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25)
러스트 [RUST]-525
디트로이트.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힘차게 뛰었던 강철과 석탄의 심장은 붉게 녹슨 지 오래. 영화나 소설에서 파산한 도시, 우범 지역, 치안마저 민영화한 곳으로 묘사됐던 도시가 이제는 신성 아크 왕국의 중심도시가 됐다.
제국과의 거래를 통해 모듈원전을 여럿 확보한 결과 디트로이트는 막대한 전력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풍부한 전력은 혹한의 겨울을 버틸 힘이 됐고 도시 재건의 원동력이 됐다.
외곽 공사를 하던 인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군용으로 사용했던 파워로더식 엑소슈트가 지급된 공사현장에는 다양한 중장비들이 가득했다.
“날씨가 미쳤군.”
“그래. 돌았지.”
7개월의 혹한은 어느 순간 환상이었던 것처럼 끝나 버렸다.
순식간에 치솟는 수은주, 봄인가 했더니 시작된 여름. 4월 초순까지도 새벽 기온이 영하를 넘나들었건만 5월 중순에는 한여름 기온에 육박했다.
어이없게도 5월 말부터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는 5대 호(湖)로 유명한 큰 호수 인근에 있었기에 이렇게 쉽게 달아오를 동네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대로 가면 밤 기온이 화씨(Fahrenheit)100도가 넘을 거야.”
“38도인가? 위험하군. 그나저나 이제 섭씨(Celsius)로 통일하기로 했는데 아직도 화씨를 쓰나?”
“입에 붙어서 말이지.”
“괜히 일하다 실수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바꿔.”
인치와 센치 착각하다 폭발한 우주왕복선이 있는 판국인지라, 도량형 통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쩝- 그게 습관인데 쉽게 바뀌나.”
“착각해서 문제 일으키면 벌금 무겁게 한다잖아.”
“그나저나 그늘도 찜통이네.”
“후- 휴식시간이 넉넉해서 망정이지.”
심야 시간대에도 무려 38도를 넘나들었다. 거기에 높은 습도까지.
이렇게 푹푹 찌는 찜통더위면 에어컨 없이는 잘 수 없다고 봐야 했다.
“에어컨이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줄초상 났을 거야.”
“지난겨울 다른 동네에서는 많이 죽었다더라.”
“우리도 이제 전기요금 받는다면서?”
“이제는 월급도 받고 그러니까 내야지.”
지금까지는 왕국에서 거의 무상으로 공급해주던 전기였지만, 10월부터는 예전처럼 전기요금을 내야 했다.
“예전보다는 싸지 않겠어?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있었을 땐 뭔 요금이든 미친 듯이 올렸었잖아.”
“전력회사를 왕국이 소유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않겠지.”
“그렇겠지?”
“그럼.”
핵심 인프라는 왕국 것이었다. 국가의 소유이자 왕의 소유.
제대로 된 실적 없이 성과급 잔치를 한다는 건 왕의 재산, 왕국의 재산에 손을 댄다는 뜻이었고 바로 단두대행이었다.
비유적인 의미로 단두대가 아니라, 진짜 모가지 싹둑 단두대. 관련 경력이 있다면서 날로 해먹으려던 놈들이 얼씨구나 들어가서 설계하다가 딱 걸려, 단두대로 간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처벌이 화끈해서 좋더라고. 막말로 거하게 해먹고 몇 년 살다 나오는 새끼들 얼마나 많았냐.”
“왕국이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제대로 잡고 있지.”
사기와 무고를 뿌리 뽑은 것을 시작으로, 횡령과 배임을 뿌리 뽑기 시작한 왕국이었다. 강력범죄는 말할 것도 없이 즉결 처분이었고.
인공지능과 까마귀를 이용한 막강한 치안력 덕에, 디트로이트의 밤거리가 활기차졌다. 해가 떨어진 뒤에도 여자 혼자 편의점에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진 거리.
강도나 갱단, 약쟁이가 없는 밤거리는 어느덧 왕국의 자랑이 되었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됐음에도 사람들은 왕국을 떠나지 않았다. 왕국 부흥의 시작이었다.
머리에 붕대를 둘둘 감은 기순과 마루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인부들 뒤편으로 스쳐 지나갔다.
“다들 활기차 보이네.”
“남부는 어떤데?”
“그쪽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지.”
“근데 얼굴은 왜 죽상이야.”
“너도 대가리에 구멍이 뚫려봐라. 웃고 싶은가? 씨발. 이게 아직도 머리에 구멍이 뚫려있는 느낌이라고.”
“뼈까지 다 아물었으니까 엄살 그만 피우고. 그래서 할 말이 뭔데?”
“검사 결과가 어떤데?”
“묻고 싶은 게 그거였냐? 바람 좀 쐬고 싶다더니, 새끼. 새가슴 다 됐네.”
기순의 물음에 마루가 반쯤 장난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떠냐고?”
“···어떻기는 졸라 개판이지.”
갑각류의 껍질 같은 것이 피부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불명.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현상이었다.
두피에서 촉수가 자라는 것도 마찬가지. 그냥 촉수도 아니고 따개비 생식기와 유사한 촉수가 자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많은 숫자는 뭐란 말인가?
따개비 하나에 생식기 촉수 하나. 이게 일반적인 구조였다. 그런데 기순은 수백이 넘는 촉수를 머리에 달고 있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그곳의 숫자가 수백이 넘는다는 의미.
그를 ‘인간으로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할 정도니, 그만큼 기순의 신체검사 결과는 답이 없었다. 마루가 아니었다면 바로 핵심연구 대상에 지정되어 조각조각 해체됐을 정도였다.
“탈모와 정력 쪽 연구원들 눈이 돌아갔으니까.”
“탈모? 씨발 그걸 보고 탈모 생각을 했다고?”
기순이 학을 뗐다.
“뭐. 전투 영상 보여줬더니 입 다물기는 하더라.”
“······.”
“근데. 왜 그랬냐?”
“······.”
살기 위해서 죽인 것도 아니고, 클론 잡겠다고 대량 살상하다니. 기순이 같지 않았다.
“머리 뚜껑 따서 다 구경해 놓고 묻지 마라. 봤으니까 알잖냐?”
“그래. 봤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뇌에서 뽑은 기억 속, 녀석의 생각은 클론을 잡아야 한다는 것과 제국군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촉수들이 알아서 제국군을 도륙한 것. 그러니까 촉수 책임이라고?
아니.
마루가 보기엔 아니었다. 기순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촉수에게 넘겨 버린 것이었다. 촉수가 사람들을 죽일 줄 알면서도 말이다.
“남부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놔줄 거냐?”
“지랄은. 가서 또 바닥이나 닦게?”
뇌둥둥 정보추출기로 뇌에서 정보를 뽑아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마루였다. 기순이가 뭔 병신 같은 소리를 하든, 개소리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남부로 돌아가겠다고 주절거리는 걸 보면 제정신 차리기까지 제법 오래 걸릴 법했다.
“······.”
“나루 핑계, 우리 집안 사람들 핑계 대지 말고.”
오진 그룹이 울릉도에 자리 잡고 있었을 때, 여러 나라에서 울릉도를 공격했다. 그 공격으로 마루의 부친은 사망, 모친은 실종. 나루만 간신히 살려서 미국으로 들어온 것.
“너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끼고 있잖아.”
“······.”
마루가 보기에 기순과 나루의 관계는 이상했다. 마치 나주연과 자신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까? 나주연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기순은 나루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나주연이 나한테 집착하는 게 정상으로 보이디? 근데 네가 나루한테 그러고 있거든?”
“······.”
기순의 뇌에서 추출한 정보대로라면 나주연은 마루에게 뭔가 실험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을 쓴 것 같았다.
‘서울에서 봤을 때도 그랬었지. 사랑에 빠지는 약이라고 했던가?’
아마 그걸 썼으리라. 근데 먹히지 않자, 이런저런 약을 쓴 듯싶었다. 어쩌면 결을 느끼게 된 것도 그렇고 촉을 느끼게 된 것도 그 약 때문일지 몰랐다.
“나주연이 나에게 집착하는 게 약 때문이라면, 네가 나루에게···.”
“그만···.”
기순의 얼굴이 비참하리만큼 일그러져있었다.
나주연이 했던 말. 저주에 걸렸다는 뜻이 약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기순이 집착하는 것도 약 때문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약을 썼을까?
나주연이? 그건 아니었다.
약의 특성상 나주연이 약을 썼다면 기순이는 나주연에게 집착했을 테니.
그러니 확실히 나주연은 아니었다.
그럼 누구?
약이야 나주연이 만들었겠지만, 그 약을 기순에게 쓴 사람은 누구일까?
답은 간단했다.
기순이 누구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알면 됐으니까.
“시발···.”
“······.”
약이 먹히지 않자, 자기 자신에게 약을 써 매달리는 나주연은 그렇다고 치자. 그럼 나루는 대체 왜 기순이에게 약을 썼나. 나루가 약을 쓰도록 건넨 나주연은 무슨 생각이고.
“넌 알면서도 그러는 거냐? 나루에 대한 감정 전부 약 때문이라니까.”
“내 머릿속을 들여 봤으면서 그런 소릴 하냐?”
기순이 놈. 제법 옛날부터 나루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루도 기순이를 잘 따랐었고. 하지만 그건 옛일이었다. 약을 쓴 사람이 나루일 확률이 거의 99%인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었고.
“하- 병- 아오- 새끼.”
“······.”
마루가 침을 바닥에 탁 뱉었다.
“나주연에게 해독제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남부에 가겠다고?”
“겸사겸사 씨발 나루년도 사람 좀 만들고.”
“···지금 이렇게 나오기를 노린 걸 수 있어.”
기순의 말에 성큼 발걸음을 옮기던 마루가 딱 멈췄다.
“시애틀에 널 보낸 게,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낸 거라고?”
“어쩌면. 거의 그렇다고 봐야겠지.”
기순을 시애틀에 보낸다면 제국군과 부딪칠 게 분명했다. 위험하면 알아서 퇴각하라고 했지만, 나루와 관련된 떡밥이 있는 이상 기순은 쉽게 퇴각하지 않을 터.
촉수 괴인 모드인 기순이 제국군을 죽이면 기순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제국에서 마루에게 연락할 것이고 마루는 기순을 보기 위해 시애틀로 향할 것까지 예측했으리라.
그렇다면 다음은?
마루가 기순을 잡은 뒤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기순과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테고, 약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순간 반드시 나주연 자신을 만나러 올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으리라.
남부로 내려가 나주연을 만난 마루는 어떻게 할까? 나주연을 남부에 그냥 두고 약을 만들어서 디트로이트로 보내라고 할까? 아니면 신성 아크 타워로 데려갈까?
“그럼 더 가봐야겠네. 빌어먹을 년이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나도 같이···.”
뻐걱-
둔탁한 소음과 함께 턱이 돌아간 기순이 바닥에 개구리처럼 철퍼덕 엎어졌다. CCTV를 바라본 마루가 턱짓하며 말했다.
“지금 확인했지? 친위대 이쪽으로 보내. 이 새끼 꽁꽁 묶어서 가두고, 회의 소집하도록. 남부에 있는 오진 그룹에 들려야겠다.”
[알겠습니다. 회의소집 알립니다.]초록색으로 빛나는 불빛과 함께 디아나가 바로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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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에서 뉴포트 뉴스 조선소까지 중계기를 설치해 화상 통화가 가능해졌다.
신성 왕국 단독으로는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중계기를 설치하긴 어려웠지만, 제국이 중계기 설치를 도와서 가능했다.
제국도 뉴포트 뉴스 조선소를 비롯해 왕국과 통신할 필요가 있었기에 양국이 합심해 중계기를 설치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그 중계기를 이용한 첫 번째 화상회의에서 후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남부로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위험하다고? 내가?
마루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후드가 부연 설명했다.
[남부는 버지니아 랭리의 근거지입니다. 무슨 사고가 어떻게 날지 모릅니다.]“그래서 그걸 내가 두려워해야 하나?”
[국왕 폐하께서는 두렵지 않으실지 모르셔도 제가, 저희가 두렵습니다.]후드의 절절한 목소리에 마루가 힐끗 주변을 살폈다. 모두 후드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끙-
“그래도 내가 가는 게 제일 확실해. 나주연. 나 회장이 여기까지 봤다면, 다른 사람이 가는 건 더 위험할지 몰라.”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음.”
김 양이 간만에 썰을 풀었다.
“어쨌든 나 회장이 우리 최고 존엄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거기서 승부 보려고 하지 말고 이쪽으로 데려오면 되는 거 아님? 몰래 들어가서 나 회장 데려오는 거면 굳이 최고 존엄이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바로 그렇습니다.]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웅장한 현실에, 마루는 입맛이 썼다.
“후- 좋아 그럼 누가 가겠다는 거지?”
“규런 자쩐 자시니쓰.”(그런 작전 자신 있어.)
마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 이사 마크 2가 작은 손을 번쩍 들었지만,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시바려드리 사라믈 므시해?” (씨발련들이 사람을 무시해?)
“링크로 가려고 하는 거라서 안 돼. 남부에서 클론을 잃기라도 하면 문제야.”
마루의 설명에도 분을 이기지 못한 유 이사 마크 2였다.
누가 가야 하는지 격론이 벌어지기를 한참.
치열했던 토론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간호사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에- 또- 그냥 나오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요? 우리 애들 보내서 나오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