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605)
러스트 [RUST]-605
12월 중순.
날씨는 순식간에 영하 20~30도를 오르락내리락했고, 블리자드(blizzard-눈보라)가 몰아쳐 사실상 비행선으로 이동한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미쳤어?”
혀 짧은 소리를 내기 싫었던 희연이 기순을 막기 위해 링크까지 해서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고속 비행선으로 뚫고 가면 해볼 만해. 근데 링크까지 했는데 혀가 짧구나. 내가 네 친구냐?”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클론들을 디트로이트로 보내! 나주연 제약 능력이면 해독제 만들 수 있을 거 아니야?”
민감하게 반응하는 희연에게 기순이 유들거렸다.
“어이구. 왜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지. 황송하네”
“네가 죽으면···. 싫어하시니까.”
희연의 대답에 뭔가 알았다는 듯 눈꼬리를 휘는 기순.
“어이구 그러셨어요.”
“지금 장난이 나와? 이런 날씨에 그것도 혼자 제국으로 가겠다면서?”
‘오이구-오이구- 그랬어요?’ 하던 기순이 표정을 바꾸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 나주연이 약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걸려.”
“······.”
“그때까지 버티려면 샘플이 필요하고 제국에서 쟤들에게 뭔 짓을 했는지 알아야 해. 그리고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것이고. 주저하다 시간이 지나면 오가기 더 위험해질 뿐이야.”
“···걔들은 자기들 상태가 어떤지 왜 말하지 않은 거야?”
“말했잖아. 걔들 처음에 만났을 때 생각해봐.”
처음 만났을 때? 희연이 뇌리에 떠오른 기억.
‘선배님들 집단 탈출은 정말 대단하셨어요.’
‘선배님들 덕에 저희는 생체칩도 박히고.’
‘세뇌도 듬뿍 당하고.’
‘아- 약에도 절여졌거든요.’
어? 그게 그 소리였어?
희연이 기억을 떠올린 것을 알았는지, 기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건강검진과 정밀진단부터 시켰는데, 별달리 걸린 게 없었거든.”
“···검사에 걸리지 않게 노리고 했다는 거야?”
“아마도. 클론들도 자기들이 그렇게 될지 몰랐던 눈치였고.”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클론을 미끼로 삼은 거잖아. 근데도 혼자 가겠다고?”
비행선으로 날아서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가, 설상차로 간다면 아무리 빨라도 1박 2일은 잡아야 했다. 중간에 블리자드라도 만난다면 얼마나 더 늘어질지 모르는 게 사실.
“미끼 삼은 건지, 클론을 뺏기면 자연스럽게 처리 되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너를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네 본체를 데려가 봐야 의미 없고, 본체와 클론을 같이 데려가면, 네가 유 이사 클론을 가져갔다고 밝히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나루 클론이 중요해?”
기순이 설핏 미소 지었다.
“그럼. 걔들 전부 통통 튀잖냐? 그리고 우리 왕님이 그랬잖아. 인격이 있는 클론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해 볼 수 있을 만큼 해봐야겠지. 그럼 또 아냐? 왕님만 찾던 나루들이 나를 다시 볼지.”
“꺼져버려.”
“···잊었나 본데, 여기 총독집무실이다.”
“······.”
휙 돌아나가는 뒷모습을 본 기순이 피식 웃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그렇게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지.’
마루쉑 핑계를 대고, 자아가 있는 클론은 사람과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사실 희연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나루 클론이야 본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클론이었을 따름이었고.
정 아깝고 안타깝다 싶으면 뇌 스켄 한 뒤, 디트로이트의 가상현실에 넣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나중에라도 몸 만들어서 넣어주면 되는 일 아니던가?
하지만 가상현실에서 만 단위로 죽고 죽였던 나루와는 전혀 다른 반응들. 클론 하나하나가 과거의 파편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에 기순은 기분이 묘해졌다.
이율배반적인 생각들. 어차피 죽어도 새로 뽑으면 그만이라는 생각과 죽음으로 변해버린다는 생각이 뒤섞였다.
기순 자신만 하더라도 관점이 변한 게 사실이었다. 죽음에 대해, 인간적임에 대해 변해버린 가치관.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덴 브라운 아재. 하는 짓을 보니 진지하게 한 번 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이지.’
자신이 나루를 짝사랑했다는 건 알려졌을 테고, 나루 클론을 위해 미친 짓을 해도 개연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나루 클론에 대한 것도 마무리 짓고, 덴 브라운 총통과 제국 분위기도 살피고. 여차하면···.’
기순은 연녹색 액체가 담긴 만년필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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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와(Ottawa)에서 뉴욕까지의 거리는 대략 720km가량. 자동차로는 7~8시간이 걸렸고, 일반 항공기로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고도 10~11km까지 올라가 최고 속도 250km까지 내는 고속 비행선으로 갔을 때는 2시간 30분 내외.
기순은 보조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고속 비행선을 이용해 뉴욕으로 날아갔다. 높은 고도로 날아가는지라, 아래 깔린 짙은 눈구름 때문에 정찰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운 기순이었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디트로이트가 완전히 변한 것처럼, 제국의 중심 뉴욕도 많이 변해있었다.
‘성벽?’
외곽에 있는 건물들을 연결해 만든 거대한 성벽과 화려한 LED 광고판의 어울림은 흡사 사이버펑크 차원으로 넘어온 것만 같았다.
‘뉴욕에 성벽이라···.’
대형 괴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는 제국이 대형 변이 괴수에 고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만에 하나라는 이유로 뉴욕에 성벽에 둘렀다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뚫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상정했다는 뜻이기 때문.
신성 왕국 캐나다 총독이 직접 왔다는 말에, 제국 외교부는 콩 튀듯 튀었다. 그렇게 호들갑 떤 것과는 달리 응접실에서 한참을 대기시키는 덴 브라운 총통의 행동에 기순은 쓰게 웃었다.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군.’
급하게 면담을 요청했는데, 시간을 끈다는 건. 나루 클론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의미했다.
동시에, 기순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역으로 생각하면 시간을 끌어도 나루 클론들이 죽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 있기에 시간을 끄는 것 아니겠나?
시간을 끌어 나루 클론들이 전부 죽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나루도 아니고 나루 클론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전쟁이 터지지는 않겠지만, 서로 불편해지겠지.
덴 브라운 총통이라면 적정선을 지킬 게 분명했다. 그래서 기순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대신에 제국의 변화를 직접 확인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제설장비와 제설작업. 그리고 신성 왕국에서 수입한 파워로더형 엑소슈트를 개조해 장갑을 덧댄 엑소슈트들이 순찰하는 모습이었다.
기순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꼴을 보기 싫었는지 금세 사람이 붙었다.
“접견실로 모시겠습니다.”
블라디나루 클론들이 약의 부작용으로 시름시름 앓아서 급하게 날아왔음에도 평정심을 지키는 기순의 모습에 덴 브라운 총통은 내심 감탄했다.
“오느라 고생했네.”
“고생시키지 않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기순이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며 대답했다. 총통과 총독의 대화라고는 들리지 않는 편안한 분위기. 무엇보다 존댓말이나 평어를 하던 총통의 어투가 변해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나?”
“어쩐지 쓰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국토안보국 현장 요원으로 잔뼈가 굵은 덴 브라운이었기에, 기순이 꺼낸 만년필이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쓰고 싶을 때라.’
그냥 넘어가는 대답처럼 보였지만, 기순은 숨기지 않았다. 그걸 덴 브라운 총통도 알아들었고.
옛날 식인귀가 된 유력 가문의 노괴들을 싸그리 정리했었던 일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쓰고 싶을 때 써야지. 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쓸 때는 과감히 써야죠.”
데칼코마니처럼 찻잔을 든 두 사람이, 호르륵 차를 마셨다.
그 적막함 속에서 덴 브라운과 기순의 시선이 마주치자, 찻잔에 가려진 입꼬리가 동시에 슬며시 위로 솟았다. 서로 간 볼 필요 없는 상대임을 직감한 두 사람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총독은 할 만한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기준으로 잡자고 한 건 신성 왕국의 제의였던 걸로 기억하네만.”
“보조해주는 인공지능이 있어서 그냥저냥 할 만합니다. 강을 기준으로 하면 뭐합니까? 괴수들이 강을 건너 북으로 올라오는 판국에 말이죠.”
호르륵-
차를 마시며 모르쇠 하는 덴 브라운을 향해 기순이 그대로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다.
“이러다가 북에서 내려오는 괴수들도 남으로 내려갈지 모르겠습니다. 이쪽도 버펄로와 무스, 엘크가 남하하면서 늑대와 곰이 같이 따라 내려와서 난리가 아니었거든요. 남쪽에서 올라오는 괴수를 막느라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괴수들을 놓치게 생겨서 안타깝네요.”
“지금 협박하나?”
덴 브라운 총통이 직설적으로 대응했다.
협박이라는 말을 쓴 순간부터, 협박이 된다는 걸 의미하는 법. 그러니까 기순이 뉴욕 외곽에서 본 성벽이 단순한 히스테리로 쌓은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기순은 담담하게 답할 수 있었다.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국에서 세인트로렌스 강 남쪽에 서식하는 괴수들을 잡지 못하면, 곧 벌어질 일이고요.”
“그러니까 토벌하지 못할 거면 토해내라?”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괴수까지 감당하면 되는 겁니다.”
“옳은 말이야. 그래서 클론을 양산하고자 했네.”
“양산하려고 했더니 하필 블라디나루 칼린으로 만든 클론이었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나루를 이용해 클론을 뽑아 놓고 우연이라고 한다면 급이 떨어지는 변명이었다.
“변명할 생각 없네. 당연히 의도했지. 그 블라디마루 칼린의 동생이라면 최소한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클론 생산성도 최고 수준이었고.”
클론 생산성이란 양산시 DNA 손상이나 편차가 적은 특성을 의미했다. 시험관에서 배양하는 방식인지라 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25~30%에 육박하는 공정임에도 나루를 베이스로 한 클론은 거의 1% 미만으로 불량이 나왔다.
“지금까지도 그보다 더 좋은 클론 모체를 구하지 못한 상황이네.”
“유 이사를 베이스로 한 클론도 있지 않습니까?”
“클론의 전투력만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지만, 생산성이 너무 떨어졌어. 대량생산에서는 불량 확률이 너무 높았지. 그렇다고 개별 생산을 하면 통제력이 떨어졌고.”
통제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와 함께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기순을 바라보는 덴 브라운이었다.
“시애틀 전선에서 집단으로 탈주한 U+ 프로그램 클론들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찾기 어렵더군. 남부연맹으로 간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먹고 살기 힘든 다른 주에 들어갔다면 소문이 났을 테고. 그럼 그 클론들이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탈출한 유 이사의 클론이 있는 곳은 소거법으로 신성 왕국이다? 그 말입니까?”
“그런 심증이 있더라도 참고 있었다는 말이네. 의심은 했을지언정, 신성 왕국과의 관계를 깨고자 하지 않았다는 걸세.”
“좋습니다. 그래서요?”
“본래 캐나다 지역 영토를 넘겨주지. 그리고 신성 왕국으로 탈출한 블라디나루 칼린의 클론에서도 손을 떼겠어.”
의외로 시원하게 나오는 덴 브라운 총통이었다.
“하지만 블라디나루 칼린을 모체로 한 연구를 넘기는 것과 연구자료파기는 할 수 없어. 신성 왕국에서 클론에 적합하면서, 동시에 통제하기 수월하고, 발전 가능성까지 있는 모체를 넘겨준다면 모를까.”
“신성 왕국 국왕의 여동생을 꼭 클론으로 쓰겠다는 소립니까? 블라디마루가 꼭지가 돌면 감당하기 힘들 텐데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오기를 바랐어. 자네가 아니고.”
“···죽고 싶은 겁니까?”
죽음이라는 말에도 덴 브라운의 형형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요새화된 뉴욕에 침투해, 날 죽이고 나간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피는 흘리겠지. 그리고 그거면 남는 장사고. 어차피 핵으로 전면전 할 건 아니지 않은가?”
덴 브라운 총통은 마루의 DNA를 탐냄을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광기에 가까운 덴 브라운의 반응에 기순은 뭐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서로 전쟁하지 않더라도 이대로 가면 오래 버티기 쉽지 않아. 이쪽이든 그쪽이든.”
덴 브라운이 태블릿을 기순 쪽으로 내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신성 왕국도 알겠지만, 괴수 놈들 인간을 먹으면 더 강해지고 더 빨리 변이를 일으키더군. 천만 단위가 넘어가는 제국 시민을 잡아먹은 괴수들이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그런 괴수 놈들을 신성 왕국이 홀로 감당할 수 있겠나?”
태블릿에 떠오른 정보대로라면 제국 측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제일 위험한 건 병력의 소진이었다. 겨울이 지나기 전 모병제를 폐지하고 징병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20대를, 이후에는 30대까지. 심지어 클론을 뽑으면서도 계속 징병을 유지해야 한다는 보고자료였다.
남부연맹도 마찬가지. 식인귀, 늑대인간, 흡혈귀가 됐다고 한들, 인간이 괴수에게 전부 잡아먹히면 그들도 끝인지라 그쪽도 괴수들과 싸우는데 정신없었다.
“그래서 클론 시체를 보낸 겁니까? 클론을 연구해 보라고? 겸사겸사 도발까지 하면서?”
덴 브라운은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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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어디?’
눈을 안으로 파내 만든 간이 이글루 비슷한 공간이었다. 갑자기 의식을 잃어버리면 어디론가 이동해있었다. 그러니까 몽유병처럼.
정신파를 이용해 구조신호를 보내려 정신을 집중하려고 하자, 끔찍한 두통이 생겼다. 마치 강제로 전두엽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
으으윽-
집중을 풀자, 서서히 가라앉는 두통에 4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기억을 도려낸 것만 같은 기분.
‘다른 애들에게 경고한 뒤, 북쪽으로 도망쳐 신성 왕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4호는 눈구덩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응?
어쩐지 몸이 둔한 느낌.
주섬주섬 여기저기 몸을 더듬어 보니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있었다.
옷이 어디서 나서.
입은 기억도 없지만.
4호는 주머니를 뒤져 약을 찾았다. 약봉지가 2개가 나왔다.
?
하나는 4호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8호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