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31)
러스트 [RUST]-531
세뇌하기 위해 약을 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은 아주 미세하게라도 한계를 넘는 순간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일단 대화를 통해 정신을 유도하는 건데 지금 앞에 앉은 여자는 유도는 고사하고, 정상적인 대화도 힘들었다.
긴급한 상황을 설명하려고 해도, 뉘앙스를 모르는 건지 영어 능력이 부족한 건지 시큰둥한 반응.
“그러니까 아셨습니까?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당신 때문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전쟁이.”
“-누가 뭐래요? 근데 그게 왜 저 때문이죠?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 때문에 전쟁이에요? 이상한 아저씨네. 정말.”
교관은 순간 핑-돌았다.
이상해? 지금 설명했던 게?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제껏 설명한 건 어디로 갔지? 남부연맹과 신성 왕국의 미묘한 정세라든지, 현재 미합중국이 분열됐고 이에 많은 시민이 고통받고 있다든지 그런···.
“아니,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 제가 뭘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뉴욕에 있는 줄리아드 가고 싶다니까 사람 붙잡아 놓고 미국이 망했다고 그러면 ‘아 미국이 망했구나.’ 그래야 하는 겁니까?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야.”
나루는 코웃음 쳤다. 망했는데 도로에는 자동차가 굴러가고, 빌딩 멀쩡하게 반짝거리고, 여기 지하에 전깃불 환한 거 보소. 아포칼립스 영화 보면 다 무너지고 빠개졌던데 말이지.
현황 보고를 받은 죠셉 마이어 회장은 눈을 감았다.
개념이 없는 것인가? 상황 파악 못 하는 건가? 지능이 떨어지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풀어주는 것도 곤란했다. 저게 아무 막말이나 해버리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나?
‘설마 이것까지 다 계산하고 그러는 걸까?’
앞뒤 없는 척하는 거라든지.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블라디마루 칼린과 엮이면 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여동생을 오진 그룹 나 회장이 던지고 갔을 때부터 진지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완전히 꺾어 놓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고···.’
정신적 회유가 불가능하다면 정신적 고문이나 육체적 고문을 통해 깎아내야겠지만, 그 방법은 쓰기 어려운 상황.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 고통이 아닌 쾌락이라면?
[이미 먹고 있는 약이 있더군요. 다른 약물에는 일종의 내성이 생긴 것 같습니다.]“정신계 약물에 내성이 있다고?”
[정확한 검사를 해보려면 해부를 해봐야 알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반응은 그렇습니다.]“먹고 있다는 약의 성분은 파악했나?”
[분자구조 자체가 뭉개져 있어. 성분 파악이 어렵습니다.]“······.”
오진 그룹의 치료제도 그랬다. 분노조절장애 진정제가 식인병에도 효과가 있으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레시피가 공개됐어도 마찬가지였다. 제조 방법의 미세한 차이로 약효 지속시간이 20배 이상 차이 나리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같은 성분에 다른 효과라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오진 그룹의 약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동생이 가지고 있는 약도 비슷한 종류였다.
“그래서 그 약의 효과는 뭐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미약한 신체능력 강화에 일종의 신경계 약물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죠셉 마이어 회장의 고민이 깊어졌다.
좋은 카드라고 생각했더니 손대기 힘든 폭탄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구린.
“···줄리아드에 가고 싶다고 했다지.”
[예.]치안을 수습한 주에서는 초중고 과정이야 홈-스쿨링(Home-Schooling)으로 돌릴지언정, 대학은 정상적으로 운영하려고 노력했다. 이건 동부 제국의 중심이 뉴욕이나, 남부연맹의 중심인 텍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보내지. 거기로.”
[준비하겠습니다.]보내고 싶은데, 줄리아드 가겠다고 해서 보내줬으니 알아서 찾아가라. 이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었다. 잠깐 건드렸던 건, 줄리아드 보내주는 것으로 없던 것으로 하고.
“제국 화폐를 넉넉하게 챙겨주고, 동양계 여성에게 인기 많은 직원 있나? 그 여자가 호감 보이는 유형 파악해서 직원을 붙이도록.”
[알겠습니다.]시간이 없으니 이렇게 가는 게 맞았다.
자기가 선택했다고 믿게 하는 방법으로 가야겠지.
뇌물도 약도 먹히지 않던 자들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게 하면 오히려 움직이기 쉬웠다.
‘원하는 데로 줄리아드에 가고, 꿈꾸던 대로 멋진 남자 친구가 생기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래도 신성 왕국으로 가려고 할까? 그 여자가?’
죠셉 마이어 회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안건을 확인했다. 신인류 진화 실험이 일부 성공했다는 보고였다.
‘이제 곧 귀족의 시대가 열리는 건가?’
귀족의 시대.
영구불변한 평화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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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절반 이상의 지역에서 전력난이 심각했지만, 뉴욕은 달랐다.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이명대로 찬란하리만큼 밝은 불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이 화려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 화려함을 유지했기에 희망이 꺼지지 않았으니, 그 희생은 결코 헛된 게 아니리라.
[총통님. 남부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갑자기 사람을 보냈다고?”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시애틀에서 물고 물리는 교전이 점차 커져 사실상 시애틀을 놓고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사람을 보냈다?
‘일단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미겠지.’
아무래도 시애틀에서 소모전이 계속된다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좋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을 보내 미리 사전 조율을 하려고 하는 것이리라.
“시애틀 문제 때문인가?”
[···아닙니다. 유학생입니다.]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덴 브라운 총통이 되물었다.
“유학? 남부에서 우리 쪽에 유학생을 보낸다고?”
[예. 그게 줄리아드에 입학하고자 한답니다.]순간적으로 어이없었다.
지금 이 시국에 유학? 그것도 음대에? 대체 무슨 생각이지? 미리 의견 교환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사람부터 보내?
“미쳤군. 스파이를 꽂겠다는 건가?”
이쪽에서 받아주지 않겠다면 어쩌려고? 아니, 애초에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혹한의 겨울이 끝난 뒤 대학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돌려보내.”
[저. 그 유학생 신분이 문제가 좀 있습니다.]“남부연맹 의원 손녀라도 되나?”
[아닙니다. 신성 아크 왕국 국왕의 여동생이라고 합니다.]뭐?
“블라디마루 칼린의 여동생?”
[네. 자신이 그 마루의 여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남부연맹에서도 그의 여동생이 제국으로 가겠다고 하는 걸 막지 못해 보내주는 것이라고···.]덴 브라운 총통은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지끈거리는 편두통이 도진 느낌.
“되돌려보내.”
[남부의 비행선은 여자와 일행을 내려놓자마자 바로 떠났습니다.]콕콕 쪼는 두통을 뚫고 드는 강한 의구심. 블라디마루 칼린의 여동생이라면 써먹을 곳이 많을 텐데 그냥 포기했다고? 대체 왜?
‘가짜를 보내놓고 죽이려는 건가? 아니면 진짜를 제국에서 죽이려고?’
제국에서 여동생이 죽었다면, 블라디마루 칼린이 어떻게 반응할까? 제국을 뒤집어서라도 복수하겠다고 하겠지. 남부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시달릴 게 뻔했다.
“호위 단단히 하고 일단 데려와.”
[직접 만나시려고 하십니까? 남부의 암살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그러니까 검사 똑바로 하도록. 차라리 그렇게 걸러졌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 여자와 함께 온 일행은 어떻게 할까요?]줄리아드에 같이 들어가기로 한 남자라는데 보기 드문 미남이라고 했다.
“일행은 따로 격리하도록.”
[알겠습니다.]진짜라면 한 번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디마루 칼린의 여동생이라는 사람이 총통관저에 도착했다.
‘아니. 갑자기 사람을 이렇게 끌고 다니는 이유가 뭐죠?’
‘무슨 검사요? 피를 뽑았으면 됐지. 무슨 검사를 또 한다는 거죠?’
‘안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보자고 했어요?’
남부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몰랐으니 깐깐하게 검사할 수밖에 없었고, 여자는 그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볼 생각도 없는데 왜 자기들 멋대로 끌고 와서 이러냐고.
덩치 큰 경호원들이 압박하는데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걸 보면 기가 세거나, 백이 있는 여자였다.
‘하긴. 블라디마루 칼린이 오빠라면 무서울 게 없겠지.’
그래도 검사는 꼼꼼하게 계속됐다. 만에 하나라도 버지니아의 악명 높은 세뇌에 걸린 여자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길고도 긴 검사를 거쳐, 덴 브라운을 마주한 나루는 짜증 냈다.
“덴 브라운 총통입니다.”
“네. 근데 높으신 분이 왜 절 불렀어요?”
블라디마루 칼린과는 다른 어눌한 억양. 거칠고 고저 없는 다다다-식 느낌에 총통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통역을 불러드릴까요?”
“그러세요.”
뭐 이리 무식한. 뒤에 서 있던 비서와 경호원이 움직이려는 것을 손을 들어 제지한 덴 브라운이었다. 곧 통역이 도착한 뒤, 덴 브라운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부반군과 제국이 전쟁 중이라 절차가 좀 복잡했습니다. 양해부탁 드립니다.”
“예. 뭐. 이해해요. 그런데 왜 절 부르신 거죠?”
“신성 왕국 국왕이 친오빠 맞습니까?”
“예. 그 사람이 친오빠 맞아요.”
미미하게 짜증 내는 표정. 국왕의 여동생이라면서도 짜증 내는 얼굴은 진짜의 표정이었다. 덴 브라운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신성 왕국으로 가시지 왜 뉴욕으로 오셨습니까?”
“못 들으셨어요? 줄리아드 가려고 왔다니까요.”
이런 질문은 그냥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되는 일 아닌가? 번거롭게 이런 검사 저런 검사 다 하더니, 질문이 고작 이딴 거냐는 듯 짜증을 숨기지 않는 나루였다.
“안타깝지만 줄리아드를 비롯해 모든 제국의 대학은 외부인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외부인을 받지 않는다니요?”
“제국 시민만 입학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할게요. 제국 시민.”
“허허허- 신성 왕국 국왕의 여동생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요?”
“그런 분이 왕국 시민권을 버리고 제국 시민이 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요? 제가 제국 시민권을 받고 싶다는 데 문제 있나요?”
덴 브라운 총통은 눈앞에 있는 여자를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폭탄이었다. 그것도 거대한.
‘빌어먹을 남부 놈들.’
총통은 바로 나루를 호텔에 넣어 격리하곤 신성 왕국 블라디마루 칼린에게 연락했다. 어서 폭탄 치우라고. 하루가 지나 신성 왕국에서 답이 왔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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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과의 즐거운 삼겹살 회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나주연과 자리를 잡은 마루였다.
“기순이는 어쩌다 저렇게 된 거지?”
“···나루가 원한 일이었어요.”
“나루가 뭘 원했고 뭘 어떻게 했길래 기순이가 저렇게 된 건데? 설마 그 사랑 어쩌고를 쓴 거냐?”
“······.”
침묵은 암묵적 동의라고 했던가? 기분이 더러워진 마루였다.
“네가 썼냐? 아니지, 네가 썼으면 너한테 달라붙었겠지. 하- 씨발.”
“······.”
그러니까 약을 쓴 건 나루라는 의미. 약을 써서 자신에게 기순을 묶어 둔 뒤, 그냥 주변을 떠돌게 했다는 뜻이었다. 대체 왜?
“자기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게 기순이다? 그럼 사귀면 되잖아.”
“나루가 자기 취향은 아니라고···. 머리카락이 그렇게 되고 난 뒤에는 말미잘 느낌이라서 싫다고.”
“씨발- 그럼 취향도 아닌데 사랑의 머시기로 애를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마루는 콱 숨이 막혔지만, 꾹 참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루에게 약을 준 년이 자기는 써보지 않았을까?
“너도 썼겠네. 그 사랑의 머시기···. 나한테 썼었냐?”
“······.”
“왜 대답을 안 해? 나한테 썼는데 내가 안 걸려서 나루로 넘어간 거냐?”
“······.”
묵묵부답인 나주연을 향해 마루가 픽- 웃었다.
“세상 참 좋아진 거 같아. 궁금한 걸 알 수 있는 시대가 됐단 말이지.”
“···?”
“주연아. 난 진짜 궁금했거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근데 이제는 알 수 있게 됐네.”
“······.”
마루가 신호를 보내자, 카트를 끌고 들어오는 김 양.
[뽀규르르르르르르르] [뻐규르르르르르르르]기이한 거품 소리를 내는 뇌둥둥 생체단말기가 카트 위에 올려져 있었다.
“자- 우리 허심탄회하게 네 머릿속을 까 볼까?”
걱정은 말고. 치료제가 있으니까.
!!!
뽀각!
두개골 뚫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