.] [···위치 올려봐.]김 양이 바로 정보를 보냈다.
[지도에 노랗게 칠해진 곳이 중계기 박아서 통신 가능한 지역이고, 붉은색이 제국군, 파란색이 남부군.] [O.K. 남부군 쪽으로 유인하지. 촉수 괴인이나 빨리 해결해. 해결 못 하면 꼬이는 수가 있으니까.]재수 없게 꼬이면 그냥 빠질 생각인 유 이사 마크 2였다. 제국군과 남부군을 피해서 도망치다 보니 꼬였다고 하면 어쩔 건가?
여러모로 두근거리는 기분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게 좀 그렇지만, 도망쳐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복귀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마루를 만나고 난 뒤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무엇이든 해야 풀릴 것 같은 기분인지라 호쾌하게 미끼 역할을 자처하긴 했는데, 계속 미끼질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한 건 제대로 하고 싶은데.’
어쩐지 의욕적인 유 이사 마크 2였다.
그런 적극적인 행동을 본 김 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루를 보고 뭔가 기억이 되살아났나? 그럼 원수나 경쟁자처럼 봤을 텐데,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흐응-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뭔가 나대는 것 같기도 하고. 저번에 간호사 년도 그러더니 반반후드 년도 그렇고 요즘 계속 걸리는 기분이랄까.
연구진들과 마루 말로는 버지니아 놈들이 설치한 정신파 테러 장치 영향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마루와 함께 서울에서 탈출했을 때부터 비슷한 감정은 간간이 느꼈던 그녀였다. 두근두근하고 막 간장이 쫄리는 느낌 같은 거 한 번씩 그랬었다.
당시에는 그게 일종의 공포인 줄 알았는데, 같은 편에게 공포를 느낄 일이 무에 있겠는가?
그런데 그게 공포가 아니라면? 두려움 느낀 게 아니라면? 당시에 느낀 건 뭐였지?
그게 문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정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막 신기한 감정. ‘저 새끼가 진짜 인간 새끼일까?’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콕 집어서 ‘느낌이 뭐다.’라고 하긴 어렵지만, 하나 확실한 건. 언젠가부터 다른 년들이 백정을 힐끗거리는 게, 거슬리기 시작했다는 거.
백정은 나랑 같이 오래 있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마크 2 같이 똥 기저귀 년도 몸뚱이 갈아타고 나더니 바로 힐끗거리고 있었다. 귓불 빨갛게 변해서 할딱거리는 모습이란.
김 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
‘저격수가 어디에 있을까?’
일단 제국군 저격수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기순이 놈. 촉수로 지랄할 건 뭐란 말인가?
‘오진 그룹, 나 주연이라면 제약 특기인데.’
그러고 보니 나주연이 만든 따개비 제거제로 한국의 수출입 루트가 유지됐었다. 따개비가 창궐했다면 수출입은 불가능했을 것.
수출입 가능했다는 말은 반대로 따개비가 창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끔찍할 정도로 번식하는 따개비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
나주연의 제약 능력이라면 기순의 머리에 붙은 따개비도 어떡하든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기순이의 머리통에 따개비가 붙어 지금까지 저-지랄하고 있다는 건.
‘치료제를 만들지 않았거나, 저걸 써먹으려고 어떻게 했다는 건가?’
김 양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약혼녀가 어쩌고, 정말 사랑했다느니 저쩌고 가지가지 하더니.
‘뒈졌네. 그년.’
기순이를 작업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년은 뒈진 목숨이었다.
흐응- 흥- 흥-
그년이 뒈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쾌해지는 이유가 뭐지?
김 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를 일이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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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이 쏜 총알이 엎어진 기순의 종아리를 때렸다.
팅!
7.62mm 총탄이 종아리를 뚫지 못하고 튕기는 모습은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깜짝 놀란 김 양이 중얼거렸다.
[저거 기순이 맞음? 얼굴 생긴 건 기순인데. 클론. 생물병기 뭐 그런 거 아님?]마루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12.7mm를 쓰면 종아리가 날아갈 것 같아서 7.62mm로 위험한 곳 피해서 쐈더니 튕겨버렸다.
마지막에 봤을 때는 분명히 일반적인 사람이었고, 예전에 위성통화를 했을 때는 촉수 때문에 레게 머리를 하게 됐다는 이야기까진 했었다. 근데 방탄 종아리라니···.
종아리가 방탄이라는 소리는 몸뚱이도 방탄이라는 소리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위화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느낌으로는 기순이 같은 이상한 감각. ‘기순이의 얼굴을 한 생체병기가 아니냐?’는 김 양의 물음에 마루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반응은? 전혀 없어?] [반응 없음. 의식을 잃은 게 맞음.]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니었다.
‘총알도 튕겨내는 걸 어떻게 기절시켰지?’
위대한 영도자의 자질이 아니었다. 마루는 이미 위대한 영도자였다. 김 양은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기순이는 의식이 없는데, 촉수가 팔팔하니까. 좀 이상함.]김 양이 이야기를 돌렸다.
[확인해봐야지. 뭐가 문제인지. 그쪽은 어떻게 됐어?] [마크 2가 제국군을 남부군 쪽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음.] [클론은 전부 다 동원했고?] [3개체 전부 동원했음. 양쪽 모두 클론 잡으려고 눈이 뒤집혀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음.] [얼마나 버틸 것 같은데?] [기저귀가 지금 당장 빠져야 한다고 징징댐.]징징대는 걸 보면 여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속닥이는 김 양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해. 3분 아니, 넉넉하게 5분만 유인하고 빠지라고 해.] [알겠음.]취리리리릭-
빌어먹을 촉수가 더럽게 휘둘러졌다.
이클립스도 어쩐지 닿기 싫어하는 느낌인지라, 쳐내기도 뭐했다.
저번 산성 타액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기에 마루는 그냥 비켜섰다.
찝찝한 촉수를 피하자, 마루를 스쳐 쏘아진 촉수가, 뒤편에 있던 나무에 꽂혔다.
찔꺽-찍-
[······.]나무에 박힌 촉수 대가리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이 씹- 뭔-
마루의 눈가에 짜증이 감돌았다. 가까이 접근하자니, 정말 뭐 같이 더러웠다.
‘미안하다. 후딱 끝내자.’
여기저기 검붉은 딱지가 붙은 이클립스에게 속으로 사과한 마루가 12.7mm Rsh-12 리볼버를 꺼내 이클립스의 옆면을 쐈다.
묵직한 충격이 이클립스를 통해 진동으로 변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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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칼에서 피어오른 초진동.
푸화아아아악!
사방에서 덮친 촉수들이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복합장갑에 비견될 정도로 단단하고 질긴 촉수라고 하더라도 한 번이면 끝이었다.
[그냥 아주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버리겠어!]촉수 붙은 머리 가죽 싹 벗겨버리고 치료제 뿌리면 되겠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촉수들이 기순의 몸을 불룩 떠받들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치 기순의 몸통에 곤충 다리가 돋은 것 같았다.
‘놓칠까 보냐?’
살기를 최대한 끌어 올린 마루가 휙 뛰어올라 기순의 몸통을 발로 밟았다.
콱!
쭈뼛쭈뼛 굳어가면서도 사방으로 반투명한 국물을 짜내기 시작하는 촉수들. 더럽다고 발을 떼면 그 틈을 노려 도망치려고 하는 짓거리.
“이런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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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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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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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드득-
잘게 토막 난 촉수들이 회백색 국물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콱-
마루는 세상모르고 축 늘어진 기순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과일 깎듯 돌려 깎기 시작했다. 머리뼈까지 얇게 썰린 기순의 머리통은 마치 비트 껍질 벗겨 놓은 듯했다.
치이이이익-
분홍색 급속치료제를 뿌리자, 미친 듯이 반응하는 약제.
끄으으으-
두피가 재생되는 통증, 깨진 두개골이 다시 붙는 감각에 기순이 눈을 뜨는 순간, 마루가 말했다.
“이 악물어!”
?뻐억!
축 늘어지는 기순의 멱살을 움켜잡은 마루가 다시 짤짤짤 흔들었다.
일단 계속 좀 맞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