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66)
러스트 [RUST]-66
“얼음! 얼음! 제빙기에서 얼음 가져와!”
기순의 외침에 김 양은 착하게 움직였다.
착한 생각. 나 팔에 깁스했지만, 얼음 가져온다. 착한 생각. 나 왼쪽 등판에 구멍 뚫렸지만, 얼음 가져간다. 진짜 착한 생각. 흐흐흐. 완전 착한 생각. 김 양에게서 흘러나오는 착한 살기에 구석에 있던 그림자가 순간 움찔 일렁였다.
기순과 김 양은 열심히 배 앞쪽에 있는 6인용 월풀에 얼음을 채워 넣었다. 그동안 자칭 심 사장은 마루의 흔적 가득 반파된 요트를 살피고 있었다.
외벽이 갈린 흔적, 여기저기 총알구멍. 바닥에 흥건한 잔해들과 핏덩이들. ‘지옥이네.’ 심 사장은 요트 조종실 들어가 이것저것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진 블랙박스. 통화기록 항해기록이 담긴 것이었다.
‘하나 챙겼으니, 다른 건.’
일단 CCTV 기록을 제거하고 물리적으로 하드를 뽑은 뒤, 퐁당. 다음으로는 총화기와 연료를 빼 오고 불 지르면 끝인가? 70ft짜리 파워 요트 가끔씩 임원들이 타고 놀던 배였다. 이것도 제법 괜찮은 밴데, 이렇게 끝나다니.
이 난장판을 단 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 과연 믿을까? 20m짜리 대형 요트에 30명 가까운 무장 인력이 타고 있었는데, 꼴랑 한 사람이 보위 나이프 하나 달랑 들고 뛰어 들어가서, 전부 썰어버리고 요트 외벽까지 썰었다는 걸 누가 믿을까? 직접 본 사람도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심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손 잘못 썼다가 파탄 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역시 일단은 그냥 방치하는 게 정답이었다. 지금까지는 나쁜 관계도 아니었고, 친구 기순이라는 녀석과 좀 그렇긴 하지만 그 정도야 범위 안쪽이었으니까.
“그럼 일단, 정보가 샜으니 거기부터 역추적해야겠지?”
극비로 진행된 일본 방문이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도 적었다는 것. 이럴 때를 대비해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뒀는데, 역시 모든 건 준비에 달렸다.
몇이나 걸릴까? 어디까지 걸릴까? 심 사장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흉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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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이거 입어. 입고 얼음물에 들어가.”
기순은 잠수복을 마루에게 입혔다. 잠수복을 입고 차가운 얼음물에 들어가자, 전신이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 금세 사라졌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식으면서 시원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어때? 괜찮아? 그리고 손바닥. 거기 손바닥 피부 벗겨진 거 아니야?”
“벗겨진 건 아니고 물집이 살짝 잡혔다가 터졌어.”
“아니 씨발 그게 껍질 벗겨진 거지. 손 내놔. 소독하고 약 바르고 붕대 감게.”
“지금 딱 좋은데 이따 하면 안 될까?”
“지랄하지 말고 손 내밀어.”
기순의 공격에 마루가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꼈음에도 이 정도라면 장갑을 안 꼈으면 손바닥이 씹창 날 뻔했다.
“앗- 따 거.”
“에라이 새끼야. 내가 제대로 하라고 했던 건, 저렇게 하라는 게 아니었잖아. 넌 씨발 문맥을 따져서 이해를 못 하냐? 문해력에 문제 있어? 저렇게 배 한 척을 통째로 씹창을 내버리면 어쩌라고? 고유식별번호까지 있는 배라서 통째로 증발도 못 시키고. 엉?”
“불 지르고 침몰시키면 되지 뭘 어쩌긴 어째.”
“누구인가? 누가 불이라고 했어! 네놈의 머릿속에 방화가 가득 찼구나. 대가리에 철퇴라도 꽂혀야 그놈의 방화에서 벗어날래? 왜 그렇게 불을 싸지르지 못해서 난린데?”
눈동자가 착해진 김 양이 얼음 통을 들고 와 촤라락- 쏟고는 다시 제빙기로 향했다.
“야 근데 김 양은 상태가 왜 저래?”
마루의 질문에 기순이 ‘뭐가?’, ‘무슨 상태’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눈이 맛이 갔잖아. 그러니까 그 뭐라고 딱히 꼬집기는 뭐한데.”
“네가 기관단총으로 쏴대는 총알 다 피하면서 요트 옆구리를 따는 걸 보고 그 뒤부터 저런다.”
저건 또 왜 맛이 가서는. 어쨌든 김 양에게서는 그 미묘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뭔가 미묘했던 찝찝함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야. 김 양도 팔이 저런데 계속 얼음 배달시킬 거냐? 됐으니까 그만 가져오라고 해라.”
“그러지 뭐. 근데 너 중화젠지 그거 안 빨아도 되겠냐?”
“그거 앰플 주사야. 빠는 거 아니라고. 안 찔러도 된다고. 어느 정도 여력은 남겨 놨어. 로열 마리나에서 밥도 못 먹고 반나절 넘게 구른 경험이 컸다.”
“와- 지금 저게 여력을 남기고 한 짓이라고?”
“시간으로 따지면 5분? 6분? 그쯤밖에 안 걸렸잖냐. 막말로 로열 마리나에서 월드 애들이랑 최 전무 그 아재랑, 갑옷 입은 사람들에, 사방에서 달려드는 약쟁이들까지 존나 뛰어다니면서 싸웠던 거 생각하면 지금이 차라리 할만한 거다.”
특히 마지막에 최 전무랑 그 직속들이 서로서로 몸 빵을 해가며 달려들 때는 정말 아찔했었다. 약쟁이들까지 생각하면 조금도 쉬지 못하고 계속 싸웠으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이번에는 힘의 강약을 살린 것도 컸다. 최 전무의 움직임. 느릿하면서도 순간적으로 가속하는 움직임. 공격을 유도하는 움직임.
그러고 보니 백 실장도 그런 방법을 썼었다. 틈을 보여서 적이 움직이게 유도하고, 적이 온 힘을 다해 유도한 곳을 공격할 때, 공격하는 방법.
백 실장은 허리후리기인지를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빨리 칼을 꽂아 넣었다. 최 전무는 ‘후발 선제’라며 칼을 대는 순간, 비켜내면서 베기, 어긋 베기 같은 짓을 했다. 단순히 최단 거리를 빠르게 베거나 찌르는 건, 최 전무에게 막혔다.
최단 거리 공격은 경험이 풍부한 검사에게 읽혔다. 빠르게 베거나 찌르는 공격도 마치 그쪽으로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막혔다.
하지만 지금처럼 불규칙하게 움직이면서 불규칙하게 공격한다면?
급소만 공격해야 할 이유는 없다. 팔이 잘려도 아웃이고. 허벅지를 베어도 결국 아웃이다. 꼭 머리를 자르거나, 몸통을 완전히 가를 필요는 없었다. 크게 자상을 입히면 1~2분 늦어도 5분 안쪽으로 잠잠해질 테니.
“미친 소리 하지 말고. 그러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우주의 도움으로 네 대가리에 총알 박으면 어쩌려고? 그냥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기순이 월풀을 켰다. 우우웅- 소리와 함께 차가운 얼음물 거품마사지가 들어가니 얼굴이 풀어지는 마루였다.
“근데 다른 배들은 어쨌고? 튀었냐?”
“튀긴, 김 양이 모터에 총알 박아서 둥둥 떠 있다.”
“그럼 정리해야겠네. 아 근데 그놈들 한국 해경이나 일본 순시 쪽이나 신고하는 거 아냐?”
“이미, 사장 누님이 확인했다. 네가 옆구리 찢은 요트에 통신 방해 장치 있어서 그거 작동하고 덤빈 거라더라. 우리가 신고 못 하게 하려고 했던 게, 자기들 무덤 만든 거지 뭐.”
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뭐. 그래도 해결을 보긴 해야 할 텐데. 그냥 정리하고 와서 쉴까?”
“됐고. 뒤처리는 사장 누나 경호원이 하라고 하고 넌 걍 있어. 다 끝난 일인데 굳이 손에 피 묻힐 필요 없다.”
피 묻히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을 갉아먹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일상에서 살고 싶다면, 영혼에 상처를 내는 짓은 줄일수록 좋다. 기순이 대놓고 크게 말했다.
“들었죠? 다시 말하지만, 우린 이제 끝입니다. 이쪽은 쉬어야 하니까 뒤처리는 그쪽에서 해요. 하기 싫으면 말고.”
마루가 깜짝 놀랐다. 기순이 알아채고 있던 건가? 자신도 집중하지 못하면 놓치는 여자였다. 그런데 기순이 파악하고 있다니.
“뭘 그렇게 놀래. 당연하지 않겠냐? 존나 큰 보위 나이프 한 자루로 요트 옆구리 찢는 놈이 있으면 그놈이 뭔 생각하나 궁금하겠지. 당연히 여기 붙여 놓지 않겠어? 비싼 장비로 은신할 수 있는데, 그걸 놀리겠어?”
기순의 대답에 마루가 ‘그렇긴 하군.’ 했다.
“근데 진짜 신기하긴 하다. 투명망토? 광학미채? 그런 거잖아.”
“신기하긴. 실험실에서는 게리 포터 영화 나왔을 때, 이미 성공했던 거다. 벌써 10년 전 뉴투브에 나왔던 거야.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는데 필드에서 쓸 만한 거 못 만들었겠냐?”
“하긴 현실 기술도 장난 아니니까. 그래도 현실에서 보니까 존나 신기하네, 신기한 건 신기한 거지, 로망 아니냐? 투명망토.”
마루의 음흉한 표정에 기순이 낮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그리고 항상 후방이나 구석에 있는 걸 보면, 3방향은 커버가 되는 데 후방은 아닐지 몰라.”
좋은 팁이다. 뭐 전제 조건이 있는 팁이기는 하지만, 마루가 눈빛으로 알아챘다는 표시를 했다. 아주 작게 일렁이던 게 사라졌다.
잠시 뒤, 모터가 고장 나 둥둥 떠다니는 보트들이 하나씩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에 휩싸인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 살려달라는 애원, 그리고 덧없는 총소리들이 어두운 바닷속으로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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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본사.
“다들 말해 보라고, 왜 그년을 처리하지 못한 거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로열 마리나에서 떠난 인원은 고작 4명이었다. 김 양, 남자 둘, 하나는 칼잡이, 하나는 배 운전, 그리고 그년. 그렇게 4명. 혹시라도 놓친 경호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2명은 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봐야 6명
그에 반해 이쪽에서는 중무장한 60명 넘는 인원, 중기관총과 다양한 화기로 무장한 보트 6척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근데 그걸 못 잡아? 1:10인데 그걸 못 잡았다고? 산이나 도시도 아니고 도망칠 곳도 없는 망망대해. 바다 위인데?
“입이 있으면 말하라고! 대체 뭐가 문제야?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못 잡은 게 아니야!”
말하면서도 점점 화가 나는지 심은규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고, 어떻게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명량대첩인가?
김 양이 아니라 존 양이라도 그렇다. 김 양이 최근 주로 사용한다는 무기는 발터 P22. 그러니까 꼴랑 22구경 권총이다. 방탄복을 뚫기 힘든 소구경이었다.
저격을 생각해도 그렇다. 7.62mm 탄환을 쓰는 저격으로 보트를 무력화시킨다? 그게 가능하다고 치자, 존 양이라서 쏘는 족족 맞춘다고 하더라도 6척이다. 2~3척 잡았다고 쳐도 남은 건?
“일단 아무런 피해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심각한 피해를 보았을 겁니다.”
“김 양이 아니라 김 양 할머니라고 해도 60명이 넘습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인원입니다.”
“경호원이 더 붙었어도 이쪽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경호원이라면 2명 정도가 한계입니다.”
“피해를 복구하고 인원을 확충하기 위해 항구에 들를 겁니다. 아마도 최단 거리에 있는 항구. 샬롯의 지사가 있는 항구에 가려고 할 테니. 이곳과 이곳입니다.”
“여기서 일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스크린에 떠 있는 지도에 항구 두 곳이 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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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심사장이 뜯어온 블랙박스를 토닥이며 말했다.
“저쪽에서는 이쪽 전력을 알 수 없지요.”
당연했다. 커다란 보위 나이프로 요-트 해버리는 인간이 있다는 어떻게 알겠나? 거기에 김 양의 실력도 기대 이상이었다. 파도로 흔들리는 배에서 저격했음에도, 4척의 배를 혼자 막았다. 기순의 운항 실력도 좋았고, 여러모로 저쪽에서는 이쪽의 전력을 파악하기 불가능했다.
“우리를 잡지는 못했지만, 이쪽도 심각한 피해를 봤을 거로 생각하겠죠. 그래서 우리가 항구에서 수리와 인원 보충을 하리라 예측할 겁니다. 아마도 이 두 항구를 유력한 항구로 보고 매복을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린 그걸 역이용하는 거예요.”
화면에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심 사장의 말에 기순이 고개를 삐딱했다.
“역이용이요?”
“네. 우리는 배를 이쪽 섬 인근에 숨기고, 수륙양용차량을 이용해 구석에 상륙한 뒤, 뒤에서부터 저쪽을 쓸어 버리는 거죠.”
지도에 표시하던 심 사장은 고개를 돌려 기대하는 눈빛으로 마루를 바라봤다.
“사장 누님. 누님이 생각하는 바는 알겠는데, 우리가 계약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우리는 누님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도쿄 인근으로 보내주는 거였는데 말이지. 갑자기 적들의 섬멸이라니. 이거 말이 달라도 너무 다른데?”
열기 띤 눈으로 마루를 보던 심 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차갑게 변한 눈빛이 기순을 꿰뚫었다. 분위기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