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57)
러스트 [RUST]-57
짙은 연막이 서서히 흐려질 무렵, 아침 햇살이 점심을 향해 느릿하게 움직였다. 연막과 햇살 사이 조각조각들은 고요한 안식에 들어갔다.
후- 마루는 쓰고 있던 방탄 마스크를 벗었다.
처음 월드 축산에 입사했을 때가 생각났다. 단지 한 번 봤을 뿐인데, 어깨너머 봤던 해체 작업을 얼추 비슷하게 했을 때의 감각. 칼을 잡고, 해체할 것을 해체한다.
거죽 아래 비계와 살이 보이는 듯했다. 인대와 힘줄, 근막과 핏줄이 어디쯤 있는지 그냥 느껴지는 대로 칼을 대면, 그대로 해체됐다. 딱히 힘이 들지도 않았고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소든 돼지든 잡는 일이 쉬웠다. 힘은 들었지만, 잡는 만큼 월급도 나왔고 집이 그 모양이 아니었다면 나름 목돈도 모았을 것이다.
홍 과장에게 걸려 반쯤 강제로 떠난 일본, 일본 업장에서 마약을 발견한 뒤 긴장과 두려움, 초조함으로 탈출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죽음의 위기가 닥치자, 반사적으로 일본 야쿠자를 향해 칼을 날렸다. 반사적으로, 총을 잡는 어깨에 칼을 밀어 넣어 움직임을 봉쇄하고 그대로 빗장뼈를 타고 올라가 경동맥을 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당시엔 경황도 없고 생각도 없어 원인을 몰랐지만, 이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뭔가를 해체하는 재능이 있었다. 말 그대로 날것을 해체하는 재능이.
어떤 이유에선지 조금씩 힘이 세지고, 반응 속도가 빨라지고, 움직임이 민첩해진 것만이 아니었다. 그냥 보이고 느껴지는 게 전부, 해체에 특화·친화적이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 알았는데, 그러니까 갑각류 해체에도 재능이 있어 보였다.
음-
마루는 보위 나이프를 살폈다. 여기저기 이가 나갔다.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가 나간 칼을 보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클레이모어는 상태가 더 심각했다. 이것도 좋은 칼이었는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날 부분이 거의 다 깨져 따로 쓰기에는 좀 그랬다. 실실 쪼개던 녀석은 뭔가 대단한가 싶었는데 장비 빨 믿고 들이대는 방식이었다. 그냥 껍데기 좀 벗겨내니까 나중에는 엉엉 울면서 도망치려고 하더라. 뭐 도망가게 두지 않았지만.
쪼개던 놈을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쪼개려고 할 때쯤, 구석에서 구경하던 놈이 튀어나와 엉겨 붙었다. 전쟁 망치라고 해야 하나? 전투 망치라고 해야 하나? 여튼, 존나 큰 망치를 들고 덤비던 덩치 큰 새끼도 살살 껍질 좀 벗겨줬더니 호들갑 떨면서 망치를 휙 집어 던지곤, 뒤에 차고 있던 샷건을 날려 대서 피곤하게 했었다.
탄소 관련 소재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껍질은 정말 짜증 났다. 어지간한 칼질은 그냥 튕겼다. 그나마 관절 부분과 헬멧을 쓰지 않아 얼굴 머리 부분을 공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하세월 모가지 딴다고 애먹었지, 싶었다.
음-
마루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또 저쪽에서 은근한 살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아까 다가오던 놈은 실실 쪼개고 오길래 쪼개줬는데. 이번에는···. 썩소 아재? 이건 좀.
마루는 잠깐 벗어뒀던 방탄 마스크를 다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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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전무는 앞에 널린 참상을 눈에 담았다.
약쟁이들을 썬 놈이 저놈인가? 사람은 겉보기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더니, 저놈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칼질은 고사하고 회도 못 먹게 생긴 상판 아닌가? 놈은 이쪽을 살짝 보더니, 방탄 마스크를 얼굴에 썼다. 방탄 마스크는 회사에서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인데, 회사와 연관된 놈은 아닌 것 같고.
근데 정말 저놈일까? 뭔가 나사가 하나 풀린 놈 같은데? 보위 나이프를 들고 애절하게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영 긴가민가했다. 약쟁이들을 썰어 댄 놈이라면 살기를 감추지 못하고 풀풀 흘릴 텐데, 살기가 없었다. 짐승을 죽여도 살기가 남는데, 저놈은 그게 없었다.
그럼 약쟁이들을 토막 내고, 우리 애들을 킹크랩 껍질 까듯 벗겨서 해체한 새끼는 누구지?
최 전무가 지긋한 미소를 입에 담고 마루를 봤다.
“거기. 이거 자네 짓인가?”
“무슨 짓이요?”
“여기 이거. 이것들.”
최 전무가 슬쩍, 칼을 뽑아 평온과 안식에 들어간 조각들을 가리켰다.
“아 그거요.”
마루는 뭔가 대답하기 좀 그랬다. 이게, 양심에 걸린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대답하기 좀 그랬다. 막 썰어놓고 ‘이거 내가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긴 아무래도···.
“글쎄요?”
“그런가?”
무엇보다 지금 혼자인 척, 말 걸고 있는 썩소 아재, 혼자가 아니었다. 연막 저쪽에 살짝살짝 느껴졌다 말았다 하는 게 최소 2명은 더 있었다.
“그렇죠?”
“······.”
마루의 대답에 최 전무는 살짝 살기를 담아, 슬쩍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살기를 담았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움찔하거나, 뒷걸음질 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놈을 그러지 않았다. 그냥 ‘이게 뭔가?’ 하는 태연한 모습. 아무리 둔감해도 살기에는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이 정도의 살기쯤은 무시한다는 것. 이것으로 최 전무는 직감했다.
‘이놈이다.’
앞에서 봤던 도살의 현장, 지금 여기 널려있는 토막들···.
이곳에 널려있는 흔적을 보니, 그 짧은 시간에 발전했다. 칼질이 더 간결해졌고, 어디를 썰어야 치명적인지 학습하고 있었다. 이걸 학습이라고 해야 할까? 본능적으로 찾아간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놈의 칼질은 아직도 ‘무’의 영역이나, ‘술’의 영역이 아닌, ‘본능’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무술’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본능’이 아닌, ‘경험’, ‘학습’, ‘연구’의 결정체.
그리고 그 결정체를 세대에서 세대를 거처 ‘전수’하고 ‘보완’, ‘발전’ 시킨 것이 ‘무술’이자 ‘무도’였다. 그러니까, 본능에 매몰된 놈은 여기서 끝이다. 아직 본능에 머물러 있는 지금이 놈을 죽이기 최적의 순간이다. 최 전무의 심상이 완전히 살기로 변하는 순간.
탁!
타닥!
내딛는 소리와 함께 마루의 모습이 연막 속으로 사라졌다.
최 전무를 호위하던 2명은 당황했다. 집중해서 보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몸이 긴장됐다. 직원들은 서로의 사각을 보완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스윽-
그렇게 한 직원 눈앞에 놓인 것은 총구였다. 갑자기 공간이 열리듯 쑥 튀어나온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투캉! 투캉!
털썩-
“승인아!”
옆에 있던 직원이 재빨리 샷건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마루는 이미 사선 밖 연막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어디냐? 나와!”
툭!
깊게 발을 구르는 소리. 휙- 하는 소리에 샷건의 방아쇠를 당기는 직원이었다. 탕-
파앙-! 뭉쳐있던 연막이 동그랗게 텅 빈 구멍을 만들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탄피가 튀었다.
탁!
다시 발소리, 휙- 이번에는 쏘지 않고 발소리가 난 방향으로 총구를 튼 직원이었다. 발소리가 난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씨발 뭐지? 직원은 살금살금 발소리를 줄여가며 연막이 짙은 곳으로 향했다.
없어? 어디? 쎄한 느낌에 직원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뚜깡! 투깡!
최 전무는 당황했다. 여기저기 널린 흔적은 놈이 칼잡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까지 본 모든 흔적에서 총으로 덤비는 적들을 칼로 해결한 놈이었다. 근데 갑자기 총?
늘 함께한 경호원 2명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살기를 숨기고 은신하는 모습은 칼잡이라기보다, 암살자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대놓고 썰어대던 새끼가 갑자기 연막에 은신하고 통수에 총알을 박는다고?
“네놈! 근본도 없는 놈이 비열하기까지!”
“······.”
마루는 뭐래? 병신이. 그런 느낌이었다.
아까 실실 쪼개던 새끼랑 망치든 새끼도 자기들 불리해지니까 다구리에 총질까지 하던데? 썩소 아재도 딱 견적을 보니까 그럴 것 같아서, 미리미리 주변 정리를 좀 했더니 근본에 비열까지?
마루가 훗-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이이이! 비겁하고도 비열한 놈. 네놈에게 칼이 있다면 제대로 덤벼라! 네놈의 더러운 칼질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려주마!”
최 전무가 칼을 치켜세웠다. 상단. 불꽃의 자세. 이탈리아에서는 매의 자세라고 불리는 검세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투기, 짙게 깔린 살기, 검 끝에서 느껴지는 검기. 고된 단련을 거듭했다는 게 느껴지는 자세. 칼에서 느껴지는 힘이 정말이지, 마루는 감탄했다.
그래서
투캉! 투캉!
그냥 저 아저씨가 들고 있는 칼이 좋아 보였다.
최 전무는 총구가 겨눠지는 것과 동시에 몸을 숙였다. 머리가 있던 곳을 지나가는 두 발의 총탄. 유 이사를 생각하며 훈련했던 것이 효과 있었다. 총구가 겨눠지는 찰나, 엇박자로 먼저 이동하는 방법.
칼은 총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 그게 맞다. 현대는 칼의 시대가 아니라 총의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 전무는 다시 겨눠지는 총구를 보자마자 앞구르기를 하며 놈의 명치를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와- 존나.’
마루는 감탄했다. 자기한테 당한 사람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자신보다는 느리지만, 총구가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박자를 흐트러뜨리며 더 빨리 움직이니, 마치 총알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느린데, 엇박자인가? 반 박자 빠른 건가?
이거···. 마루는 피가 조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살기 위해서, 어설프지 않으려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작업하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칼을 휘둘렀다면. 지금은 좀 다른 느낌으로 칼질을 하고 싶어졌다.
푹-
명치를 향해 쭉 찔러오는 칼날.
툭-
마루가 보위 나이프로 찔러오는 칼 옆을 때려 밀어내고 슥- 대각선 앞으로 나가면서 최 전무의 목덜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마루를 향해 찔러갔던 칼날이 어느새 되돌아와 최 전무의 목덜미를 막았다.
쩌어어어어어어-
칼날끼리 충돌하며 강력하게 튀나 했더니, 마루의 칼질이 최 전무의 일본도 곡선을 타고 쭈욱- 미끄러져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허리가 텅 빈 마루, 그 공간으로 최 전무의 칼날이 깊게 들어갔다.
휙-
최 전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완벽한 허리였다. 놈의 공격을 흘려내며 들어간 허리. 근데 놈은 비상식적인 운동능력으로 칼날의 범위 밖으로 피했다. 말 그대로 짐승 같은 움직임.
‘짐승 같은 놈. 그래 와라.’
최 전무는 살짝 칼을 들어 놈을 유인했다. 짐승은 틈을 보이면 물어뜯는 법!
근데 놈은 빈틈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어쩐지 최 전무를 보면서 아쉽고도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슬쩍 들고 있던 보위 나이프를 보더니, 다시 슬쩍 최 전무를 바라보는 그 눈빛. 방탄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놈의 눈빛, 살인귀의 눈빛이라고 하기에는 느끼한.
“설마 네놈이! 이 더러운 새끼가!”
최 전무는 등 뒤가 오싹해지는 더러움을 떨쳐 버리듯 앞으로 돌격했다. 그제야 놈이 반응했다. 돌격보다 반 박자 빠른 역습.
‘이거다. 이거야.’
최 전무는 가슴부터 머리끝까지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릿했다. 놈의 운동능력을 생각할 때, 공격에 들어가면 반드시 역습할 것이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다리던 역습이 왔다.
앞으로 튀어 나가듯 쏠렸던 최 전무의 무게 중심이 우뚝- 뒤로 이동하면서 몸 전체가 뒤로 훅-밀려났다.
‘퇴격 머리!’
최 전무가 휘두른 칼날이 깨끗한 곡선을 그렸다. 최 전무의 일생에서 몇 번 없었던,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그렇게 칼날이 마루의 머리통을 향해 툭 떨어지는 순간. 마루의 머리가 푹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땅과 수평이 되듯 쑥 가라앉은 자세로 앞으로 길게 파고드는 마루.
최 전무가 날린 퇴격 머리가 허망하게 공간을 두들겼고, 텅 빈 밑으로 사라진 마루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서는 최 전무의 발등에 칼을 박았다.
끄악!
최 전무의 비명이 연막을 뚫고 허공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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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종합병원.
안지성 박사는 침을 삼켰다. 현미경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기적? 아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뇌에 직접 전극을 꽂아 넣고 전기로 지지는 느낌이었다.
정체불명의 약제가 다친 생체 조직에 닿는 순간, 상처 입은 생체 조직이 엄청난 속도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응?
안 박사는 치유된 세포 조직을 보며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한번 의구심이 생기자, 녹화된 영상을 반복해서 살피기 시작했다.
배율을 최대한 확대해서 치유된 곳을 살피던 안 박사. 찰칵- 사진을 찍어 저장한 뒤, 상처가 치유되기 전 세포 조직을 찍은 사진을 올려, 두 사진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게.”
이럴 수가.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놀라웠다. 이 약을 만든 새끼들은 분명 미친 새끼들이 분명했다.
[안 박사님, 유 이사님 호출이십니다.]“그래. 잠시만.”
[유 이사님 눈 돌아가셨던데요.]“젠장. 지금 가.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