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27)
러스트 [RUST]-527
길게 한쪽 날개를 펼치고 고개를 꾸벅 숙인 까마귀가 발목에 달고 있던 작은 통을 부리로 풀더니 정중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나주연의 눈동자가 놀람에서 호기심으로 변했다. 마치 별이 반짝거리는 듯한 눈동자가 까마귀를 향했다.
까악?
고개를 갸웃한 까마귀의 머리 위에 느낌표와 물음표가 떠오르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는 까마귀의 모습. 슬쩍 자연스럽게 향수의 향기 범위 밖으로 물러서는 동작에 나주연이 혀를 찼다.
칫-
역시 그가 키우는 동물인지라 까다로웠다.
‘까마귀를 다룬다고 하더니, 만만치 않네.’
그나저나 까마귀를 보내서 편지라니, 그를 알고 난 뒤 두 번째 받은 편지였다. 한 번은 학창시절, 그리고 지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집안이 원수였기에 더 애틋하다고 해야 할까?
비록 그의 부모님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어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솔직히 그의 모친, 그녀가 발명한 약이 아니었으면 진작 더 나쁜 약에 빠져서 정신병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의 부친? 자신이 만든 약이 아니었다면 전신에 퍼진 암으로 옛날 옛적에 돌아가셨을 터였다.
여동생? 콩쿠르는 고사하고 아르바이트 전전하다, 예쁘게 생긴 얼굴 팔아먹고 살았을 게 분명했다. 지금처럼 종말로 향하는 시기 예쁘게 사는 건 쉽지 않았으니 결말이 뻔했겠지.
옛날 자존심 때문에 그를 괴롭힌 적도 있었다. 약이 듣지 않는 것 같아서 이런저런 약을 더 써보기도 했었고.
그런데 이제야 진심을 알아주는 건가?
‘김기순을 보내길 잘했어.’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서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편지가 올 정도면 좋은 징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김기순의 목숨을 살려준 것도 그녀였다.
따개비와 완전히 융합해버려 해양 괴물로 변하는 걸 막은 것도, 초기에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지만 적당한 비율로 섞어 공격력과 방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그녀였다.
‘따개비 오염을 지워버렸으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테니까.’
마냥 순하기만 하지 않은 기순인지라, 훈련과 실전경험을 쌓다 보면 1인분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험난한 현실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절친의 목숨도 그녀가 살린 것이었다. 그의 부모님과 동생도 그렇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이제야 그가 그녀의 노력을 알아준 것이라고.
[···지정 좌표까지 오면, 김 양이 마중을 나와···]편지를 읽던 나주연의 미간에 살풋 주름이 잡혔다.
‘김 양이 나온다고?’
왜 하필 그년이지? 김 양이라고 하면 그와 제법 오래 엮인 년이었다.
월드 축산에서 경리와 비서 업무를 맡았다는 게 공식 자료지만, 그것은 위장 신분. 실제로는 월드 PMC의 킬러로 활동했던 여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았던 기분이 조금 다운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잘만 작업하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테니. 일단 시간을 좀 끌어야겠네.’
월드 그룹의 무력 부분을 완전히 흡수한 오진이었지만, 기껏 모은 전력의 절반 이상이 울릉도 탈출 전투에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반쪽이 된 병력도 이번 시애틀 작전에서 또 절반으로 줄었고. 그러니 김 양 같이 실력 괜찮은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기회였다.
‘친위대 지휘관이라고 했었지.’
그간 왕국의 정보를 살피고 있었기에 대략적인 핵심 인물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친위대 지휘관인 김 양을 시작으로 조금씩 자기편을 만들어 가면 되는 일.
오진 그룹을 장악했을 때도 그렇지 않았던가? 시작이 미약하더라도 걱정할 건 없었다.
‘김 실장을 둘이나 붙였는데. 만나기 전에 끝났나?’
편지에 김 실장 관련 내용이 없는 걸 보면, 시애틀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나? 김 실장이 활약했다면 분명히 정체를 물었을 테니. 여러모로 제국과 신성 왕국의 무력 수준이 높다고 봐야 했다.
“나 회장님. 시간 지났습니다. 혹시 산책 더 하실 겁니까?”
“아니요. 한 5분만 있다가 들어갈게요.”
굳이 어렵게 갈 필요 없기에, 나주연은 다시 향수를 뿌렸다. 달콤한 냄새가 퍼지자, 까마귀들을 경계하며 털을 부풀리던 다람쥐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나중에 부를게. 다들 돌아가 있어.”
!!!
!!!
“거기 까마귀들. 다람쥐는 잡아먹지 마세요. 제가 키우는 겁니다.”
슥슥-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들이 모르는 척 깃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충 잡아먹겠다는 뜻. 뻔뻔한 까마귀들의 행동에 나주연이 주머니에 든 약통을 꺼내려다 참았다.
“금방 갔다 올 텐데, 그때까지 다람쥐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맛있는 걸 주죠.”
까각? (더 맛있는 거?)
깍- (콜!)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가 확 바뀐 까마귀들이었다. 어쩐지 속은 듯한 느낌에 나주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산책로를 벗어나자,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던 다람쥐들이 도로록-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람쥐들이 잘 따르네요.”
달콤한 향기에 취한 요원이 그녀의 뒤를 빠짝 따랐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이니까요.”
“그러셨습니까? 참- 그런데 까마귀 소리는 뭡니까? ”
“저도 처음 보는 거라서 잘 모르겠네요.”
“그렇습니까? 까마귀면 잡식성이라 키우는 다람쥐들이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그런가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녀가 가녀린 목소리를 냈다.
“어떡하죠? 제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귄 애들인데.”
“걱정하지 마십쇼. 그렇지 않아도 까마귀는 유해조수입니다. 조류 사냥 쪽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친구가 있으니 금방 해결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는 나주연을 다정하게 진정시키는 요원이었다. 그녀를 지하 실험실로 내려보낸 요원이 바로 무전기를 켰다.
“숲에 까마귀가 들어와 청소가 필요하다. 출몰 장소는 나 회장이 산책하는 루트 근처.”
[청소 요청 접수 확인. 지금 즉시 청소를 시작하겠다.]깃털 하나, 깃털 둘, 깃털 셋···.
깃털을 세던 까마귀 하나가 길게 울었다.
까아아아아악악! (금방 온다며!)
까으으악. 깍! (인간 암컷은 나가는 데 오래 걸리잖아.)
깍- 까악- (아까 그 다람쥐들. 어느 쪽에 있는지 확인해 놨어.)
그렇지 않아도 비행선이 착륙한 곳까지는 한참을 가야 했다. 미리 정찰도 해야 했고 덤으로 인간 암컷까지 호위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미리 넉넉하게 먹어두지 않으면 낙오될지 몰랐다.
끄- 끄까악- (20분만 더 기다려보자.)
10분이나 지났을까?
숲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까마귀가 갑자기 길게 소리 질렀다.
까아아악!
경고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총소리가 들렸다.
타앙!
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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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들의 대응은 빨랐다.
우선 경계를 서던 녀석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 죽었으면 누가 죽였는지, 부상이라면 이동 가능한지 파악해서 대응.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뤄졌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곧바로 현지 보급 사냥이 시작됐다.
남부연맹과 상호불가침조약 중인지라, 왕국소속 까마귀임이 드러나는 폭탄을 쓸 수 없었다. 폭탄과 폭격에 적응된 까마귀들은 예전처럼 발톱과 부리만으로 적과 싸워야 했다.
푸드덕-
활강할 때라면 부엉이나 올빼미처럼 소리를 죽일 수 있었더라도, 급격하게 가속할 때 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까마귀 세 마리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숲을 뚫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 까마귀들을 노리듯 울리는 총소리.
연발이 아니라 단발. 그것도 여럿.
깍-까악 (저격 최소 3명.)
까악- 깍 (12시 방향에서 4시 방향)
까아아악 (포위망은 아님.)
높이 불규칙하게 날면서 피격 확률을 낮춘 정찰 까마귀들이 총격을 피해 허둥지둥 도망치는 것처럼 숲으로 내려갔다.
동그랗게 모인 까마귀들이 꺾인 나뭇가지로 흙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총격. 저격 인간 3마리 이상.)
긴 작대기를 든 졸라맨 3명이 그려졌다.
까악- 까아악? (저격 인간 있으면 뒤를 받쳐주는 인간도 있을 텐데?)
작대기가 다시 움직였다.
(있다면 여기 아니면 여기. 그리고 반대편에는 몰이꾼 가능성.)
본격적으로 몰이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저격부터 한 걸 보면 대규모 사냥의 조짐이라고 봐야 했다.
까아아악? (비행선에 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깍까아악? (그걸 노리고 뒤에 따라붙는 인간이 있으면?)
······
······
까아아악! (임무가 제일 중요하다!)
작대기가 까마귀를 삼등분으로 나눠서 그리기 시작했다. 12시에서 4시 사이에 있는 저격병을 공격하는 쪽, 후방에서 보급 사냥을 하는 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주연이 나오면 호위하는 쪽.
깍-깍-까악! (동시에 움직인다.)
인간 암컷이 시간 내에 나오지 않는다면, 약속을 어긴 것. 빠져나올 능력이 없으면서 기다리라고 한 능력 없는 암컷이거나, 이쪽을 배신한 암컷일 뿐.
까마귀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날다람쥐처럼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기 저 새끼들 뭡니까 저거.]까마귀 3마리가 곡예 비행하듯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모습. 관측수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켓처럼 치솟는 것도 그렇고 미사일처럼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 까마귀가 낼 수 있는 퍼포먼스를 한참 넘어선 기동에 관측수가 표적을 놓쳐버렸다.
[변이를 일으킨 까마귀가 맞는 것 같다.] [이 근처에서 자생한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그럼 지나가는 놈들이겠지.] [지나가는 것들이건 뭐건 변이 괴수는 최대한 빨리 정리하는 게 맞아.] [이게 또 이렇게 걸리나? 운이 없는 건가 아니면 좋은 거야.] [운이 좋은 거지, 한 마리당 포상금이 얼마냐?]낄낄 웃으며 잡담하던 청소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까마귀들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산책로 주변이라고 하지 않았나?]남부군과 버지니아 컴퍼니에서 합동으로 운영하는 청소팀은 정예였지만, 예상 밖으로 움직이는 까마귀들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알파- 여기는 알파- 하늘에 보이나?] [브라보- 까마귀들이 보이지 않는다.] [찰리- 이쪽도 마찬가지다. 이것들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여.]총소리에 깜짝 놀라 푸드덕 날아올라야 했을 새대가리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몰이 쪽은 어떻게 됐지?] [중계기를 설치한 뒤에 바로 움직이기로 했다.]잠시 뒤, 기다리고 기다렸던 몰이팀에서 신호가 왔다.
[치지직- 여기는 몰이팀. 몰이를 시작하겠다.]뻐어어어엉!
한쪽에서 터진 소음과 빛살이 숲의 그림자를 몰아냈다.
[놓치지 말라고. 변이 놈들 똑똑해서 한 번 놓치면 잡기 힘드니까.]다시 이어지는 폭음.
쾅! 쾅!
[뭐야? 이 새끼들.]콰아앙!
쾅! 쾅!
[저 새끼들 수류탄 그냥 막 까는 거 같은데?] [한 번 터뜨렸으면 기다렸다가 터뜨리지 뭔 지랄이래.] [젠장 텄나?] [지랄 터진 거 같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예상대로 고요했던 숲이 파드드드 떨리기 시작했다.
사슴을 시작으로 별의별 동물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새들도 한꺼번에 치솟아 올랐다.
‘저기서 어떻게 까마귀를 찾으라고.’
해탈한 표정이 된 관측병이 검은 구름처럼 뭉친 새떼를 확인하며 몰이팀을 씹었다.
[브라보- 확인 불가. 삐-] [치이익- 알파- 시야에 삐빅- 들어오지 않는다.] [······.] [삐이이이익- 전파장애가 심해진 것 같다.] [치지지직- 몰이팀- 삐이익 중계기 확인 바람-] [어이- 전파장애가 심해졌다. 삐이이이-] [치익- 찰리?] [···찰리? 삐이익 확인 바람.] [삐이이- 까아- 차알리- 치지직- 없다아악-]???
이게 씨발 무슨 소리지?
관측수와 저격수가 고개를 돌려 방금 들은 통신이 맞는지 확인했다.
‘들었지?’
‘What the Fu···.’
브라보팀 관측병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찰리팀이 있는 방향으로 관측경을 돌리자,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무엇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Shit!!!]짧은 거리는 통통 튀듯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고 있었고. 먼 거리는 날다람쥐처럼 활강으로 이동하는 검은색 무엇이 관측경에 잡혔다.
[까마귀다!]관측병의 외침에 저격수가 총구를 돌리기도 전, 소리 없이 저격수의 등판에 내려앉은 까마귀가 콕- 눈알을 쪼았다.
!!!!
끄아!
한쪽 눈을 쪼인 저격수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소리치는 순간, 입안을 가득 채운 둥그런 금속.
팅-
익숙하게 듣던 소리를 마지막으로
콰아아앙!
브라보팀이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