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55)
러스트 [RUST]-555
심은영의 손가락이 딱 멈추는 것과 동시에 마루의 몸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흐윽-
따개비 융합체가 아닌, 이제는 순정 기순인지라 마루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심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더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보세요. 들어보죠.”
“할 이야기라. 가짜한테 이야기?”
마루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살짝 이가 드러났다.
“뭐라고요?”
무슨 소리냐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지지 못했다.
“뒤로!”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이기영 부장이 마루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나오려 했지만, 마루의 칼질보다 빠를 순 없었다.
콰드드득!
수직으로 그어진 검은 실선.
책상이 두 쪽이 나는 것과 동시에 바퀴 달린 의자를 뒤로 밀어 칼날의 거리에서 피한 그녀였지만, 마루의 수직으로 떨어졌던 검격이 바닥을 긁고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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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뱀처럼 좌우로 꿈틀거리는 찌르기가 그녀의 머리통을 덮치려는 순간, 어느새 앞으로 튀어나온 이기영 부장이 날카로운 칼날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칵- 카카카카각—-
이클립스가 닿은 이기영 부장의 소매가 산산이 찢어지며 거무스름한 건틀릿(Plate Gauntlet Glove)이 존재감을 내뿜기 시작했다.
턱.
한 걸음과 함께 시작된 이기영 부장의 타이슨 드릴.
초근접으로 거리를 좁힌 그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싶더니 시야 밖 사각에서 마루의 머리를 향한 훅이 날아왔다.
거무튀튀한 철거용 철공이 용수철에 튀어 오른 것처럼 묵직한 일격.
철판을 뚫을 정도로 위력적인 철완을 칼손잡이로 절묘하게 막은 마루가 그대로 팔을 내렸다.
초고속 연타로 마루의 간장을 노렸던 이기영의 주먹이 마루의 팔꿈치에 막히는 소리. 으직- 팔뼈에 금가는 소리에도 마루는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박치기.
!!!
둔탁한 충격으로 한 발자국 뒤를 밟은 이기영 부장이 그 반동을 이용해 스트레이트를 날렸지만, 이미 정면에서 사라진 마루.
“빌어먹을!”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내뻗은 탄력으로 허리를 회전시킨 백-스핀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렇게 길게 늘어난 시간에서 마루는 이제껏 진 적 없었다.
거무스름한 건틀릿과 검은 색 이클립스가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스피닝 백 피스트(Spinning back fist)로 휘둘러진 건틀릿을 교묘하게 피한 이클립스가 이기영 부장의 어깨 어림을 분리했다.
???
그건 마치 본래 그렇게 썰려있던 것처럼 깨끗하게 분리된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리 하나 없이 절단한 칼날이 이기영 부장의 목덜미 앞에서 우뚝 멈췄다.
그제야 어깨 절단면에서 튀는 핏방울.
핏-
서서히 옆으로 돌린 마루의 눈이 향한 곳은 기순이 있던 자리였다. 어쩐지 엎어져 있는 기순과 마루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 씨발- 미안”
기순의 관자놀이를 지긋하게 누른 하이힐 위로 이어진 아찔한 곡선미가 있었다.
그찍-
그 쭉 뻗은 종아리에 살포시 힘이 들어가자, 금속제 힐이 기순의 관자놀이를 살짝 파고들었다.
끄-
합 다물었던 기순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새 나왔다. 주르륵- 흘러내린 핏방울이 기순의 얼굴 옆선을 타고 흐르자, 마루의 칼날도 이기영 부장의 목덜미를 살짝 파고 들어갔다.
!!!
붉은 정적이 이어지고 잠시, 기순의 머리통을 밟은 채 심은영이 말했다.
“이기영 부장님 팔 들고 이쪽으로 오세요.”
이기영을 향한 말을 마루가 받았다.
“거기 기순이 머리에서 발부터 치워.”
힐끗 기순을 내려본 여자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촉수는 어떻게 된 건가요?”
“보면 몰라?”
머리를 짓누르는 고통에도 대거리한 기순이었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그런 불합리한 선택이라니. 어설프군요. 기순 씨는 그래도 합리적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녀의 말에 마루가 다시 한 번 경고했다.
“발 치워.”
“아- 그리고 어떻게 알았죠? 대역이라는 걸.”
진짜 심은영이었으면 기순이도 견디지 못하는 살기를 견뎠을 리 없었다. 살기를 견뎠다는 점에서 대역. 아니면 심은영도 변했다는 것. 둘 가운데 하나.
그 신중한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변이를 선택할 리 없었으니, 소거법으로 대역. 그래서 마루는 즉시 선공했다.
근데 예상보다 대역의 순발력이 엄청났다. 그 일격을 피하다니. 게다가 오랜만에 본 이기영 부장의 능력도 몇 배나 업그레이드된 상태였고.
마루가 대답하지 않자, 심은영 대역이 기순의 관자놀이를 찍어 누르던 힐을 살포시 떼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죠. 숙녀에게 칼질부터 하다니···.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기순이 데굴데굴 굴러 그녀의 발밑에서 떨어지자, 마루도 이기영을 겨눈 칼을 거뒀다. 이기영 부장이 바닥에 떨어진 팔을 들고 성큼 옆으로 지나가며 마루를 노려봤다.
잘린 단면에 팔을 대는 것과 함께, 치이익- 하얀 거품과 피어오르는 연기. 삽시간에 붙은 팔을 휙휙 돌리는 이기영 부장의 모습에 기순이 입을 떡 벌렸다.
“저게 뭔···.”
기순의 감탄사에도 마루의 시선은 이기영이 아닌, 심은영 대역을 향해 있었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첫 일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수직으로 얕게 그어진 상처가 실시간으로 아무는 모습. 가슴골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던 칼질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너도 약 발라.”
“어. 그래.”
기순이 급속치료제로 관자놀이에 파인 상처를 치료했다. 문밖에서 느껴지는 움직임들. 마루의 감각에 옅게 느껴지는 흔적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상처가 전부 아문 대역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곳은 전부 포위됐어요. 마루 씨라면 모르겠지만, 기순 씨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어쩌시겠어요? 친구를 버리고 도망치려고요?”
‘도망?’
마루의 웃음이 짙어졌다.
“야. 기순아. 너 그 몸에 정 많이 들었냐?”
“아- 돌아버리겠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해라.”
기순은 우황청심환 비슷한 액상형 강심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쓴맛과 함께 순식간에 진정되는 기분.
역시 약은 나주연이 끝장나게 잘 만들었다. 뭔 약을 양자컴퓨터+포도송이보다 뚝딱 만드는지. 어지간한 약은 당일치기로 뽑아 버렸다.
마루의 살기에 아군이 심장마비로 죽는 걸 방지하기 위한 약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있을지 몰라 챙겨오긴 했는데 진짜 쓰다니.
염병.
기순이 어쩐지 모든 것을 해탈한 기분이었다.
그래 ‘마음대로 하시오.’ 표정이 저절로 지어졌다.
그 결연한 모습을 본 대역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생명이 걸려있는데 죽어도 좋다는 반응이라니?
마루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죽으면 복수는 해줄 게.’ 같은 분위기이라고 할까?
받은 자료와는 전혀 다른 행동 패턴이기에 마음대로 하기 곤란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하에서 보자고 했을 텐데요.”
“지하에서 보자고 했으면 애초에 들어가지 않았겠지.”
마루 특유의 살기가 공기를 서서히 짓누르기 시작하자, 대역이 한쪽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팔을 쭉 뻗어 손바닥을 보인 그녀가 벽면에 붙은 모니터를 켜자, 심은영의 얼굴이 화면에 있었다.
[···거기까지 하지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죠? 국왕이 됐다고 하더니, 사람이 정말 많이 변했군요.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짓이 칼 들고 협박이랍니까?]심은영의 비난에도 마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데 포위할 준비 해놓고, 대역 박아 넣은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남의 집에 와서 경우 없이 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심은영의 말에 기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든 남부연맹이든 대놓고 접촉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대응 준비를 했다는 건.
‘아직은 어딘가 줄을 대지 않았다는 뜻 같은데?’
‘아직은 모르지. 저번 일본에 보냈을 때도 대역이었으니까.’
마루와 기순이 눈빛을 교환했다.
“저 두 사람을 보니, 급속치료제를 이용해 한 단계 더 나간 것 같던데. 안정성은 확보하고 써먹는 건가?”
[-지금 샬롯의 능력을 의심하는 겁니까? 정말 무례해졌군요. 당신.] [아니- 혹시 애초에 트집 잡는 게 목적이었나요?]모니터 속 심은영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숨 걸고 트집이라. 이상하군요.] [아- 설마 당신들 나주연, 오진의 나 회장에게 당한 건가요?]무언가를 떠올린 그녀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제가 당신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거로군요. 왕국을 암중으로 장악한 나주연이 당신의 죽음에 복수하겠다면서 양지까지 장악하려는 속셈이었군요?]기순이 마루를 바라봤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하지?’ 근데 그럴 법한 생각이라 뭐라 파고들 틈이 없었다.
[중화제. 가지고 있지요? 한 번 써보세요.]마루의 오버히트를 진정시켜주는 약이었지만, 본래는 버서커 폴 때문에 생긴 부작용에 쓰는 약이었다.
‘어이없군. 어쩔까?’
‘어쩌긴. 방법이 있겠냐?’
눈앞에 있는 대역이 심은영 본인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본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기순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자, 마루가 중화제를 투약했다. 근육이 달아오르기 전에 써서 그런지 서늘한 느낌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자 말해보세요. 왜 온 거죠? 누가 보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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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턱도 없었다. 상상이든 예상이든 기존의 정보를 훌쩍 넘은 살상력이었다.
안전한 곳에 있던 심은영이 위축감을 느낄 정도였다.
강화에 강화를 거듭한 이기영 부장의 팔이 떨어졌을 때 어렵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했던 건 마루의 태도였다.
대역이 기순의 머리통을 으깰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다니 진짜 사람 새낀가 싶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흔들림 없는 살기. 이제는 칼잡이나 용병이라고 부를 게 아니었다.
그 깊게 침잠한 눈동자가 CCTV 화면 너머 숨어있는 자신을 노리는 것 같았다.
기순이를 죽이려면 죽여라, 다 죽여주마.
저 눈깔이 정상인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게 분명했다.
어지간하면 서로 합의점을 찾아보자고 협상하거나, 최소한 친구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고 하거나 하지 않나? 대충 그런 반응이 일반적인 게 아니던가?
그래서 자신할 수 있었다.
오진 그룹 나주연이 약으로 장난질 친 게 분명했다.
그런데.
분명히 그랬어야 했다.
그래서 중화제로 확인까지 했는데.
아니라고?
그럼 저 눈깔이 생이라고?
나주연 때문이 아니면?
[···급속치료제. 원료 재고가 있다면, 그것까지만 만들고 레시피를 비롯해서 전부 폐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이유가 뭐죠?”
기순이 마루를 대신해서 설명했다.
[솔직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누님도 알지 않습니까?]“그것과 레시피를 파기하라는 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게 정상적인 레시피입니까? 아니잖아요. 사람을 갈아 만드는 레시피 아닙니까? 정상이 아니죠. 그거 들고 있다가 정보가 새기라도 하면 전부 뺏기고 공공의 적으로 몰려 마을 사람들 전체가 화를 입게 될 겁니다.]“흥- 어디서 정보가 샌다는 거죠? 여긴 전부 제 식구들이고, 생사를 같이할 사람들만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걱정해 줄 정도로 친했나요? 그래서 칼 들고 협박하는 겁니까? 레시피 파기하라고? 기순 씨. 지금 하는 이야기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기순에게 톡 쏜 심은영을 향해 마루가 피식 웃었다.
[정신계 능력으로 털리는 건? 정신계 능력이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지. 그쪽도 약을 쓰든 미인계를 쓰든 산업스파이 짓을 해봤을 테니 알 텐데. 아닌가? 제국이나 남부연맹 모두 고문, 심문 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작자들인데 정보가 안 새나 가리라 자신하는 건가? 진심으로?]“그래서 요점이 뭐죠”
[급속치료제에 대한 정보가 퍼지는 순간. 샬롯과 관계된 자들은 전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생체실험체로 전락하겠지. 솔직히 그쪽이 통나무가 되든 말든 상관없다만, 그 레시피가 어느 쪽으로 가든 내가 뺑뺑이 칠 것 같아서.]“그게 무슨···.”
심은영이 뭔가 말하려는 것을 잘라버리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마루.
[그 기술이 제국의 능력자와 클론에 접목된다거나, 남부연맹의 식인귀, 늑대인간, 흡혈귀와 결합한다고 생각해보면 그냥 jott-같다고.]심은영은 마루의 돌직구를 맞고 어질어질했다.
이딴 게 대화? 이런 폭언을 듣고 있어야 하나?
“어이없군요. 정말. 그래서 레시피를 파기하지 않겠다면 어쩔 건가요?”
[어쩔 거냐···?]마루의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이 모니터를 통해 생생히 전달됐다.
[당신을 찾아내겠지.]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고 말이야.]마루의 시선이 이기영 부장과 대역을 향하자, 심은영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그러겠다는 말이죠?”
[어쩐지 더럽다. 싶은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니까.]심 회장은 빽 소리 지르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누군가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그 좆같은 이유를 하나 만들어주라고 했지.’
심은영의 온 신경이 모니터를 향했을 무렵 안가의 천장에서 사각사각 미세하게 갉아내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