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45)
러스트 [RUST]-545
“계속해 보지? 계속 거품으로 지랄해봐.”
지이이이잉-
이클립스가 먹잇감을 노리는 듯 가늘게 떨어 울었다.
[자. 잠깐. 나주연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여자가 얼마나 속이 검은 줄 아는가?]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 증거가 있다고!]뭔 증거? 일반 컴퓨터로도 딥페이크(deepfake)를 찍는 판국에 가상현실을 만드는 놈이 내미는 증거를 믿으라고?
[접속. 그래 직접 접속해서 보라고. 그 여자가 하는 짓을 본다면 모든 게 오해라는 게 밝혀질 거야.]그러니까 오해다?
찝찝하다 못해 기분이 더러워지는데, 오해?
[김 양이 숨기고 있는 속내도 알고 있다.] [그 여자 겉으로 보기와는 달라. 언제나 노리고 있는 건 권력이란 말이다.]알아 새끼야.
툭하면 옆자리 찾고 있는 거.
[김기순이 꼭꼭 감추고 있는 비밀도 알고 있다.] [친구라는 놈이 사실 원하는 게 따로 있다는 건 알고 있나? 그놈이 원하는 것도 접속하면 알 수 있어.]그 새끼 비밀이라고 해봐야 나루겠지. 지랄해도 나루고. 대가리에 촉수 달아 놓고도 그랬는데 다른 게 뭐 있겠냐? 있어도 상관없고.
[해커. 그 여자도 본래는 나와 같았다. 같은 꿈을 꾸는 여자란 말이다.] [사이코메트리가 철이 든 것 같나? 그 여자가 진정으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 [직접 확인해 보면 알 것 아닌가?] [나는(우리는) 알고 있다. 정말이다.]“그래서?”
어쩌라고?
접속하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성큼성큼 다가서는 마루를 보고 잭 니스 박사가 발작했다.
[나를 죽이면 양자컴퓨터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김기순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그건 인류의 업적이다.] [인류의 미래고 인류의 희망이라고!] [그건 전문 지식이 없이는 다룰 수 없어. 멀리 보는 지혜도 없는 잡종이 관리할 수 있을 것 같나?]없긴 왜 없어? 다 방법이 있지.
[나는 죽지 않아. 죽지 않는다고. 그래 난 언제나 부활했다.] [언제나 살아남았다! 지금 네가 날 죽인다고 내가 죽은 걸까?] [정말 날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나는 이미 거짓된 제약을 벗어났다.] [생체단말기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이제는 신세계의 신이 된 것이다.] [신은 죽지 않아!] [신이 죽은 세계는 결국 타락하고 붕괴한다!]머리통과 뇌로 이뤄진 포도송이에서 퍼진 정신파가 물리력을 보였다.
드드드-
떨리는 공기.
전신을 옥죄는 압박에도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미소 지은 마루가 발걸음을 옮겼다.
“안 죽으면 죽을 때까지 죽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라. 확실히 죽여줄 게.”
그러고 보니 이 새끼.
진작 정리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끝내겠네.
기스 라이저에게 뇌둥둥이 된 뒤로, 트리아 써먹으려고 그냥 뒀더니 기어코 일을 쳐? 이번에도 마찬가지. 조용히 할 일 하다가 작게 가상현실 만들어서, 거기서 알콩달콩 트리아랑 소꿉놀이하겠다고 했으면 누가 죽일까?
[날 죽이면? 가상현실은 어떻게 하려고?] [김기순이 같이 엄한데 정신이 팔린 놈이 제대로 된 가상현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나? 따개비와 약물에 절은 잡종이?]극도로 압축된 정신파가 염력 비슷한 공간 장악 능력을 보였지만, 마루에겐 소용없었다.
[지금 내가 연구하고 있는 연구 주제만 1,852개 시뮬레이션으로 데이터를 쌓고 있는 실험이 1,227개나 된다. 거의 다 성과가 나오고 있다. 그걸 전부 없앨 건가? 인류의 미래가 달린 연구인데?]미래 인류에게 필요한 연구와 실험을 하고 있다며 거래를 해보려고 했지만, 마루에겐 통하지 않았다.
[당장 신성 왕국의 전력을 높일 수 있는 연구도 있다. 능력자의 능력 강화, 능력 발현에 관한 연구도 있어.] [그래. 네가 쓰는 칼. 이클립스에 대한 연구도 있다. 내가 하고 있었다고.]이클립스 연구라는 소리에 뚜벅뚜벅 다가서던 마루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카메라 조리개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잭 니스 박사가 절절하게 말했다.
[그 칼. 지구의 것이 아닌 건 알고 있겠지?]“본론만.”
[그건 외계에서 온 물질이야. 양자컴퓨터의 연산으로도 완전히 비밀을 파헤칠 수 없었···.]쯔걱-
검은 실선이 쭉 그어지며, 포도알 하나가 똑 떨어졌다.
통통- 강화유리로 만든 동그란 통속에 담긴 머리통 하나가 뽀규르르르륵- 거품을 물어댔지만, 투명한 영양액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연결 케이블이 잘리며 전원이 끊겨 나주연이 투약한 약이 이제야 들어간 것. 붉게 물든 영양액 속에서 발광하던 머리통이 어느 순간 뻣뻣하게 굳어갔다.
“본론은?”
어느새 다가와 포도알 하나를 썰어버린 마루가 다시 칼을 치켜들었다.
치켜든 각도를 보아 한 번에 2개를 잘라낼 것으로 예측됐다. 거의 미래 예지에 가까운 포도송이의 연산력이 도출한 결과. 잭 니스 박사는 일단 미친놈의 할 짓을 막아야 했다.
[그 칼은 단순한 무기물이 아니다.]‘다 아는 소리를.’
이클립스를 휘두르려는 찰나. 스피커가 찢어지듯 잭 니스 박사가 외쳤다.
[기술적 한계로 증명은 어렵지만, 무기물과 유기물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연산결과 확실하다! 그 칼은 어떤 의미론 살아있다고!]투두두둑-
포도 알갱이 둘이 동시에 떨어졌다. 요란한 거품 소리가 붉게 끓어올랐다.
[어째서? 어째서! 말하지 않았나? 이야기했잖아!]“고작 그게 전부?”
마루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여러 심증이 있었지만, 이클립스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산성 갈매기와 산성 쥐 때문이었다.
빌딩을 가르고 미사일을 잘랐을 때도 버틴 칼날이 유독 산성에는 취약했다. 단순히 약하기만 했다면 내식성이 약한 금속이겠거니 넘어갔으련만. 산에 손상된 부분에 피딱지가 앉은 건 뭐란 말인가?
[영상 분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직접 연구할 수만 있다면 양자컴퓨터를 통해 새로 연구 기자재를 설계해서···.]픽- 치이익-
무언가 연결이 끊기는 느낌과 함께 통신이 HUD 옆에 있는 안테나 선이 사라졌다. 김 양이 양자컴퓨터와의 연결을 끊은 것.
전파차단기를 가져가라고 했더니, 꽉꽉 챙겨서 갔는지 무선 통신이 완전히 먹통이 됐다. 양자컴퓨터와 연결이 끊기자 잭 니스 박사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것.
[안 돼. 안 돼! 안 돼!! 이건 아니야!!!] [끊은 건가? 연결을 끊은 거야? 가상현실은?] [연구 자료는? 내가 만든 세상은! 그 모든 것을 전부 버릴 셈인가?]양자컴퓨터와 잭 니스 박사가 연결된 상황에서는 기순의 정보를 포도송이에 밀어 넣을 수 없었다. 포도송이들 대부분이 잭 니스 박사였기 때문이었다.
우웅-
[이건 나야. (모두 나야.)] [내가 신세계를 만들었고. (우리가 신세계를 만들었고.)] [우리가 곧 세계야. (내가 곧 세계다.)] [너희가 양자컴퓨터를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잡종과 너희 알량한 해커 따위가, 더러운 창녀 같은 인공지능이 내 세상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어.”
[그 세상도 실존하는 세상이란 말이다!]짧은 대답과 함께 마루의 칼질이 시작됐다.
담담하게 휘두른 칼날이 포도송이에 달린 포도알을 수확했다. 똑-똑-또그르르- 굴러다니는 동그란 저장장치가 알록달록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연구실은 바닥은 어느덧 붉게 익은 포도알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알맹이가 전부 떨어져 앙상하게 변한 포도송이 중심에 남은 둥근 유리병에는 뇌가 둥둥 떠 있었다. 생체단말기 오리지널이었다.
잭 니스 박사의 본래 뇌가 담긴 뇌둥둥 생체단말기에 보글- 물방울 하나가 맺혔다.
이어 잔잔했던 유리관 속에서 거품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전지했던 자신이 서서히 평범한 한 덩이 신경망으로 영락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뽀규르르르르륵]포도송이로 이어진 병렬연결이 끊어지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자신, 혹은 자신들. 칼잡이는 가상현실이 단순한 가상현실인 줄 알고 있었다.
저주하리라.
내가 만든 모든 것에 저주가 깃들지니
너희는 결코. 신세계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리.
[뻐규르르르르르-]이제 달랑 본체만 남은 잭 니스 박사. 스피커와의 연결도 끊겨, 예전처럼 거품만 일으키는 뇌둥둥 생체단말기 앞으로 간 마루가 칼끝으로 투명한 유리통을 통통 노크하듯 두들겼다.
그에 반응하듯 모니터에 깨진 글자들이 우수수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모습. 그 대부분이 애원과 저주가 뒤섞인 질척질척한 내용이었다.
기순이가 배신할 거라는 것을 시작으로 권력은 마약과 같은 것이니 언젠가는 반드시 뒤통수에 총알을 맞을 것이라는 둥, 삐뚤어진 애정은 결국 질투와 증오를 낳고 남은 것은 후회와 피폐, 자멸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단언까지.
예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주.
뇌리에 불신과 불안을 심어 놓으려는 수작이었다.
그 모든 것을 담담히 넘긴 마루가 이클립스를 휘둘렀다.
강력한 정신파가 베리어처럼 떠올랐지만 이클립스를 막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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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무엇인가가 구현됐지만, 그 위에 검은 실선이 그어졌다.
뇌둥둥 본체를 검은 실선이 지나가자, 어슷하게 썰린 용기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회백질 내용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붉게 빛났던 카메라 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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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엔피 마루는 가슴과 오른팔을 매만졌다.
헉- 헉-
그러니까 분명 자신은 죽었다. 심장이 꿰뚫리고 오른팔이 도려져서. 그 생생한 감각이 꿈이었다고? 그럴 리 없었다.
그럼 지금 이건 뭐지?
짝- 자신의 볼을 때려봤지만, 생생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탁상시계를 바라보니, 죽기 며칠 전이었다.
첫 괴인을 죽인 다음 날이었다.
(회귀한 건가?)
예지몽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감각과 환상통.
엔피 마루는 회귀했다고 판단했다.
놈의 마지막 일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고통과 함께 엔피 마루의 머릿속에 떠오른 환상과 같은 무엇. 그것은 신의 섭리였다.
[악마를 봉인해라.]뇌사 상태를 만들거나. 강력한 수면제, 마취제를 사용해 영원히 잠에서 깨지 못하게 봉인하라는 계시.
엔피 마루는 그게 사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취제. 수면제. 아주 독한 거로. 뇌사가 되더라도 상관없어.”
이 불길함을 끊어낼 방법은 오직 그것을 봉인하는 것뿐.
알 수 있었다. 그 계시가 진실이라는 걸.
그렇게 악마를 봉인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허공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아- 정말이었군요. 박사가 조작해놨었네요.]엔피 마루는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었다.
(나주연?)
그년이 왜?
아니. 어떻게 목소리가 허공에서···.
일순. 무언가 이상했다.
세계가 뒤틀리는 것 같은 불길한 감각에 엔피 마루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게 금이 간 하늘.
저 멀리 어두운 빛으로 뭉개지기 시작한 공간, 세계는 깨진 질그릇 같았다.
붉게 물들었다 싶었던 달이 어느새 시리도록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 파란 달빛 아래, 세상은 거짓이었다.
(하? 빌어먹을···.)
나주연은 엔피 마루의 말풍선을 보면서 감탄했다.
“정말이었네요. 잭 니스 박사가 가상현실에 코드를 심어놨어요.”
“그래.”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마루.
증거가 있다면서 접속해서 확인하라고 했을 때부터 찝찝했었다. 들어갔다면 가상현실 속에서 뇌사가 됐거나, 수면제 마취제를 맞아 영원히 봉인됐을 것.
“박사가 건드린 부분은 전부 없앴으니 그만할까요?”
“아니, 전부 갈아버려.”
“네? 전부요?”
“사실상 박사가 만든 가상현실이야. 저거 말고도 또 뭔가 숨겨둔 수가 있을지 모르니 아까워도 모조리 갈아엎어.”
나주연은 절망했다. 가상현실 한쪽에 마루궁을 세워 놓았는데, 모조리 갈아버리라니.
“그 기순 씨 치료하려면 가상현실이 필요한데요? 갈아버리면 어디에 복사를 하려고요. 뇌 배양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저온수면 성공했다면서?”
그러니까 기순이는 일단 얼려놓고 보자. 저온수면 시켜 놓으면 따개비와의 융합이 늦어질 터. 그렇게 시간을 번 뒤, 가상현실을 다시 만들자는 이야기.
“기. 기술이 없어요. 전 그쪽 관련해서는 잘 모르고. 그리고 포도송이도 전부 그렇게 돼서 정보를 추출해봤는데 소실된 부분이 많았어요.”
마루가 포도송이를 완전 작살 내버리면서, 물리적으로 잃어버린 정보가 많았다. 남은 정보로 완벽한 가상현실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걱정스러움을 품은 나주연의 반대에 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그쪽 분야 전문가가 있으니 그냥 지워.”
어쩐지 점차 서늘하게 변하는 마루의 눈빛을 견디지 못한 나주연이 눈물을 머금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뒤, 다급한 목소리가 연구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완벽한 가상현실이라고요? 어딨죠? 지금 작동할 수 있습니까? 제가 써봐도 되나요?”
뉴포트 뉴스 조선소를 관리하던 제니아 로든. 그녀가 가상현실 이야기를 듣고 바로 달려온 것.
“접속기는 어디 있죠? 안전장치는 어떤 방식인가요? 물리 엔진은 어떻게 구현했습니까? 아? 양자컴퓨터를 썼군요. 그래도 양자컴퓨터만 가지고는 어려운데.”
몸이 달아올라 속사포를 쏟아내는 후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루가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있었는데, 없어졌군.
머쓱-
여기 흔적과 잔해가 좀 남았으니, 이걸 응용해서 네가 만들어 보련?
후드의 동공이 흐릿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