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36)
러스트 [RUST]-536
김 양은 동그란 유리병에 든 머리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꼭 저래야 하나?’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눈알을 굴려대는 것도 그렇고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가리 멀쩡한 건 무조건 날려버렸어야 했는데.’
복사해서 붙여넣기 신공 덕에 머리가 멀쩡한 시체들은 전부 뇌둥둥 단말기의 재료가 됐다. 그 결과 연구실 하나에 거대한 포도송이가 들어서게 됐다.
“하필 왜 포도 모양임?”
뜻 모를 김 양의 질문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보던 마루가 대답했다.
“시간을 들여 정밀하게 설계하면 다른 모양을 할 수도 있지만, 최대한 빨리 만들어서 써먹으려면 포도 모양으로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하더라고.”
구조적 밀집도를 높이면서 냉각을 생각하고 3차원 공간구조를 구축해 위계까지 나누려고 한다면, 포도 모양으로 만드는 게 제일 직관적이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구조였다는 것.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저거 꼭 머리를 통째로 넣어야 했음? 처음처럼 뇌만 꺼내서 둥둥하는 게 보기에도 깔끔한데.”
“뇌만 깨끗하게 분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해부학 전문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김 양이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혼자 다듬어도 금방 처리할 수 있으면서 약한 소리?’
‘······.’
‘발골의 달인이 고작 의료전문가 핑계?’
‘······.’
그런 김 양의 눈빛에 마루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목을 자르면 잘랐지, 사람의 머리통을 무더기로 해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머리 모양을 그대로 살린 이유가 있습니다.”
나주연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뇌만 뽑아 생체단말기를 만들 경우, 이번처럼 딴 생각하는 게 나와도 알아챌 방법이 없죠. 하지만 저렇게 머리통을 온전히 살려 넣으면 알아챌 수 있습니다.”
“관상이라도 보게?”
김 양의 불퉁한 목소리에 나주연이 미소 지었다.
“비슷합니다. 표정에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연기하면 어떡하려고? 그리고 연결됐으니까 직접 정보를 헤집으면 알 수 있잖아.”
직접 정보를 찾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현실적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컴퓨터도 오류 점검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했는데, 머리둥둥 단말기는 더 오래 걸렸기 때문.
“연기하는 건지 아닌지는 표정 분석과 뇌파 변동을 확인하면 알 수 있습니다.”
몇 번에 걸쳐 ‘교육’받으면 알아서 수그릴 것이라고 말하는 나주연의 이야기에 김 양은 고개를 돌렸다.
그놈의 ‘교육’이 뭔지 대가리만 남은 것들이 어떻게 ‘수그릴’ 건지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보고 있으면 어쩐지 열불 난다고 할까?
“그래. 그쪽은 맡길게.”
“걱정하지 마세요.”
마루의 말에 냉큼 대답하는 나주연의 눈빛에는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던 김 양이 척척 연구실 밖으로 나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약혼녀 드립에 뭔가 맛이 간 것 같은 년과 한지붕 생활을 할 줄이야. 게다가 그년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년에 데려온 연구진들만 해도 수십. 이번에 사고를 당한 연구원들의 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인원이었다.
특히 제약 쪽 연구원들은 어디서든 스카우트 제의가 올 정도로 실력 있는 자들이었다. 오진 그룹에서 나주연을 아가씨로 모시고 있던 자들이기도 했고.
‘거기에 버지니아 컴퍼니 비밀 연구실에 있던 자들도 같이 왔지.’
그들의 숫자만도 10명이 넘었다. 마루는 에리카를 시켜 사이코메트리로 검증까지 했음에도 버지니아 연구소에서 온 자들을 집중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
‘이쪽에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있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에 대비하는 방법이 있겠지.’
‘어떤 방법?’
‘기억을 덮어씌우고 특정 암호를 말하면 무의식에 가라앉았던 명령을 떠올리게 한다거나.’
‘아-.’
기억 추출, 조작, 복사해서 붙이기, 덮어쓰기 같은 기술이 있다면, 그 기술이 제국이나 남부에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흥- 그러면 그냥 쫓아 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지.”
김 양이 발치에 있는 휴지통을 콩-하고 작게 걷어찼다. 스테인리스로 된 휴지통이 웅웅 우는 소리를 뒤로 들리는 마루의 목소리.
“왜 또? 뭐가 불만인데?”
“일없음.”
“실없기는···.”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뭘?”
“저 여자, 계속 여기에 데리고 있으려고?”
‘다른 데로 확 보내지 않고?’
김 양이 눈빛으로 열심히 말했다.
포도송이까지 혼자 다룰 수 있으니까 캐나다 쪽 재건하고 있는 곳으로 파견하는 건 어떰? 토론토나 몬트리올, 퀘벡 같은 도시로 보내서 거기 재건하면서 키우라고 하면 잘 키울 것 같은데.
“당분간은 어려워. 양자컴퓨터와 슈퍼컴퓨터를 결합하기로 했거든 업그레이드하는 동안, 나주연이 인공지능이 처리하던 업무를 대신 맡아서 하기로 했어.”
디아나와 사만다는 슈퍼컴퓨터와 사실상 결합한 인공지능이었기 때문에 양자컴퓨터를 다루려면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다. 그 공백을 나주연이 맡기로 했다.
“그래 놓으면 양자컴퓨터랑 포도송이랑 또 연결할 거 같은데? 위험하지 않겠음?”
“위험하다-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니, 김 양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여자잖음. 그리고 저번에 말했듯이, 자기 자신에게 약을 써서 맛이 갔다면서 껄끄럽지 않음? 약 때문에 막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이 붙는 거?”
뇌둥둥 박사와 연결됐던 그 짧은 순간. 나주연의 기억에 나온 장면들. 기록들 사이에서 마루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애정을 회피하자, 그녀가 마루를 향해 약을 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마루에게는 그녀가 쓴 약이 효과 없었다. 약을 썼음에도 마루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자,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약을 써 스스로 주박을 걸었던 것.
그래서 김 양은 나주연을 정상이 아닌 년이라고 판단했다.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은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약 기운 때문인데 그걸 믿겠냐고 마루에게 되물었다.
“오히려 그래서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약까지 쓴 여잔데 그쯤 되면 믿어도 될 것 같은데.”
어? 그러고 보니 그럼직도 했다.
“아니. 제약 천재라면서. 해독하는 약 만들어서 먹고 아닌 척하고 있을 수도 있잖음.”
“기순이가 그렇게 고생한 것을 보면 아직은 없을 거야.”
“포도송이랑 양자컴퓨터에 슈퍼컴퓨터까지 연결되면 그 묘약 해독제도 금방 만들 텐데?”
“그렇겠지. 그래도 지금은 안전화가 최우선이야.”
통-울리는 금속음. 김 양이 스테인리스 쓰레기통을 콩- 찬 것.
“디아나와 사만다로는 양자컴퓨터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부족하다고 하니까. 나주연의 포도송이가 필요해.”
“······.”
김 양의 불만스러운 표정에 마루가 웃었다.
“왜 웃음?”
“뭔 걱정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흥- 밥이나 먹으러 가셈. 삼겹살 얼마 남지 않았다던데.”
“그래.”
“근데. 멧돼지엔 기생충 같은 거 많지 않음?”
“밥 먹으러 가자 더니, 갑자기 웬 기생충 이야기야.”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랬지. 저번에 대따 큰 곰에도 없었으니까···.”
투닥투닥 발걸음을 옮기는 마루와 김 양의 모습을 CCTV가 바라보고 있었다.
======
======
모니터에 떠오른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주연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2년 동안 저장된 영상 모두. 분석은 끝났지?”
[[[···끝났다.]]]나주연에게 완벽히 굴복한 잭 니스 박사의 겹쳐진 목소리가 포도송이에서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슈퍼컴퓨터가 10년 걸려서 처리해야 할 정보를, 트리아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면 1년이면 이면 정리 가능했다.
본래 잭 니스 박사가 만든 3개의 모듈을 갖춘 슈퍼컴퓨터의 이름은 트리아, 그 슈퍼컴퓨터의 이름을 딴 인공지능이 트리아였다.
잭 니스 박사는 신세계의 꿈을 접었다. 그건 여러 잭 니스들이 토론한 결과였다. 세계 전체를,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발상이 옳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비참했다.
그런 잭 니스들에 나주연은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사용했다. 채찍은 뇌가 녹아버릴 것 같은 약과 전기충격이었고 당근은 트리아였다.
마루가 조각조각 회를 떠버린 트리아 모듈이었지만, 양자컴퓨터와 포도송이를 이용한다면 복원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트리아를 복원하고 싶다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겁니다.”
[[[알고 있다.]]]트리아의 복원,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이라도 된다면 여한이 없었다. 그렇게 잭 니스들은 나주연에게 완전히 복종했고 그 결과 양자컴퓨터의 빠른 운영이 가능해졌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양자컴퓨터는 일종의 실험용 장비였지만, 양자컴퓨터와 포도송이 조합은 실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 엄청난 성능을 이용해 나주연이 한 첫 번째 작업은 마연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마루 연애 시뮬레이터. 그간 분석한 영상 정보와 행동 정보를 이용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 마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적용했다.
물론 약간의 흑심을 한 스푼 넣고, 달달함을 한 꼬집. 쌉쌀함을 적당히 뿌렸더니, 훌륭하다 못해 ‘훌흉한’ 마연시가 나와버렸다.
나주연은 부푼 기대를 안고 접속 헬멧을 착용했다.
우웅- 감각이 변하며, 1년 전 추운 겨울 디트로이트로 변했다.
후우-
숨을 쉬자, 하얗게 피어나는 입김.
날카롭도록 시린 공기가 폐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현실과 똑같다면 그건 현실인가? 아니면 가짜인가?
나주연은 문득 잭 니스 박사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아마 세계급 규모의 마연시를 만들고 싶었던 거겠지.
“시나리오 1번 시작. 스타트 지점 활성화.”
[시나리오 1번 시작합니다. 스타트 지점 활성화 완료.]기계음과 동시에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주연이 뒤로 돌아섰다. 날카로운 눈매를 한 사내가 날렵한 방한복을 입은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냐?”
“당신이 보고 싶어서···.”
“···장난해? 어떻게 들어 왔냐고? 경비를 매수한 건가?”
(인공지능의 경계를 어떻게 뚫었지? 해킹 대비는 충분했는데?)
마연시 특유의 속마음 읽기 풍선이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모습에 나주연이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
서걱- 휘칵-
찰나와 같은 두 번의 검격.
눈 깜박일 새도 없이 그녀의 양팔이 하얀 눈 위로 떨어졌다.
점점 붉게 물드는 순백의 정원.
꺄아아아악-
가짜라고 생각해도 잘린 양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참을 수 없었다.
[뇌파 불안정. 통증 강도 줄입니다.]기계음과 함께 사라지는 통증. 나주연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왜 칼질부터 하는 거죠? 왜?”
“말로 했을 때, 대답했어야지.”
(제정신인가? 아니,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역시 뇌둥둥으로 확인하는 게 빠르겠어.)
마연시 풍선에 떠오른 생각을 읽은 나주연이 다시 소리를 빽 질렀다.
“머리에 구멍 뚫을 생각부터 하지 마요.”
“너···.”
(정신계 능력이라도 각성한 건가?)
풍선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세상이 빙글 돌았다.
어?
갑자기 몸에 느낌이 사라지고 있었다. 과다출혈?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날씨라 출혈 문제는 아닐 텐데.
빙글빙글 도는 세상의 저편.
칼을 칼집에 넣는 마루의 모습이 보였다.
이어, 하얀 정원을 배경으로 검붉게 떠오르는 자막.
[YOU DIED]“······.”
[[[······.]]]“시나리오 1번 스타팅 포인트로···.”
[시나리오 1번 스타팅 포인트에서 재시작합니다.] [YOU DIED]······
[YOU DIED]······
[YOU DIED]······
[YOU DIED]······
······
······
치릭-
접속 헬멧을 벗은 나주연의 몰골은 초췌했다.
‘분명히 달달함 첨가했는데···.’
시계를 보니 현실 시간은 고작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혼이 피폐해진 느낌이었다.
잭 니스 박사들이 한마디 했다.
[[[변태였나?]]]“닥쳐욧!”
끙-
올라오는 두통에 머리를 붙잡는 나주연이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모니터 속엔 먹방을 찍고 있는 마루와 김 양이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주연이 접속기를 꼭 쥐었다.
그날 저녁.
나주연이 김 양의 거처, 방문을 두들겼다.
[이 시간에 무슨 일?]“진짜 좋은 게임이 하나 있는데, 어떠세요?”
[일없음.]“이거 그냥 단순한 게임이 아니에요. 포도송이와 양자컴퓨터를 이용해서 만든 최신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그러니까 마연시인데 생각 없으세요.”
[···마연시?]약간 당혹스러운 톤이 된 김 양.
현실에도 풍선이 있다면 ‘마연시가 설마 그 마연시? 미친년인가?’하는 풍선이 올라왔겠지. 나주연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네. ‘마’루 ‘연’애 ‘시’뮬레이션. 마연시요.”
순간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철컥-
[들어오셈.]“실례할게요.”
나주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