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60)
러스트 [RUST]-60
배꼽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은 기순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칼 갈지 말라고 했지? 그럼 저쪽으로 가서 갈든가. 왜 전화하고 있는 앞에 와서 가는 건데? 엉?”
기순의 말에도 마루는 입을 꾹 다물고 칼을 길게 갈았다. 사아아아아악 하는 소리, 섬뜩했다.
“아니 진짜 뭔 전설의 고향, 기묘한 이야기 뭐 이딴 거 찍냐? 왜 그러는데 뭐에 한이 맺힌 것처럼 왜 그리 칼을 가는데.”
스으윽- 사아악-
슥삭슥삭슥삭슥삭
아- 기순은 마루의 괴랄한 칼갈이에 포기를 날렸다. 그래 넌 갈아라, 난 떡을···. 떡을···. 떡을 때리고 싶다. 퍽퍽퍽! 기순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렇게 잠시 갈고 때리는 시간이 흐르고, 호텔 샬롯에서 보낸 리무진이 도착했다.
“내가 애냐? 혼자 갈게.”
“너 진짜 괜찮겠어?”
“택배 짐도 계속 올 거고, 오늘 밤에라도 출항하려면 그래야지. 참- 김 양에게 내가 문자 보내 놓을 테니까, 김 양 딴 데로 새지 못하게 하고.”
“그거 그래도 괜찮겠냐? 그··· 킬러라며 그 여자.”
기순의 쫀 표정에 마루가 피식 웃었다.
“킬러고 나발이고 김/양 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할 거다.”
“어우야- 실화냐? 친구 새끼 살벌한 거 보소. 김/양이 뭐냐? 아오. 상상만 해도. 으-”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살벌하게, 농담이 아닌 건가? 그럼 문제인데···. 김 양과도 이야길 나눌 필요가 있었다. 이래저래 출항하고 나면 오래 같이 굴러야 할 텐데 말이다.
마루는 새로 장만한 칼과 애용하던 보위 나이프를 차고 리무진에 올랐다. 그래도 이번에는 호텔 간다고 주렁주렁 장미칼을 달고 가진 않아서 다행이다···?
아니, 잠깐. 씨발 왜 칼 들고 가는 거지?
호텔로 향하는 리무진 안
마루는 김 양에게 문자를 던졌다.
[어디에 있든, 바로 요트로 가라. 기순이 잘 지키고. 옆으로 새지 말고.]이제까지 보낸 문자 가운데 제일 긴 문자였다. 이렇게 길게 보냈는데도 제대로 알아먹지 않는다면? 흠- 지켜봐야겠지.
마루는 썩소 아재의 움직임을 복기했다. 확실히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그 아재. 나보다 느리지만 막았다. 나보다 약했는데 반격했다.
어떻게?
문득 떠오른 단어. ‘후발 선제’,
나중에 움직여서 먼저 움직인 것을 제압한다.
그거 그냥 무협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 아니었나?
중2 시절. 검도를 배웠을 때, 사범이 마루의 대가리를 목탁처럼 쳐대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거야 사범이 크고 빠르고 강했으니, 상대적으로 작고 느리고 약한 자기 대가리가 목탁이 된 거로 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재는 그 ‘후발 선제’라는 것의 일면을 보여줬다. 다음엔 확실히 이길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아재가 ‘후발 선제’를 완성해 역으로 날 딸까?
아재의 부하들도 상당히 강했다. 뭔가 현실과 맞지 않는 자들이었다. 단단한 재질의 갑옷을 입고, 근접전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라니 어딜 봐도 현대적이지는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 입고 접근전을 하는 건지. 칼질을 선호하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총을 두고 근접전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쿠크리와 맞대본 결과 쿠크리는 단순히 단도라고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려서 그런지, 원심력을 이용한 배기는 확실히 일절이었다. 전투 도끼도 만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특히 도끼 투척은 근거리에서 피하기 힘들었다. 막기도 힘들었고, 메이스와 모닝 스타도 막는 건 거의 불가능한 무기였다. 모닝 스타에 어깨가 스쳤을 땐 진짜 식겁했었다.
그렇게 죽고 죽인 결과 깨달은 점이 있다면, 자신은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축차로 덤비지 않고 서로를 보완하면서 덤볐다면? 최소한 원거리 저격과 같이 공격했다면? 너무 약한 적들과 싸워서 간이 부었는지, 위험했다.
“목적지인 샬롯 호텔 본관에 곧 도착합니다. 편안하셨는지요.”
리무진 기사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상념을 깨웠다.
끄응- 마루는 감았던 눈을 떠 밖을 봤다. 언덕을 올라 잘 관리된 공원을 지나면 보이는 샬롯 호텔은 확실히 근사했다. 근데 왜 이렇게 식은땀이 흐르지. 괜찮았는데.
리무진이 멈추자, 의사와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많이 다쳤다고 해서인지 침상까지 있었다.
“이쪽으로 누우시죠.”
아니, 괜찮다고 말하려던 마루는 갑자기 드는 오한에 엉거주춤 침상에 누웠다. 바이털 체크가 시작되고 채혈이 이뤄졌다. 이것저것 검사한 의사가 침상을 밀어, 호텔 지하에 있는 의무실로 향했다.
“지금 춥거나 오한이 들지 않습니까?”
“예. 좀.”
“맥박도 그렇고, 정밀진단이 필요해 보이지만, 제 소견으로는 아무래도 사이토카인 폭풍 같습니다.”
“예?”
“혈액에 백혈구 수치가 높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면역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일단 바로 검사 들어가겠습니다.”
어- 잠깐 칼은 그냥 옆에 두고 싶은데···.
======
======
“맥박 증가, 처음에는 심박출량 증가, 이후 심박출량 감소, 고질소혈증, 높은 아미노 전이 효소, 과다출혈, 정상보다 높은 빌리루빈 수치를 볼 때, 사이토카인 폭풍이라고 보입니다.”
의사의 말에 심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에 문제는 없겠죠?”
“예, 늦지 않게 치료를 시작할 수 있어서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호텔 샬롯의 중요한 손님이니 잘 부탁드려요.”
“예.”
심은영은 마루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김에 이기영 과장에게 들렀다.
이기영 과장은 배가 뚫리고 오른쪽 어깨와 팔뚝에 9mm 탄환이 박히고 스쳐 상처가 심했다. 중요한 장기가 다치지 않아, 위급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족히 4주에서 6주는 정양을 해야 할 판이었다.
언제 서울 본사에서 작업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기영 과장 같은 사람이 누워있는 건 손해였다. 물론 이걸 쓰는 것도 손해긴 하지만, 본사와의 항쟁에서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말아야 했다. 최소한 독립, 분사까지는 해야 수지에 맞는 상황.
지면 들고 있는 것도, 심은영 자신의 목숨도 날아갈 판이니 쓰는 게 맞았다. 심은영이 의사에게 앰플 하나를 꺼내 주며 말했다. 투명하고 약한 핑크빛이 나는 앰플.
“전부 사용하지 말고, 배에 난 상처 부위에 바늘로 조금씩 투여하도록 하세요. 등의 총상에도 아주 조금씩 투여하면서 진행을 확인하도록 하고요.”
“환부에 직접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의사가 조심스럽게 이기영 과장의 환부에 앰플을 투여했다. 핑크색 약액이 환부에 닿자, 마치 소독약을 뿌린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얗게 끓어오른 거품을 거즈로 닦아 내자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것처럼 매끈한 피부가 드러났다.
헉-
의사는 숨이 막혀, 헛숨을 들이켰다.
이건 기적이다. 이 약은 기적의 약이다. 이건···. 이건 지금까지 외상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꿀 약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노벨상감이었다.
이런 약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이것만 있다면 사고로부터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앰플을 쥔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다면 자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가 심은영의 눈과 마주쳤다. 은은한 미소와는 달리 무기질적인 심은영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손에 쥔 앰플. 자기도 모르게 꽉 쥔 앰플.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내가 무슨 생각을···.’
심가의 가신으로 3대째 살아오고 있던 의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정상적인 약이라면 심가에서 공개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과만 본다면 무조건 노벨상 아니던가? 심가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정상적인 약을 만들었다면 과연 공개하지 않았을까? 일본에서 했어도 막대한 명성과 이익을 얻었을 것이고, 한국에서 했다면 한국 최초의 의약 계열 노벨상이었다. 이 또한 막대한 명성과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약이 심가의 음지와 관련된 약이라는 소리였다. 죽는다? 입막음 당한다? 왜 내게 이런 약을 보여줬지? 의사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심은영이 입을 열었다.
“민 선생님, 선생님의 민씨 가문이 심가를 3대 아니, 따님인 민영화 씨까지 한다면 4대째 따르고 있지요?”
“네. 그···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여드린 겁니다.”
일종의 포상이지요. 신뢰한다는. 작게 속닥인 심은영의 눈꼬리가 학의 날개처럼 곱게 휘었다.
‘그러니 절 실망하게 하지 마세요.’
민 선생은 그 말이 더 무서웠다.
======
======
이기영 과장은 몸이 가뿐했다.
분명히 중상이었는데, 치료를 잘 받아도 4주, 아니 6주는 걸릴 정도의 상처였다. 칼침 맞아본 경험에 의하면 그랬다. 근데···. 붕대로 칭칭 감겨 있어야 할 배에 붕대가 없었다. 슬쩍 환자복을 열어보니, 매끈한 배가 보였다.
“씨발-”
욕설이 절로 나왔다.
‘이게 뭐지?’
치료됐다는 기쁨보다 식은땀부터 배어 나왔다. 비현실적인 상황 칼침 맞아 관통된 곳이 흔적 하나 없이 매끈해졌다는 게 정상인가? 이거 영환가? 특수분장? 농담이라면 지나쳤다. 악몽이었나? 너무 현실적인 악몽에서 깬 건가? 그럼 병원복은 뭔데?
[이기영 과장님 사장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오래 걸리십니까?]“아니. 바로 올라간다고 전해드려.”
[알겠습니다.]‘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아무래도 새로 모시기로 한 여사장님은 비밀이 많은 것 같았다. 여자의 비밀은 무죄라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세력들이 이런 걸 안다면? 그냥 둘까? 관련된 모든 게 공중분해 될 거다.
‘담배를 괜히 끊었어.’
태어날 때부터 그랬지만 쉽게 살긴 그른 인생인가 보다. 이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몸은 괜찮은가요?”
“예. 너무 괜찮아서 놀랐습니다.”
심은영의 눈꼬리가 휘었다. 이기영은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긴장됐다. 긴장되지만, 물어봐야 할 건 물어봐야 했다.
“사장님. 저, 제···.”
“과장님께 상처를 급속으로 치료할 수 있는 특수한 약을 썼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양이 많지 않고, 다시 구할 수 있을지 어쩔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기영 과장님에게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썼어요. 그에 관한 질문이나 이론은 받지 않겠습니다.”
먼저 치고 들어오자 이 과장은 선빵 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그렇다는데.
“어- 네.”
“늦은 시간인데도 과장님을 호출한 이유는 이 사람 때문이에요.”
CCTV 화면에는 병상에 누워 잠들어 있는 마루의 모습이 있었다.
“그 사람 아닙니까?”
그거였다. 근데 그게 왜 우리 호텔에?
“이 과장님이 치료받는 동안, 저한테 연락이 와서요. 우리를 적대하지 않기로 하고 호텔 샬롯의 예우를 받기로 했습니다.”
아- 다행이다. 최소한 저거랑 부딪칠 상황은 오지 않을 테니. 그런데 왜? 이기영 과장의 눈빛을 읽었는지 사장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팔다리에 입은 자상의 치료를 요청하더군요. 그래서 치료를 시작했는데, 면역 반응이 과도하게 일어나서 시간이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치료를 담당한 민 선생님이 이상한 걸 발견해서요.”
심은영이 서류를 이 과장에게 내밀었다.
이 과장은 묵묵히 서류를 받아들고 살폈다. 전문용어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이해하는 데 무리 없었다.
“이게 사실입니까?”
“지금 혈액검사, 세포 검사를 한 결과를 해석하면 그겁니다.”
이건, 저거의 약점이다.
결정적인 약점.
======
======
그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내 몸이 몸 같지 않다.’라는 흔한 표현이 현실이 될 때의 느낌? 열이 오르락내리락했고 땀이 났다 말랐다 엉망이었다. 입안은 바싹 갈라졌고, 물을 마셔도 촉촉해지지 않았다.
마루는 반사적으로 칼을 찾았다. 보위 나이프가 아니면 아재 칼이라도. 병실 문 옆에 놓여 있는 칼.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뭔가 길게 뻗은 손가락 끝에 닿지 않는 칼. 아-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똑똑
마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거두고 누웠다. 칼이, 그래 칼이 필요했다. 심장이 어쩐지 빨리 뛰었다. 호흡이 옅게 잦았다. 옅게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좀 괜찮으신가요?”
호텔 사장의 목소리. 정갈하고 묘하게 성우 같은 목소리. 마루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긴 생머리에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사장이 보였다. 그 뒤에 시립 한 두 사람. 이 과장은 뭔가 불만인지 약간 굳어있는 표정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무표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답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루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사장의 뒤에 선 두 사람이 마루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언제든 반응할 것처럼 긴장했다. 그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불발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쓴 표정을 삼킨 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힘드시더라도 지금 제가 하는 이 이야기는 들어야 합니다.”
‘저도 힘들게 결정하고 하는 이야기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니까.’
사장의 작은 목소리에, 마루의 시선이 닿지 않는 칼을 향했다가 사장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