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603)
러스트 [RUST]-603
요란하게 재촉하는 사이렌이 잠잠해진 거리, 눈이 쌓인 인도엔 인기척이 없었다.
‘아- 아- 아-’
정신파를 이용해 4호와 18호를 향해 신호를 보내봤지만, 먹통. 본체를 대역하겠다는 4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연결되지 않았다.
‘지가 본체인가?’
정신파에 민감한 년에게 본체 대행을 하라고 했더니, 지가 본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년은 그렇다고 치고 ‘곧 뒤따라 갈 테니 먼저가.’ 라는 어쩐지 미묘한 말을 남긴 18호도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금방 온다더니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뽀득뽀득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던 13호는 벤치에 앉았다.
요망한 사(死)다리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인지 다리를 쉬고 싶다고 할까? 그래 이건 다 요망한 사다리 탓이었다.
나. 좀 쉬었다가 간다.
빨리 가는 게 좋지 않겠어?
함정인지 아닌지 빨리 확인해야지.
벤치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클론이 버럭 정신파를 발산했다.
함정이라고 치자. 빠져나가려면 어두워졌을 때 튈 거 아니야? 어차피 밤 될 때까지 있을 거면서 뭘 빨리 가래?
······.
아니. 궁금해서 그랬지.
······.
정신파는 신기했다. 중요한 상황에서는 어쩐지 서로 잘 연결되는 것 같은데, 소소한 일상에서는 감도가 많이 떨어졌다.
지금도 정찰이라는 ‘작전’ 관련이니 깨끗하게 연결됐지, 아니었으면 기분 정도나 전달됐을 게 분명했다.
아- 아- 아- 정신파 테스트-
이것 보라. 다들 소식이 없는 거.
머릿속에 떠오른 정보로는 ‘군용’이라서 그런 것 같다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본체의 몸뚱이야말로 군용에는 적합하지 않은 몸뚱이 아니던가?
시청으로 불러낸 것이 함정이라면 지금이 마지막 자유가 되겠지. 그러니 짧은 시간이라도 이럴 자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몇 개월의 삶이란, 짧고도 짧았다. 절반은 훈련 나머지 절반은 본체의 지휘에 갈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기억뿐.
‘어린 시절이란 뭘까?’
‘생산 준비 기간? 작전 훈련 기간?’
클론들은 일정 크기로 키운 뒤 출고됐기 때문에 어린 시절이랄 게 없었다. 특수 작전으로 써먹을 이유가 아니라면 18세 정도로 성장한 신체로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어린 시절 본체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신기하고도 기분이 이상했다. 정보가 적은 클론이 보기에도 어딘가 옳지 않은 본체였지만, 본체의 어린 시절에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오래되면 상하는 건가?’
꾹꾹. 벤치 옆에 있는 눈을 밟아 누르던 클론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눈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조각난 기억이지만, 어린 시절 본체의 기억은 좋은 기억이었다. 잠깐의 행복 그리고 긴 불행. 본체의 정보에 따르자면 돈의 유무가 행복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돈이 많았을 때 본체는 부족함 없이, 즐겁게 살았고, 파산해서 돈이 없어지자 빈곤하고, 힘들게 살았다는 정보.
인간답게 산다는 건 돈의 유무인가?
근데, 몇 개월 살지 않았지만 돈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었는데?
흐응-
먹고 입고 쉴 곳 있으면 그만이었다.
솔직히 여기저기 고기 방패 대용으로 끌려가지만 않아도 살만한 생이지 않나?
?
푹푹- 눈을 밟던 13호의 발이 순간 딱 멈췄다.
···!
어느새 그녀의 곁에 누군가 있었다.
발소리도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클론은 허리춤에 있는 총으로 슬그머니 팔을 움직였다.
“잡으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손 떼.”
여자의 목소리에 힐끗 옆을 돌아본 클론. 바로 옆에 앉은 여자를 제외하고서도 이미 포위된 형국이었다.
나 포위됐어.
잡혔어?
그러니까 빨리 가라고 했잖아.
아아아-
우리 사다리 또 타야 해?
정신파로 아우성이 들려왔다.
자폭하려고?
자폭 멈춰.
기다려봐.
갈 거면 뭐라도 건지고 가.
어쩌다가 포위됐는데?
기척이 없었어.
혹시라도 죽으면 복수해 줄게
어디서 본 사람인 거 같은데 잠시만.
문제는 포위하고 있는 여자들의 얼굴이 어딘지 익숙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기억의 파편 속 비교적 선명하게 있는 얼굴이라는 것.
U+ 같은데?
클론 선배들?
전원 탈주 클론 신화를 쓴 선배들이잖아.
그분들 도망친 곳이 신성 왕국이었어?
순식간에 복작복작 끓어오르는 정신파.
함정이 아니었나 보다.
신성 왕국 좋아.
역시 오라버니.
?
바짝 긴장했던 13호가 방긋 웃었다. 실로 놀라운 같은 태세 전환.
“U+ 프로그램 선배님들 만나서 영광입니다. 신형 블러디 메리 프로그램 13호라고 합니다.”
척- 거수경례하는 13호 클론을 링크를 통해 본 유희연은 어이가 없었다.
======
======
유희연이 동시에 접속 관리 가능한 클론 숫자는 모두 넷. 예전에는 셋이었지만, 능력이 발전하고 있었기에 숫자가 하나 더 늘었다.
클론과 링크하는 것을 자제했더니, 그렇게 되면 클론들의 자아가 형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투 관련 기억만 있어서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는 건 어렵다고 하더라.’
연구원들과 마루가 떠나기 전에 해준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클론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려면 어려워도 번갈아가면서 링크를 해주는 게 좋아.’
링크를 통해 자아가 조금씩 쌓인다고 하는데, 그렇게 쌓인 자아는 희연 자신과 거의 비슷한 자아를 갖게 되는 거 아닌가?
희연은 그게 싫었다.
클론들의 자아를 자신이 뺏는 것 같기도 했고, 링크라는 능력도 클론의 자유의지를 뺏는 것 같아서 쓰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희연에게 마루가 캐나다로 가라고 했다.
‘새로 태어난 애가 너와 클론에게 정신 간섭을 하려고 한다는 게 밝혀졌다. 그러니 기순이와 같이 캐나다로 가라.’
총독이 된 기순과 같이 캐나다로 가는 게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직접 듣고 보니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든 희연이었다.
캐나다에 도착한 뒤에도 특별히 하는 일도 맡겨진 일도 없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며칠이나 지났을까?
‘다들 이렇게 있지 말고 일하자.’
희연의 말에 대답 없이 따르는 클론들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클론들과 같이 이런저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장 순찰을 시작으로 다양한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나중에는 오타와 인근 숲에서 숫자를 불리고 있다는 쥐떼를 토벌하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기순이 그녀를 긴급호출했다.
‘비상사태다. 여기 자료를 읽은 뒤 즉시 출동했으면 좋겠다.’
무슨 오라 같은 게 피어오르는 듯한 가느다란 실눈의 압박에 희연은 고민할 생각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기순 총독이 건넨 자료에 따르면, 제국에서 블라디마루 칼린 국왕 폐하의 여동생을 베이스로 클론을 만들었고, 그 클론이 몬트리올로 탈출했다는 정보였다.
‘제국군 추격부대의 출입을 막고. 제국 특사도 잘 돌려보냈지만, 무슨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확보했으면 해.’
희연은 클론들과 즉시 몬트리올로 떠났고, 도착하자마자 몬트리올에 있는 까마귀를 총동원해 수색한 결과 13번 클론을 찾게 된 것이었다.
하나를 찾자, 정신파를 이용했는지 나머지는 알아서 나왔다.
“선배님들 집단 탈출은 정말 대단하셨어요.”
“선배님들 덕에 저희는 생체칩도 박히고.”
“세뇌도 듬뿍 당하고.”
“아- 약에도 절여졌거든요.”
나루 클론들의 정신 어질어질한 친화력에도 유 이사 클론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희연의 곁을 지켜섰다.
“어. 그럼 선배님들은 본체가 없는 건가요?”
“와 좋겠다.”
“그럼 정신파로 하는 작전명령하달 같은 건요?”
너무나도 복작복작한 나루 클론들의 반응에 참고 주저했던 희연이 외쳤다.
“다들-주두기 닷쳐!”(다들 주둥이 닥쳐!)
작고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나루 클론들의 고개가 동시에 휙- 꺾였다.
“U+ 선배님 본체?”
“본체는 없다고 하지 않았어?”
“어린 시절?”
“클론 선배님의 어린 시절?”
잠시 쑥덕이던 나루 클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꺄아아아앗- 선배님 귀여워—”””
우르르 몰려든 나루 클론들에 희연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져리 가앗!”(저리 갓!)
“““아아아앗- ‘져리 가앗’ 한 번만 더 해주세요.”””
뭐지 이년들은?
몬트리올에서 오타와로 돌아오는 도중 희연이 겪은 당혹스러움은 기순도 고스란히 당했다.
“기순?”
“와 진짜 기순이다.”
“아니야! 저건 짜가순!”
“왜?”
“촉수가 없잖아.”
“맞다. 노촉수 노기순. 노매력.”
기순은 여러 의미로 어질어질했다.
나루는 분명 촉수가 돋은 그를 혐오했었다.
설마.
혐오했던 건 겉으로만 그랬을 뿐 속으로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기순은 살짝 떨리는 속마음을 감춘 뒤 나루 클론을 ‘직접’ 인솔했다.
“지금부터 종합건강검진을 시작으로 정밀검진하려고 하니, 다들 병원으로 갑시다. 어디 아프거나 문제 있는 사람은 바로 이야기를 해요.”
나루와 똑같이 생긴 클론이 넷이나 있었음에도 기순은 태연히 대응할 수 있었다. 역시 가상현실에서 단련한 보람이 있었다.
“?”
“병원? 실험실 아니라?”
“좋은 기순?”
“그린 순.”
“4호랑 18호 빨리 왔으면.”
“그러게.”
오리 새끼처럼 뒤 졸졸 따르는 나루 클론들 때문인지, 기순의 실눈은 그저 호선을 그릴 뿐이었다. 보글보글 떠드는 나루 클론들을 보자면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 나는 기순이었다.
‘······.’
천진난만한 나루의 클론들을 보며 기순은 어쩐지 만감이 교차했다.
‘마루야. 착해진 동생이 여럿으로 늘었다고 생각하자.’
기순의 휘어진 실눈이 노랗게 물드는 서남쪽으로 향했다.
======
======
노을에 비친 블라디 아크 타워는 검붉게 타올랐다.
검은색 태양광 패널과 붉은색 특수 자재로 어우러진 빌딩은 하얗게 눈이 쌓인 도시에서 불타는 이정표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마루는 상반신이 열린 서양식 관 속을 말없이 바라봤다. 예전 모습 그대로인 나루는 꼭 잠든 것처럼 보였다.
“······.”
“······.”
‘산삼은 죽지 않을 것 같았는데.’ 김 양이 간호사와 작게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루는 그저 그 자리를 가만히 지켜섰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쩐지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체를 봤음에도 현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잘못한 걸까? 그냥 때려서라도 끌고 왔어야 하나?
기순은 제국을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기준으로 삼자던 국경선을 기존 캐나다 국경으로 원복하자고 주장했고, 탈출한 나루 클론에 대한 권한도 확보했다.
그것도 모자라 클론을 연구한 연구자료를 전부 넘기라고 했으며, 나루 클론과 관계된 자료를 전부 폐기할 것을 말했다고 했다.
기순이 그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그런 생각이었으리라.
나루가 죽었다는 이유로 신성 국가를 통째로 피바다에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겠지.
마루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전에 다짐했던 원칙을 바꿀 생각도 없었다.
‘건드리면 반드시 복수한다는 원칙.’
“에리카.”
담담하게 부르는 마루의 목소리에, 에리카가 ‘네.’하고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상황을 확인해줘. 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죽인 이유가 뭔지 최대한 자세하게.”
“···시작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은 채 누워있는 나루의 창백한 손에 얹어진 에리카의 손. 시간이 지날수록 에리카의 눈동자가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주저주저하는 에리카의 모습에 마루의 낮은 목소리가 되물었다.
“제국이 죽였나?”
“저. 그게 아니라요.”
“······.”
“시신에 사념이 거의 남지 않았어요. 너무 없어서 깨끗할 정도요.”
사념이 없다고? 사념이 없을 리가···.
“그러니까. 어. 여기 누워있는 분.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이 아니면?
“클론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