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63)
러스트 [RUST]-63
마루는 조용히 갑판을 돌았다.
주갑판과 살롱이 단차 없이 이어진 형태라 동선에 불편함은 없었다. 카타마란이라 그런지 아니면 커스텀한 요트라 그런지 살롱도 상당히 넓었다. 3층의 콕핏까지 본다면 어지간한 아파트 면적이나 비슷해 보였다. 배는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흘렀다.
구석으로 가서 사라진 경호원 여자가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사라졌지? 마술인가? 인식의 허점을 활용한 속임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놀라웠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기순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졸리면 자지, 자동 항법 장치에 뭔 인공지능 머시기에, 로봇 어쩌고도 달린 거라더니···.
“그래도 밤에 항행하려면 사람이 깨어 있어야지, 존나 2톤 미만의 작은 배는 식별 장치나 GPS 연동 위치 확인 장치 이딴 거 안 달린 게 많아서, 아차 하면 사고 터져.”
하긴 낚싯배가 많은 해역이라 조심스럽게 가는 게 맞기는 했다. 늦은 밤이라고 해야 할까 새벽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깜깜할 때 마리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경에서 한 번 정도는 확인할 법했건만, 역시 부산에서 샬롯의 이름은 이름값을 했다.
“아 맞다. 아까 뉴스 보니까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겠더라. 계획은 바로 대마도 가서, 대마도에서 규슈, 간몬해협 넘어가, 세토 내해 돌아서 가는 코스였는데 완전 어렵겠더라.”
개판이 터지면서 간몬해협, 세토 내해 쪽이 끝장났다는 뉴스였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곳이라 일본 해상보안청에서 질서유지에 힘쓰고 있던 해역이었다.
해상보안청이 지진으로 터지면서 손을 놓자, 먼저 가겠다고 난리 친 선박끼리 충돌하고 잔해가 부유하고 그 잔해에 맞부딪치고, 잔해 피한다고 급격히 방향 바꾸다가 또 부딪치고, 심지어 해류까지 강해서 작은 요트들은 거기서 그냥 갈려 나갔다고 했다.
“일단, 좀 돌아도 안전하게 가려고. 규슈 남부를 빙 돌아···. 아- 마루야 저거 배지?”
기순이 어두운 바다 저쪽을 가리켰다. 확실히 작은 불빛이 여럿 둥둥 떠 있었다.
“이 시간에 이쪽에 낚싯배들이 뭉쳐있다고? 이거 쎄한데?”
기순이 바로 해경에 연락했다. 현재 위치를 해경에게 말한 기순이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틀었다. 남쪽 바다 저쪽에서 서서히 몰려드는 작은 낚싯배들. 마치 작은 반딧불이 뭉쳐 움직이는 것 같았다.
20~30분이나 지났을까? 해경 마크를 찍은 배 여러 척이 저쪽으로 향했다. 배들이 엉켜 마치, 교통사고가 난 것처럼 바다가 어수선해졌다.
[··· 제보 감사드립니다. 좋은 항해 되십시오.]“예. 수고 많으셨습니다.”
해경과 기순이 통신을 끝냈다.
“무슨 일이었다는 데?”
“저거 다 일본에서 온 배라더라.”
“저 고깃배들이 전부?”
“그래. 큰 요트들은 식별번호 박혀 있기도 하고, 레이더에도 잘 걸려서 한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니까 밤을 틈타 낚싯배로 한국 넘어오는 거라고.”
이게 실화냐? 대체 어제 무슨 일이 터졌길래.
“규슈 화산 터졌다고 했잖아. 그게 엄청 높이까지 화산재랑 연기를 내뿜어서 규슈 전 지역이랑 혼슈 서부 일부까지 항공기 운항 불가능한 항공 불가 구역을 만들었다네. 비행기가 완전히 아웃 되면서 한국으로 피난 오겠다는 일본인들이 갑자기 폭증했고.”
“뭐 다들 좀 안전한 곳에 있겠다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일본에 있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니고. 아닌가? 도쿄 생각하면 도망치는 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왜 홋카이도나 오키나와로 가지 않고 한국이지? 혼슈 북부랑 홋카이도, 오키나와는 별문제 없잖아. 홋카이도 크기는 사실상 한국 크기랑 비슷한 크기고. 거기로 가면 되겠구먼.
“그렇기는 한데, 지금이 코로나 시국에 겹쳐서 일본발 특이 변형 바이러스 때문에 난리야. 일
본에서도 일본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 일본을 떠나려는 거지.”
특이 변이라면 대체 얼마나 위험하길래.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일본발 방사능 변이 아니냐? 일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용해 생화학 무기 만들려고 한 거 아니냐? 여튼 여론이고 정치권이고 환장이다. 뭣보다 현실적으로도 문제야 일본 사람들 격리관찰 어떻게 함? 좆된 거지.”
건너오는 것을 막는 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민간인들이 들어오는 걸 무력으로 때려 막을 수도 없고. 해경이 어떻게 막고 있기는 하지만, 버티지 못해 해군이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렇게 마루와 기순이 두런두런 잡담하는 데 선수 그러니까, 배 앞부분에서 뭔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퉁-그그그극-
마루가 손가락을 하나 세워 입술에 댔다. 기순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쿵! 쿵! 두 번 발을 구르며 누름 벨을 눌렀다. 1층 룸에서 진동이 울렸다. 신호를 보냈으니, 다들 준비할 거다.
그냥 통발이나 부표 같은 거였으면 좋겠는데···.
크극- 긁히는 쇳소리와 함께 밀리는지 끌리는지, 끼기기기긱 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배 중간 부분에서 뚝 멈췄다.
그리고 뭔가 매달리는 소리. 사람이다. 마루는 보위 나이프의 손잡이를 잡았다. 기순이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무슨 소릴. 야밤에 배에 올라타는 놈들을 그냥 두라고?’
마루가 눈빛으로 말하자, 기순은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를 살피고는 다시 마루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까 그 여자 못 찾았잖아. 지금도 보이지 않고.’
그러니까 기순은 그 여자가 개입하기 전까지 일단 지켜보라는 소리였다. 마루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큰 배. 우리 거야?] [그럼. 자 먼저 올라가.]일본어? 근데 내용이 이상한데? 마루가 기순을 봤다. 기순도 이게 뭔 말인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크그그극!
오른쪽뿐 아니라 왼쪽 선수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최소 2척 이상의 작은 배가 카타마란의 양쪽에 매달려 있다는 소리였다. 크극- 소리와 함께 사람이 매달려 올라오는 소리.
다 올라오더니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빨리빨리. 조용히 하고. 큰 배니까 사람이 많이 타고 있을지도 몰라.] [계획한 대로 제압한다. 주저하지 마. 여차하면 바다에 던져 버리면 되니까.]기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숫제 해적 아닌가? 마루는 슬쩍 보위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헬름스테이션(조종석)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기순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야. 마루는 칼을 든 손을 등 뒤로 숨기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꼼짝 마. 바닥에 엎드려.]작살총을 든 사람이 조종석에 앉은 기순에게 총구를 겨누며 소리 질렀다. 기순은 선선히 두 손을 들고 조종석에서 일어나 바닥에···.
끄아악!
밖에서 비명이 터지자, 작살총을 기순에게 겨눴던 사람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써컥!
팔뚝이 잘렸다. 비명이라도 질러야 할 터인데
쓰컥!
둥실 떠오른 머리는 소리하나 내지 못했다. 헤- 그런 광경을 처음 본 기순이 입을 벌렸다.
“정신 차려! 나오지 말고 구석에 있어. 대충 정리하고 올 테니, 그리고 그 여자 여기로 들어오면 나가지 못하게 해.”
기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조종실에서 밖으로 몸을 날린 마루였다. 조종실 밖은 차가운 가을 바다가 무색하게 살의와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하아- 마루의 깊은 들숨에 차가운 공기가 폐에 들어찼다. 연막 속에서 싸웠던 기억이 잠깐 내달렸다.
후우- 속에서 달궈진 공기가 증기처럼 날숨으로 뿜어졌다. 하얗게, 뿌옇게 흐드러진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타다닥- 짧게 발 구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왼쪽 상부 갑판 위에서 엽총을 좌우로 흔들고 있는 사내를 향해 쏘아진 마루.
힉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마루를 향해 총구를 돌리지만, 늦었다.
느려. 느리다.
반응이 느리다. 움직임이 느리다. 방아쇠를 먼저 당겼어야지.
길고 낮게 이어지는 고기 써는 소리. 보위 나이프가 대각선으로 사/내를 만들었다.
퍽! 피가 사방으로 튀기 전, 배 밖으로 갈라진 몸통을 밀어 차버렸다. 어두운 가을 바다에서 이별하는 사내의 상체와 하체.
히이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압축가스 터지는 소리. 마루는 감각대로 보위 나이프를 흔들었다.
피잉! 티잉!
쏘아진 작살이, 보위 나이프에 걸려 불꽃을 튀었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반발력을 느끼며, 마루는 들고 있던 보위 나이프를 사이드암 투수의 자세로 던져버렸다.
휘리리리, 부메랑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보위 나이프가 작살총을 든 사람의 목을 자르고 살롱 바깥쪽에 틀어박혔다.
스르릉-스르르잉-
허리춤의 아재 칼이 뽑히면서 앙탈 부렸다. 치이이이잉- 검명이 파도 소리와 어울렸다.
느려, 전부 느려터졌다. 약쟁이들 보다 느렸고 최 전무와 직속부대보다 느렸다. 대체 뭘 믿고, 해적질이지?
왼쪽에서 느껴졌던 기운은 모두 6명이었다. 3명을 정리했으니까 3명이 더 남았고, 오른쪽은 7명 아니, 애새끼까지 합하면 10명.
이 지랄인데도 경호원 여자가 박혀 있는 건 아니겠지?
다다닥- 갑판. 갑판. 연속으로 밟아 가속한 뒤 조종실 창문을 밟아 튕겨 올랐다.
2층으로 불쑥 날아오른 마루가 아재 칼을 쭉 뻗었다. 위에서 아래로 38구경 리볼버를 내밀려던 여자가 가벼운 꼬치가 됐다.
푹! 스그극!
꼬치에서 반숙 계란으로 변해, 2층에 쏟아지기 전, 마루가 여자의 허리를 휘감아 던졌다. 배 밖으로 날아가는 여자.
지이이잉!
아주 미세한 전기음? 스파크? 라디오 전원을 켰을 때 느껴지는 그런 느낌에 마루는 2층 구석에 칼질을 냈다.
픽- 공기 썰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얇게 깨졌다. 파칭- 깨져 나가는 작은 LED 소자들. 그 속에 있던 작은 여자가 불퉁한 눈빛을 하곤 단검으로 마루의 칼질을 빗겨냈다.
뭐? 어쩌라고?
숨어있었으면서.
마루는 쿨하게 순리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있으면 적인지 아군인지 알게 뭔가?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를 하든, 올라올 일 없게 2층을 정리하든 했으면 됐을 일 아닌가?
스극- 마루의 칼질을 비껴낸 단검. 경호원 여자의 빈손이 허벅지 홀스터를 향했다.
진짜? 정말?
마루가 눈빛으로 말했다.
경호해주기로 했었지, 경호원의 총질을 참아주기로 한 적 없었으니까. 마루가 힘을 주자, 칼날의 살아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칙- 단검에 빗겨나던 칼날이 V자로 반등하며 여자의 얼굴에 깊은 추억을 남기려 했다. 무표정이었던 작은 여자의 얼굴에 깊은 표정이 생기기 직전 목소리가 들렸다.
“나츠메 아야코.”
뒹굴. 데굴데굴. 톡-
뒤로 뒹굴 한 번 구르고, 데굴데굴 낙법도 구름도 아닌 방식으로 굴러간 작은 여자가, 대역 누님 옆으로 굴러가 톡- 일어섰다.
데굴 전공 체조 선수도 아니고···. 근데 빠르네. 데굴데굴 언제 저렇게 굴러갔데? 보고 있으면서도 신기했다.
“너무 깊어 보여서요.”
음- 칼질이 깊어 보였다? 그걸 봤다는 소린데. 대단하네.
“심 사장님을 경호하기로 했었지, 경호원의 총질을 맞아주기로 한 적은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그래도 여자의 얼굴에 칼질은 너무하지 않나요?”
마루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여자가 쏜 총에 맞으면 괜찮답니까? 여자든 남자든 총 맞으면 뒈지라는 겁니다. 어렵게 살았는데, 총 맞아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의 긴 생머리를 끝을 한 번 슥- 쓰다듬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츠메가 마루씨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고 해서 오해가 생겼네요. 그건 나츠메도 사과할 겁니다.”
그 말에 옆의 작은 여자가 꾸벅 숙였다.
“사죄의 의미도 되겠지만, 나츠메의 솜씨도 알고 계셔야 앞으로 편할 것 같으니. 나츠메, 아래를 정리하고 오렴. 마루씨는 이쪽으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 여자가 착- 소음기 달린 권총과 다이버 나이프를 뽑아 들고 2층에서 1층으로 뛰어내렸다.
1층 배의 갑판이 잘 보이는 2층 한쪽. 심 사장과 마루가 나츠메의 움직임을 구경했다. 작은 여자는 무게 중심을 최대한 낮춰 움직였다. 파도 소리에 묻혀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학미채? 그런 게 없더라도 훌륭한 은폐 기동이었다. 무게 중심을 낮춰 사사삭 움직이는 작은 여자는 소리 없이 1층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거의 5~6m 가까이 가서야 나츠메를 발견한 사람들이 작살총과 엽총으로 위협했다.
투캉! 투캉!
위협이고 나발이고 대놓고 정면에서 권총을 쏴대는 나츠메였다. 김 양처럼 머리와 가슴, 관절을 노리는 총질이 아니었다. 그냥 대놓고 마구 쏴대는 총질. 설마 이걸 실력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실력을 감추겠다는 건가?
10명 가운데 5~6명이 순식간에 쓰러졌고, 살아남은 나머지 몇은 총소리가 나자마자 애들 끌어안고 엎드린 사람들이었다.
‘뭐 볼 것도 없네.’
해적이고 나발이고, 왼쪽에 올라온 사람들이 훨씬 나았다. 2층에 권총을 가진 여자를 보내 놓은 것도 그렇고. 조종실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서로 서로의 뒤를 봐줄 수 있는 진형도 그렇고. 무장도 제법이었고. 마루가 그런 생각으로 음- 하고 있을 무렵.
나츠메는 탄창을 재빨리 간 뒤, 엎드린 사람들, 아이들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앗 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조종실 문이 벌컥 열리며 기순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